조각이라는 괴물 : 동시대 미술에서의 조각에 관하여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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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이라는 괴물 : 동시대 미술에서의 조각에 관하여

조각은 얼마 전부터 그 모습을 바꿔가며 외연을 확장해가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장르 혹은
미디엄으로 떠오른 그 조각은 지금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박세회 BY 박세회 2022.09.23
 
서도호, ‘ScaledBehaviour_runOn(doorknob_11.1.1)’, 2022, polyester thread, resin, 108.5x66x12.2cm. © Do Ho Suh.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Photo by Jeon Taeg Su.

서도호, ‘ScaledBehaviour_runOn(doorknob_11.1.1)’, 2022, polyester thread, resin, 108.5x66x12.2cm. © Do Ho Suh.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Hong Kong, Seoul, and London. Photo by Jeon Taeg Su.

조각이란 뭘까? 가끔 일상을 살다가 우연히 연속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이런 물음과 마주칠 때가 있다. 지난 9월 2일, 택시에서 내려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코엑스 전시관 쪽으로 향하는데, 거대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 크기에 비해 가느다란 손목에는 ‘GANG NAM STYLE’이라고 적혀 있었다. 3억7780만원을 들여 만든 길이 8.3m, 높이 5.3m의 그 동상을 지나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프리즈 서울에 간다는 건 어떤 의미로든 드라마틱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상이 서 있는 공터의 이름은 케이팝 광장이었다. 케이팝 광장을 지나고 에스컬레이터를 지나 프리즈의 게이트에 들어섰다. 하필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리만 머핀의 갤러리였다. 수많은 사람이 리만 머핀 부스의 한가운데에 설치된 서도호 작가의 ‘통로’ 시리즈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저것은 설치작품일까, 아니면 조각일까? 조각이라면 싸이의 손목과는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를까? 그러다가 바로 옆 기둥에 붙은 비교적 작은 작품에 눈길이 갔다. 바로 이 기사의 첫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작품이다. 자그마한 사이즈의 아크릴 혹은 강화유리 상자 안에 마치 문고리 형태를 실핏줄 형상의 레진 다발로 엮어낸 듯한 묘한 물건이 걸려 있었다. 이것은 조각일까? 나는 그 순간 ‘이것은 조각이다’라고 생각했다. 조각가가 아니면 구상할 수 없는 형태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설령 서 작가는 그것을 조각이라 칭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가 조각이라는 미디엄에 대해 생각하며 이 작품을 구상했다는 것만은 거의 확실하지 않을까?
얼마 전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마친 톰 삭스의 최근작은 평면이다. 자신이 창조해 NFT로 판매한 로켓 형상의 조합을 그린 꽤 거대한 페인팅인데, 톰 삭스는 기자간담회에서 몇 번이고 “나는 조각가고, 내가 만든 모든 것은 조각”이라며 “내가 그린 그림도 조각”이라고 말했다. 뭐지? 그냥 우기면 다 조각이 되는 건가? 최고은 조각가에게 물었더니 “정말 미니멀리즘적인 자세네요. 자신의 그림은 오브제라는 거죠”라고 답했다. 누군가는 이를 말장난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림은 그림이고 조각은 조각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드는 것을 조각이라 여기는 것과 입체 회화 혹은 설치라 생각하고 만드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을까? 강남 스타일이라 적힌 거대한 동상도 조각이고, 톰 삭스의 로켓 그림도 조각이고, 서도호가 가느다란 레진 다발로 빚어낸 조형도 조각이다. 그러니까 대체 조각이란 무엇인가? 조각을 물성을 가진 입체 조형으로 정의하면 원론적으로는 이런 주장까지 가능하다. “모든 회화는 조각이다.” 아무리 얇다 한들 종이도 두께를 가지고 있고, 현미경으로 자세히 보면 부피가 있다. 페인팅은 말할 것도 없다. 물성을 가진 완벽한 평면은 개념상으로만 존재할 뿐 모든 평면은 결국 입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조각이란 마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학부 때 꽤 진지하게 러시아 소설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교수님은 소설을 ‘괴물’이라 칭했다. “일기를 쓰고도 소설이라고 하면 소설이 되고, 편지를 쓰고도 소설이라고 하면 소설이 된다. 이론상 글로 만든 거의 대부분의 것을 소설이라고 우기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이런 말이었다. 아트의 영역에선 마치 조각이 그렇다. 조각이라는 괴물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제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만하다. 누가 뭐래도 조각은 지금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미디엄이기 때문이다. 열리고 있는 전시들만 봐도 그렇다. 일민미술관에선 현재 세대를 건너 대화 중인 두 조각가 권오상과 최하늘의 전시 〈나를 닮은 사람〉이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9일부터 8월 15일 사이에는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선 전시 〈조각충동〉이 열렸고, 그보다 조금 앞선 5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하이트컬렉션에서는 12인의 조각가가 참여한 전시 〈각〉이 열렸다. 전시가 살피는 현상 역시 비슷하다. 하이트컬렉션은 전시 도록에서 매우 명확하게 적었다. “‘동시대 미술에서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작가들의 개별적인 입장과 해석을 살펴본다.”
갤러리2에서 열린 최하늘의 개인전 〈태 態 Manner〉의 전시 전경.권오상, ‘세 조각으로 구성된 와상’, 2022, Archival pigment print, mixed media, 140x240x110cm.
지금 조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잡한 상황의 시작이 권오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감지한 처음이 권오상이라고 한다면, 그건 사실이다. 처음으로 조각을 보고 ‘어? 이건 좀 다른데’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때는 그의 작품 앞이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의견은 아니다. “1998년도에 권오상은 ‘140장으로 구성된 증명의 강요’라는 작품을 발표하죠. 그의 ‘사진 조각’이 본격화한 작품이에요. 이후 권오상은 점차 추상 조각의 전조를 드러냅니다. 이번에 전시한 우디 앨런의 흉상이나 최하늘(앞 페이지 ‘세 조각으로 구성된 와상’)의 와상이 이 흐름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죠.” 일민미술관 윤율리 선임 큐레이터의 말이다. 권오상은 자신의 작품에 조각이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엔 비엔날레 등의 국제적인 미술 이벤트가 유행하던 시기였거든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비엔날레가 가장 영향력 있던 때였죠. 설치미술가라는 타이틀을 단 작가들이 융성하던 시기와도 맞물리고요.” 아트 이벤트의 성향을 꼭 집어 표현하기 위해 좀 상스러운 표현을 해보자. 갤러리들이 소속 작가 혹은 보유 작품을 팔기 위해 참여하는 프리즈 서울, 키아프 서울 등의 아트 페어는 ‘미술 장터’다. 반면, 하나의 문제의식에 대해 마치 각 국가의 아티스트들이 저마다의 양식으로 이를 표현해 답안지처럼 제출하는 비엔날레는 기후, 빈곤, 세대, 계급, 지역주의, 인종주의 등의 거대 담론을 논하는 ‘예술 올림픽’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비엔날레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설치미술 작업이 독보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하늘, ‘C1’, 2022, FRP, 90x30x170cm.

최하늘, ‘C1’, 2022, FRP, 90x30x170cm.

“당시에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보면, 작가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작품이 오브제 성격을 가지는지 등은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설치미술가로 소개되곤 했으니까요.” 실제로 이 시기의 작가들 중에는 조각 교육을 받았고 오브제적인 성격의 작품을 내놓았음에도 자의 혹은 타의로 설치미술가의 타이틀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니 그게 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중요하다. 창작하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미디엄을 대하는 태도가 작품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시기의 중요한 단어는 ‘관계성’이나 ‘장소특정성’이라는 단어가 아닐까요?” 윤 큐레이터의 말이다. 당시도 지금도, 비엔날레에 나온 국가의 전시관들이 매해 거의 건축에 가까울 만큼 장소와 장소의 내외관에 신경을 쓰고 이를 전시 작가와 함께 기획하고 의논하는 이유다. 조각은 다르다. “조각에는 ‘좌대’라는 개념이 있죠. 좌대는 회화로 따지면 프레임 같은 겁니다. 프레임은 보통 ‘다른 세계를 보는 창’이라 얘기해요. 프레임은 그 안에 있는 세계가 현실과는 다른 논리로 이해해야 하는 세계임을 알리는 경계로 작동합니다. 좌대도 마찬가지예요. 좌대 위에 있는 작품은 조형물로서의 독립성을 추구합니다.” 좌대의 경계 안쪽은 조각의 세계라는 약속 아래서, 조각이 놓인 장소는 특정적이지 않다. 놓인 장소에 따라 감상에 차이가 생길 수는 있겠으나, 장소에 특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조각이 놓인 장소가 특정적으로 변하는 경우는 있다.
조각가들이 무엇과 어떻게 싸워왔는지 그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권오상 등의 작품이 가진 의미가 도드라지지 않기도 한다. “과거 한국에서 조각이라고 하면 망치와 정을 든 석공을 생각했죠. 지금도 그런 경우가 있고요.” 최고은 조각가의 말이다. 거대한 작업장에서 수명 혹은 10여 명의 어시스턴트와 기중기 등의 기계로 다루지 않으면 작품을 완성할 수 없었던, 석공과 철공의 시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사진을 프린트한 종이 140장을 이어 붙여 완성한 흉상이 가진 의미가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유럽 광장에 있는 조각상들을 생각해보세요. 발목 부분에 다양한 여러 디테일이 있지요. 그게 다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나온 형태들이거든요. 조각은 오래전부터 ‘세우기’ 위해 중력과 싸워왔어요. 그래서 표면과 가벼워 보이게, 혹은 가뿐해 보이게 만드는 것이 새로움의 요소이기도 했지요.”
근대 조각에 대한 이해로 새롭게 보이는 작품도 있다. “조각은 근대까지 오랜 세월 동안 기념비였어요.” 윤 큐레이터가 말했다. 기념비 시대의 조각이란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이고, 세종대왕이며, 코엑스 앞의 강남 스타일이다. 나는 최하늘의 조각에서 새로운 기념비의 모습을 본다. 근대의 기념비는 언제나 서사에 묶인다. 이순신은 명량에, 세종대왕은 집현전에, 강남 스타일은 유튜브 조회수 신화에 묶여 있다. 최하늘의 기념비는 다르다. 그 자체로 서사에서 독립적이고, 그 재료는 영구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3D 프린팅을 위한 원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회적이며, 그래서 현대를 살짝 지나친 듯 미래적이다. 물론 기념비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최하늘의 스타일이 아니다. “최 작가는 기성 작가들의 작업을 본인이 전유해 영리하게 이용합니다. 이번 권오상 작가와의 2인전 〈나를 닮은 사람〉을 보면 권오상의 방법론을 가져와 융화하려 하죠. QR코드로 찍었을 때 조각 모양을 한 필터가 튀어나오는 작업도 있고, 자신의 개인전에선 평면에 프린팅한 깃발 비슷한 형태를 벽에 붙여두고 이를 조각이라 칭하기도 하지요. 최하늘은 최근 조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에 있어 젊은 조각가들의 태도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고은, ‘선베이크’, 2022, 동파이프, 50(h)x55x150cm.최고은, ‘화이트 홈 야드 White Home Yard’, 냉장고, 스탠딩 에어컨, 수지, 철, 에폭시, 가변크기, 2019.
한편 최근 이태원 폭스바겐 매장 뒤쪽 골목에 가본 세심한 사람이라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오래된 단독주택을 개조한 버거 가게 옥상에 웬 날카롭게 잘린 청동 파이프가 사슴의 파란 뿔처럼 삐죽 삐져나와 있어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최고은이다. 그는 에어컨을 자르는 조각가로 유명하다. 가장 많은 집에 보급되어 가장 많이 버려지는 백색가전을 비석처럼 세워두곤 했다. “재료를 구하러 고물상 같은 데를 가면 이 백색가전들이 마치 무덤처럼 쌓여 있어요. 이것들이 사실은 규격화된 한국의 주거 공간에 맞게 다시 규격화된 것들이고, 또 시대마다 생산된 연도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어 매우 시대 특정적이거든요. 그래서 연도가 적혀 있는 비석처럼 세워뒀어요.” 백색가전을 가공해 화이트 큐브 혹은 야외에 가져다 두는 1980년대생 최고은이 데뷔 시절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조각가냐 설치미술가냐”라는 질문이었다. “설치는 특정된 장소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요. 제 작업이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왜 그렇지 않은지는 그의 이번 작품이 가장 잘 말해준다. ‘아마도 예술 공간’이 있는 삐삣버거 건물 위에 사슴뿔처럼 삐져나온 청동 파이프는 그곳에 설치한 것이 아니다. “파이프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건물의 벽 안에 마치 뼈처럼 숨어 있단 말이죠. 그걸 꺼내서 건물이라는 좌대 위에 올리는 게 이번 전시의 목적이었어요.” 그의 작품은 장소 특정적인 게 아니라 장소가 그의 작품에 의해 특정된다. 그의 작품이 조각으로서 독립적이라는 사실은 예전 전시와의 동일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말에 열린 비비드컷츠의 파이프와 지금 아마도 예술 공간에 전시된 작품들은 장소에 상관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보인다.
이 모든 중심에는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을 조각가라 칭하기 시작한 흐름이 있다. 몇 년 전 정서영 작가의 바라캇 컨템포러리 전시를 취재했을 때 갤러리 측에서 기사에서 단 하나 수정해달라며 요청한 것이 있었다. 바로 정서영 ‘조각가’라는 사실을 똑바로 명시해달라는 요구였다. 윤 큐레이터는 “가장 큰 변화는 스스로를 조각가라 칭하는 젊은 작가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라며 “2000년대에는 스스로 조각가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조각이라는 매체를 탐구하는 작가는 상대적으로 잘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하늘 작가는 〈에스콰이어〉에 서면을 통해 “2000년대 이후에도 조각가들이 존재했지만, 설치를 병행하는 일부 작가들에 의해 조각과 설치미술의 구분이 모호해졌다”라며 “사람들이 조각과 설치를 혼동하기 시작한 것 역시 이때부터다. 꽤 긴 시간에 걸쳐 용어의 혼선이 이어졌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를 조각가라 칭하는 현대미술가들이 많아졌다. 이 흐름이 조각을 어떤 길로 인도할지는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전시 〈각〉을 기획한 신지현 큐레이터는 동시대 조각에 대해 단정적인 코멘트를 남기는 걸 주저하며 답했다. “지금 동시대 조각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복잡한 현상과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조각이 2000년대부터 시작된 긴 공백기를 지났다. 두 눈을 뜨고 지켜보면 꽤나 흥미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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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박세회
    PHOTO 리만 머핀
    일민미술관/권오상/최하늘
    아마도 예술공간/최고은
    나씽스튜디오/최고은
    ART DESIGNER 최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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