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카를로스 알카라스'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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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카를로스 알카라스'라는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오성윤 BY 오성윤 2022.06.26
 
 
한동안 전국적인 테니스 열풍이 불었던 탓인지, 요즘 주변에서 부쩍 테니스 이야기를 많이 한다. 테니스 전담 기자 생활만 15년 이상 해온 나로서는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다. 테니스 입문자의 주된 대화 주제는 일단 자신의 성장기다. ‘포핸드가 늘었어’ ‘백핸드는 정말 어렵네’ ‘서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다음 주제가 바로 테니스 그랜드슬램이다. 1년에 딱 네 차례 열리는 테니스 명예의 전당. 5월 말이면 테니스 마니아들의 술안주 소재로 가장 강력한 테마는 프랑스 오픈, 일명 ‘롤랑가로스’라 불리는, 4대 메이저 가운데 유일하게 흙바닥에서 열리는 대회다. ‘과연 누가 ‘흙신’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2005년부터 올해까지 17년간 딱 세 번 제외하고 한결같았다. 흙신 라파엘 나달이 14번 결승에 올라 14번 모두 우승컵에 입을 맞췄다. 이쯤 되면 나달의 롤랑가로스 우승은 과학이라고 해야 할까.
올해는 나달의 프랑스 오픈 우승 가능성이 그 어느 해보다도 떨어졌다는 것이 테니스 호사가들의 중론이었다. 36세에 접어든 나달의 건강 문제, 세계 1위 조코비치가 독기를 품고 메이저 우승 넘버 21을 채우기 위해 달려들 것이라는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나달 우승 불가론’의 가장 유력한 요인은 바로 혜성처럼 등장한 신예, 카를로스 알카라스의 존재였다. 롤랑가로스가 끝난 지 한참인 지금도 한 테니스 동호인은 이렇게 말한다. “알카라스가 4강에 올랐다면 나달이 우승하기 힘들었을걸?(알카라스가 나달과의 대결 문턱인 8강전에서 독일의 알렉산더 즈베레프에게 3-1로 패하는 바람에 ‘빅매치’는 성사되지 않았다.)”
카를로스 알카라스. 2022년 6월 현재 19세의 젊은 피다. 이 시대의 테니스는 30대 중반이 넘은 선수가 메이저 대회를 우습게 먹어버리는 스포츠니 19세는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수준으로 여길 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알카라스가 ‘어린애’에 속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어린애가 19세가 채 되기도 전 이미 나달과 조코비치라는 리빙 레전드들을 물리친, 테니스계에서 10년, 아니 2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는 사실이다.
알카라스라는 선수를 한마디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기캐.’ 그는 도무지 현실에 존재할 리가 없는, 우리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테니스 궁극의 이상향, 이데아를 구현한다. 로저 페더러의 날카로운 공격성에 라파엘 나달의 짐승 같은 수비력, 노박 조코비치의 무결점 테크닉을 한 몸에 갖추고 있다. 테니스라는 운동이 세상에 나온 후 역사상 최고의 남자 선수 3명의 장점만을 모조리 훔쳐온 듯한 괴물이라는 뜻이다. 삼위일체. 일찍이 테니스 세계관에 이런 캐릭터는 없었다. 공격에 방점을 찍은 선수는 필연적으로 수비에서 허점을 보이기 마련이고, 포핸드와 백핸드 서브 발리 등 테니스 테크닉에 어느 하나는 비교적 약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알카라스에게는 이런 구멍이 없다. 전혀.
알카라스가 세계를 경악하게 하는 대표적인 기술이 있다. 바로 전율스러운 포핸드다. 그가 보여주는 포핸드는 기존의 난다 긴다 하는 포핸드 강타자들과 차원이 다르다. 간단히 말하자면 너무 빠르다. 그래서 알카라스는 보통 우리가 포핸드로 득점을 내는 공식과는 사뭇 다른 방법으로 상대를 굴복시킨다. 천하의 페더러도 포핸드로 점수를 뽑아내는 루트는 빈 곳을 찌르는 것이다. 네트 건너편 상대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고, 그다음 반대편 빈 공간을 향해 날카로운 포핸드를 꽂아 점수를 가져온다. 하지만 알카라스는 상대가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으로 굳이 포핸드 강타를 때리지 않는다. 그냥 그가 서 있는 곳 근처를 겨냥해 냅다 라켓을 휘둘러버린다. 공은 총알처럼 날아가고, 남는 건 코트 바닥에 묻은 공 자국과 상대의 허무한 표정뿐이다. 지난 3월 미국 마이애미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에서 당시 세계 4위 스테파노스 치치파스가 알카라스에게 무자비한 테러를 당한 뒤 지었던 허무와 황당을 넘나드는 표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도대체 무엇이 알카라스라는 소년을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보통 천재는 ‘개천에서 용 나는’ 케이스가 많다. 알카라스는 촌놈이었다. 그의 고향은 스페인의 무르시아 엘 팔마. 소득수준은 전국 최저에 실업률 전국 최고인 스페인 남동부 벽지다. 대신 남부 유럽의 뜨거운 햇살을 넉넉히 받은 테니스 클레이 코트가 널려 있었고, 알카라스는 테니스 외에는 딱히 할 게 없었을 게다. 따지고 보면 알카라스의 대선배 나달도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 나달의 고향은 마요르카섬으로 유럽인들이 휴가지로 즐겨 찾는 관광지다. 마이클 조던도 어린 시절 노스캐롤라이나의 조용한 윌밍턴이라는 도시에서 농구 골대가 있는 곳을 찾아 헤매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이었으니, 스포츠 천재를 만드는 환경 조건은 대략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탄생 연도도 뭔가 운명적이다. 축구 황제 펠레가 은퇴한 그날 태어났다고 하는 브라질 전설의 공격수 호나우두처럼, 알카라스는 2003년에 태어났는데 그해는 남자 테니스 ‘빅3 시대’의 서막을 여는 첫해였다. 2003년 5월 알카라스가 우렁찬 울음소리를 터트리며 세상에 나온 지 불과 2개월 뒤, 로저 페더러는 윔블던에서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다. 그로부터 20년 동안 빅3인 ‘페나조(페더러, 나달, 조코비치)’는 총 62회의 그랜드슬램 챔피언을 번갈아 차지하는 스포츠 역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삼두 정치 지배 체제를 장식했다. 빅3 최고참 페더러와 알카라스의 나이 차는 21세. 띠동갑을 넘어 딱 삼촌과 조카뻘이다. 그 삼두 정치 시대를 종결시키는 역사적인 과업을 안고 태어난 알카라스, 그런데 정말 알카라스가 빅3를 제압하고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테니스 동호인들이 알카라스의 등장에 충격, 그리고 환호를 보내는 까닭이 있다. 솔직히 페나조 빅3 시대를 지켜보는 게 행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겹다’는 생각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너무 해먹었다고 해야 할까. 페더러가 2018년 호주 오픈에서 37세로 그랜드슬램 챔피언에 오른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워낙 불세출의 테니스 아이콘이니까. 그런데 페더러와 달리 단명할 것으로 예상했던 나달이 2022년에 들어와 숫자 맞추기라도 하듯 22번째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35세 막내(?) 조코비치는 아직도 세계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윔블던, US 오픈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러다 보니 빅3 다음 세대, 혹은 다다음 세대들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팔팔한 나이에 서른이 훨씬 넘은 노장들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은 아무래도 비정상 아닌가? 페나조가 강한 것도 있지만 그들과 인접한 다음 세대들이 시원찮은 건 아닌가? 테니스 호사가들이 즐겨 말하듯 지난 10년이 ‘위크 에라(weak era)’가 아닐까 의구심을 갖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살아 있는 전설들이 무대 뒤로 퇴장한 이후에도 테니스는 매력이 넘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정점에 있는 전설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얼굴이 등장해야 한다. 나달 조코비치보다 다섯 살 어린 디미트로프와 니시코리, 라오니치는 정상을 찍어보지 못하고 사라진 ‘로스트 제너레이션’으로 끝을 맺었다. 그들보다 열 살 어린 메드베데프와 즈베레프 치치파스는 키가 큰데 발도 빠른 ‘넥스트 제너레이션’이다. 그러나 끝내 앙시앵레짐을 끌어내리지는 못했다. 이제 공은 약 열다섯 살 어린 알카라스 세대에게 넘어갔다. 알카라스의 테니스를 보며 ‘심쿵’한 팬들의 마음에는 단순히 “정말 잘 친다”를 넘어선 그런 설렘이 있다. “진짜 나달이나 조코비치를 이길 수도 있겠는데?” 실제로 알카라스는 그 기대에 절반까지 호응했다. 4월 마드리드 오픈에서 나달, 그리고 조코비치를 연속으로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클레이 코트에서 그토록 강한 나달과 조코비치를 한 대회에서 물리친 건 알카라스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방의 군소 경기장이 아닌 수도인 로마 한복판의 콜로세움에서 이긴 승자만이 진짜 검투사 챔피언으로 등극할 수 있으니까. 나달과 조코비치가 서슬 퍼런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는 지금, 시대는 그들을 그랜드슬램 5세트 사투에서 꺾을 수 있는 영웅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 곧 윔블던이고 8월에는 US 오픈이 남았다. 지각판이 횡압력에 의해 끊어지면, 거대한 파동이 주변에 번진다. 만약 알카라스가 올해 안에 있는 두 번의 메이저 대회에서 페나조의 흐름을 끊는다면, 거대한 감정의 쓰나미가 테니스 팬들의 마음을 덮칠 것이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는 과감하게 베팅해보련다. 올해 안에 알카라스 대지진이 터질 것이라고.  
 
김기범은 KBS 스포츠취재부 기자다. 〈스포츠 투데이〉 〈스포츠 한국〉 등 스포츠 전문지를 두루 거쳤으며 유튜브 채널 ‘키키홀릭 테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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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오성윤
    WRITER 김기범
    ILLUSTRATOR VERANDA STUDIO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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