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링 위에 오르기 전까지 늘 자신이 천재일 거라 생각할까? | 에스콰이어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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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링 위에 오르기 전까지 늘 자신이 천재일 거라 생각할까?

오성윤 BY 오성윤 2022.05.12
 
 
처음 복싱을 시작했을 때는 아직 피가 끓던, 아니 끓는 것까지는 아니고 따듯하던 나이였다. 어려서부터 날렵한 축에 속했고, 농구를 좋아해 풋워크에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중학생 시절 2개월이나 복싱 체육관을 다니며 훅까지 마스터한 전력이 있었던 터라 금세 내가 정한 체육관의 에이스가 되리라 마음먹으며 입관 서류를 작성했다. 물론 나를 보는 관장의 마음은 좀 달랐을 것이다. 30대 중반의 아저씨가 매일 와서 워밍업 줄넘기만 여섯 세트를 하며 열정을 불태우니 좀 무서웠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관장은 사실 내 육체를 객관적으로 판단했던 것 같다. 한 달 동안은 ‘잽잽원투’만 시켰으니까. 천재 복서에게 잽만 시키는 관장이 원망스러웠지만, 착실히 실력을 쌓아 언젠가는 저 사각 링 위에서 천재적인 감각을 뽐내보리라 다짐하며 오욕의 나날을 견뎠다. 그때도 사실 마음만은 〈더 파이팅〉의 전일보였다. 현실의 주먹은 14온스(16온스였나?) 글러브를 끼고 허공을 향해 잽잽원투나 날리고 있을지언정 뇌내 망상 속에선 이미 뎀프시 롤이 한창 플레이 중이었으니까. 가끔 관장이 다른 곳을 보고 있을 때면 살짝 스트레이트를 날리며 주먹을 비틀었다. 들어는 봤는가? ‘코크 스크류 블로’라고?
그러던 어느 날 스파링은 예고도 없이 도적처럼 나를 덮쳤다. 잽잽원투에서, 잽잽 원투 더킹 더킹 훅훅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뤄가던 어느 날, 관장이 무심하게 “세회 씨, 스파링하게 올라오세요”라고 말했다. 갑자기 심장이 어찌나 빨리 뛰던지. 내 천재성을 보여주기 위해 기다린 그 오욕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대는 이미 링 위에 올라 있었다. 상대 역시 점심시간을 불태우는 체육관 인근의 회사원으로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고, 복싱 경력은 1년 정도라고 했다. 키가 꽤 크고 리치도 나보다 반 뼘쯤 길어 보였지만, 문제없었다. 나에겐 러시안 훅과 가젤 펀치가 있으니. 일단 아마추어 스파링에서 하트 브레이크 샷은 봉인해두는 것으로.
우리는 가끔 주제를 모르고 깝치다 얻어맞는다. 얼마 전 알렉산더 볼카노프스키와 경기를 치른 UFC 정찬성 선수는 ‘정찬성 Korean Zombie’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이 채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시리즈 중 하나는 〈좀비트립 : 파이터를 찾아서〉다. 정찬성이 제자 박문호 선수를 데리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동네에서 싸움 좀 한다며 뻐기고 다닌 ‘내로라 가이’를 찾아 스파링 대결을 해보는 프로그램이다. 말이 스파링이지 사실상 실전 예절교육이나 다름없다. 5000명과 싸워 다 이겼다는 광주 아저씨도 문호 씨의 펀치에 턱을 맞고 나뒹굴었고, 싸움을 즐긴다는 태권도 유단자는 기절한 채 녹다운됐다. 만나뵌 적도 없는 분들께 죄송하지만, 그 프로그램의 주제가 ‘깝치고 얻어맞기’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어떻게 저렇게 못 때려?” 그렇다. 어떻게 저렇게 못 때릴까? 나는 사람이 그렇게 못 때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올라가본 링 위에서 절절하게 알아버렸다. 시합용 글러브를 끼고 가드를 올리면 대략 시디 두 장보다 큰 메주 덩어리로 얼굴을 가리는 것과 비슷하다. 얼굴이 완전히 가려져 때릴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때려보려 주먹을 날리긴 하는데, 내가 날리는 모든 주먹이 결국 상대에겐 기회다. 날리는 주먹을 더킹으로 흘리며 들어와 훅이나 바디를 내 몸뚱이와 얼굴에 꽂는다. 링 위에 오르기 전에는 인파이팅을 해야 하나 아웃파이팅을 해야 하나 한창 고민했지만, 링 위에선 그저 안팎으로 2라운드 동안 골고루 맞기만 했다. 리치가 길고 키가 큰 상대라 잽을 던지고 왼쪽으로 몸을 숙이며 라이트로 러시안 훅을 날려보려 하다가 가드가 열리는 바람에 오른쪽 턱에 어퍼컷을 맞았던 기억이 아직도 밤에 가끔 떠올라 깊은 우울에 빠지곤 한다. 그날 이후 나는 스파링을 그만두고 줄넘기와 잽잽 원투 더킹 더킹 훅훅에만 더욱 매진했다.
실수를 통해 잘못을 깨닫고 인생의 자세를 수정해나가는 바람직한 일은 내 인생에선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테니스를 친 옛 회사의 입사 동기에게 “테니스? 그거 그냥 베드민턴처럼 라켓으로 공 치면 되는 거 아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친구는 가소롭다는 듯 “내 서브 한 번이라도 제대로 리턴하면 라켓을 사주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뭔가를 처음 할 때는 절대 깝치지 말 것.’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교훈을 스파링 경험을 통해 배웠을 법도 한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와 대화를 나눈 그 주 주말, 나는 형광색 티셔츠, 해변에서 입던 반바지에 러닝화를 신고 친구네 대학 테니스 코트에 섰다. 그날 테니스 25년 차의 서브를 어떻게든 받아보려는 나의 몸짓은 아마 거미의 웹에 걸린 형광 나방의 몸부림만큼 처절했을 것이다. 그 후로 본격적으로 테니스를 배우는 동안에도 ‘처음 하는데 깝치다 손해를 보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서브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페더러의 유려한 폼을 머릿속에 그리며 점프 서브로 풀스윙을 했다가 회전근개를 다쳐 180만원짜리 도수치료를 받았고, 슬라이스를 배운 적도 없으면서 따라 하다가 옆 코트 아저씨를 맞추기도 했다.
깝치지 말아야 할 곳이 링이나 코트뿐인 건 물론 아니다. 기자로 있다가 홍보팀으로 이직한 친구가 있다. 홍보팀이라고는 하지만, 전통적인 기자 핸들링 업무가 아니라 자사 제품을 알리는 콘텐츠를 제작하거나 외주 주는 부서라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신나 했다. 입사할 당시에는 얼마나 큰 열정에 불타고 있었는지, 곧 해당 기업에서 훌륭한 바이럴 CF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입사 후 약 2개월밖에 지나지 않아 만난 친구는 풀이 죽어 있었다. 친구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말했다. “아티스트 A 알지? 걔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10만이 넘잖아? 그런데 그거 다 가짜란 말이야. 회의 때 A 얘기가 나왔길래, 내가 그랬거든, ‘그 팔로워 다 돈 주고 산 거예요. 걔 다 자가 발전이에요’라고. 그런데 반년 전에 우리 회사랑 단발성 모델 계약을 했더라고. 그것도 우리 부장이 밀어서.” 아마 여기까지만 들으면 내 친구가 옳은 얘기를 한 것이니, 큰 잘못이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그건 큰 잘못이었다. 친구는 말했다. “다들 알더라고. 돈 주고 산 팔로워인 것도, 가짜 인기인 것도. 그 얘기를 듣고 난 처음에는 화를 냈지. 왜 가짜 인기에 돈을 주냐고. 동료 차장이 참다 못해 한 마디 하더라고. ‘우리도 현빈 원빈 모시고 싶죠. 왜 아니겠어요. 그런데 한정적인 예산으로 셀럽 섭외해서 임원 결제까지 받아내려면 가짜 숫자라도 필요하지 않겠어요?  진짜 인기 셀럽을 이 돈에 섭외할 수 있을까요?’라고.”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난 우리가 ‘깝친다’라고 말하는 행동의 근본이 되는 마음이 뭔지를 깨달았다. 친구는 왜 깝쳤을까? A의 팔로워가 가짜라는 사실을 회의 석상에 앉은 사람 중에 자신만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는 아니었을까? 그 많은 홍보맨들이 자기보다 모른다고 얕잡아본 때문이 아닐까? 나는 링 위에서 왜 깝쳤을까? 어려서 체력장 특급 몇 번 받은 자신감 때문에 웬만한 사람보다 내가 운동을 잘한다는 근자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이 마흔에도 점심시간을 쪼개 복싱 체육관을 다닐 정도의 열정을 가진 상대방 아저씨라면, 중고등학생 때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운동을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거란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코트 위에선 왜 깝쳤을까? 25년 차 친구가 다른 운동은 나보다 조금 못하니까, 그 따위 구력은 재능으로 바를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니었을까? 깝침의 본질은 어쩌면 나를 올리고 남을 내리는 내로남불의 마음이 아닐까? 문득 꽤 오래전 전직 군청 공무원과의 술자리에서 들은 말이 생각났다. “군수들은 선거 이기고 나면 자기가 다 바꿀 수 있을 줄 알아요. 근데 막상 수십 년 된 베테랑 공무원들이랑 일을 시작해보면 그제야 아는 거죠. 아 못 바꾸는 덴 이유가 있구나. 그때부터 시작인 거예요.” 이 말은 물론 링이나 코트나 회사나 군청에서만 유효한 말은 아닐 것이다.
 
박세회는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피처 디렉터이자 소설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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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DITOR 오성윤
    WRITER 박세회
    ILLUSTRATOR VERANDA STUDIO
    ART DESIGNER 주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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