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엘의 순간

찰나의 순간이 모여 이엘이 되었다.

원피스, 재킷, 뷔스티에 모두 제이백쿠튀르. 체어 마르셀 브로이어 by 컬렉트.

촬영 때 앉은 의자가 마르셀 브로이어의 1970년대 빈티지 체어예요. 이 의자를 화보에 너무 쓰고 싶어서 여러 숍에 대여 문의를 했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되죠. 가구는 빌리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빌려줬어요?

정말 우연히 들른 숍에서 발견했어요. 안 되겠지 체념하며 물어나 본 건데 흔쾌히 빌려주더라고요. 이엘 씨 단골 빈티지 숍 주인과 친구라면서.

제가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이런 우연이라니.(웃음) 사실 의자를 보자마자 속으로 되게 좋아했거든요. ‘앉아도 되나? 이 의자가 어떻게 여기 있지?’ 하면서 봤어요. 들어보고 살펴도 보고 싶었는데 차마 그러지는 못했어요.(웃음)

좋아할 거라 확신했어요. 워낙 가구에 조예가 깊잖아요.

조예까진 아니고, 좋아해요. 얼마 전에는 광교에 있는 가구 숍을 둘러보고 왔어요.

뭐 좀 샀나요?

너무 고가라서 수집은 못 하고 사진만 찾아봐요. 그래도 언젠가 알바 알토의 파이미오 체어를 집에 들여놓는 날이 있을 거예요. 위시 리스트 1번이에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 제작할 때 목적이 결핵 환자를 위한 요양원을 지으면서 그곳 휴식 공간에 놓을 라운지 체어였어요. 그런 의미도 좋고, 의자에서 느껴지는 간결한 맛이 있잖아요. 직선이었다가 곡선으로 넘어가는 플라이우드의 느낌도 너무 우아하고요.

민소매 톱, 바지 모두 마이클 코어스. 귀걸이 다미아니.

오늘 그 의자 이름이 체스카인데, 마르셀 브로이어의 딸 이름이래요. 이엘 씨 아버지가 화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르셀이 그런 것처럼 이엘의 이름을 붙인 그림이 있을까 궁금했어요.

아빠는, 저희 아버지는 우울하고 쓸쓸한 풍경을 많이 그리셔서 그런 건 없어요.

오랫동안 아버지처럼 화가를 꿈꿨다고요.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많이 방황했죠.

그래서 연기로 방향을 틀었고, 차근차근 여기까지 왔죠. 대중은 이엘이란 배우를 <내부자들> 속 주은혜의 강렬한 외모와 겹쳐 떠올리지만 알고 보면 강단 있는 내면이 비슷할 것 같았어요.

고집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한번 맞다고 생각한 것은 주변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닌 거예요. 그게 연기를 해온 힘인지도 몰라요.

놀랍게도 벌써 10년 차 배우예요.

네, 벌써.(웃음)

필모그래피를 보면 2009년 영화 <시크릿>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일했어요.

솔직히 체력적으로도 아이디어적으로도 많이 고갈된 게 느껴지더라고요. 특히 <도깨비> 때부터 안 쉬고 달렸어요. 영화 <바람 바람 바람> 촬영하면서 드라마 <블랙>에 이어 <화유기>까지 쭉 오다 보니까 조금 지치는 것 같았는데, 그러던 와중에 <아마데우스>라는 연극을 만난 거예요. 같이 무대에 오르는 (조)정석 오빠가 어느 인터뷰에서 ‘드라마 <투깝스> 끝나고 연극 연습실 가자마자 너무 좋았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라 정말 좋았다’는 말을 했는데, 저 그게 무슨 마음인지 너무 잘 알아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나요?

연습실에 모여서 다 같이 대본 고민하고 함께 장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나 봐요, 저한테. 카메라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웠어요. 연출 선생님도 네가 해보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열어주셔서 진짜 재미있게 연습했거든요. <화유기> 촬영 기간과 연극 연습 기간이 겹쳤는데, 드라마 촬영하러 가면서도 오히려 연극 생각이 많이 났어요. ‘이 장면은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여기서는 어떻게 해볼까?’ 아이디어가 너무 많이 떠오르는데, 꼭 휴양지로 여행 가야 쉬는 게 아니라 이렇게도 리프레시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어요.

트렌치코트 에이벨. 슈즈 스튜어트 와이츠먼. 벨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콘스탄체 베버 역은 굉장히 발랄하고 쾌활하고 사랑 앞에 천진난만하잖아요.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럽죠. 여자가 봐도 귀여워서 웃음이 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렇게 꽃처럼 밝은 명랑한 아가씨인데, 솔직히 저는 그런 성격은 아니에요. 성격적으로 조금 다운되어 있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1막에서 콘스탄체는 10대예요. 그런데 내 나이가 몇 살?(웃음) 어떻게 해야 하나 찾아가고 있어요. 오히려 슬퍼했다 분노했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2막은 걱정 안 해요. 연출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2막은 네가 제일 좋다고. 대신 1막 어떡하느냐고 맨날 걱정하시는데, 해야죠. 어쩌겠어요.

천재적인 모차르트와 그에게 엄청나게 질투를 느끼는 평범한 살리에리 중 누구에게 더 감정이입이 되나요?

그들의 음악이 제게는 연기일 텐데, 모차르트의 음악만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면은 닮은 것 같고요, 재능적인 면에서는 살리에리요. 순간순간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고 호흡이 다른 사람이 분명 있어요. 그러면 혼자 속으로 샘을 내죠. ‘쟤는 대체 어떻게 저런 걸 하는 거지?’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게 나오지?’ 욕심이랄까, 샘이 나서 여러 작품을 많이 찾아보는 편이에요. 좋았던 작품, 장면은 계속 돌려 보고 그래요.

‘저런 것’이라면 애드리브처럼 계산되지 않은 연기를 말하는 걸까요?

아니요. 애드리브보다는 배우가 진짜 자기가 그 캐릭터라고 생각해야만 나올 수 있는 사소한 제스처나 어미 처리 같은 게 있어요. 독백을 엄청 멋있게 한다든지 눈에 띄게 연기한다는 게 아니라, 정말 사소한 데서 다른 부분이 있어요. 제가 요즘 <아마데우스>에서 정석 오빠를 보면서 느껴요. 저 사람은 진짜 연기 천재다 싶은 게, 무대 위에 있으면서도 아이디어가 번뜩번뜩 떠오르나 봐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관객으로서도 짜릿해요. 살리에리처럼 좌절하고 하느님을 욕하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나도 저렇게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걸 보고, 많이 해봐야지 싶어요.

저는 살리에리를 보면 안타까워요. 그도 너무나 훌륭한데 온통 모차르트에 신경 쓰는 모습이 슬퍼요. 끝없이 노력하는 끈기도 재능인데.

살리에리 대사 중에 천재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만 주시면 어떡하냐고 신에게 원망하는 내용이 있어요. 그거 진짜, 진짜 슬픈 거거든요. 남들이 볼 때는 똑같이 잘나 보일 수 있어요. 그런데 속은 모르는 거잖아요. 모차르트는 그냥 코 풀 듯이 곡을 휙 써버리는 것을 살리에리는 몇 날 며칠을 쓰고 고치고 계속 고민하잖아요.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은 정말…. 살리에리처럼 절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피스 부리. 귀걸이 르비에르. 체어 마르셀 브로이어 by 컬렉트.

이엘이라는 배우는 강렬한 캐릭터로 늘 존재감을 증명해왔어요. 동시에 트랜스젠더, 화류계 여성 등 센 캐릭터만 맡아서 아쉽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죠.

맞아요. 하지만 저는 다양하게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게 더 좋았어요. 제 배우의 길은 극기 훈련이었던 것 같아요. 게임 스테이지는 점점 어려워지잖아요. 그런데 저는 전 단계가 없이 바로 끝판, 깨고 나면 또 끝판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히려 빨리 단단해지고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을 알리는 데도 효과적이었을 테고요.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센 캐릭터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이번 영화 <바람 바람 바람>에서 맡은 제니 역이 도전이에요. 화장도 옷도 밋밋하고 평범하거든요. 누구를 유혹하려고 일부러 관능적으로 연기하는 것도 없어요. 그냥 편안하게 평소에 제가 말하듯이 연기해서, 과연 제니가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제겐 도전이에요.

궁금해요. 영화 소개에서는 ‘바람의 여신’이라고 하던데 평범하다니.

주변에서 상황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요. 유혹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니긴 하는데 물론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죠.(웃음) 그런데 이성적인 유혹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호기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꼭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매력 있는 캐릭터로 느껴지는데, 2년 전 어느 인터뷰에서 언젠가는 여성성까지도 다 벗어버리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한 바람이 이뤄진 걸까요?

그렇죠. 여성성이라는 게 작품에서 다뤄질 때 보면 S자 몸매, 섹시한 말투, 하이힐로 대변될 때가 있잖아요. 그런 모습을 버리고 다른 면모를 보여드리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했던 말이었는데 제니가 그 시작점인 것 같아요. 한 번에 변화하기에는 그 폭이 커서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제니를 만나면서 연습은 한 거죠.

제주 로케이션 촬영 때 촬영 분량이 거의 없는데도 자주 촬영장에 갔다고 들었어요.

제주도라는 지역에 다 같이 모여 있으니까 가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선배님들이 이병헌 감독님과 첫 촬영을 해보고는 다들 어렵다고 하는 거예요. ‘큰일 났다. 나 연기도 제일 못하고 제일 막내인데 버벅거리면 어떡하지’ 걱정되더라고요. 감독님 관찰할 시간도 필요했고요. 그래서 현장에 더 나갔어요. 스태프들과 친해지고 얼굴 보이고 이야기라도 해야 제 촬영 때 덜 긴장하고 조금 마음 편히 할 수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편인가요?

제가 관심 가는 사람에게는 다가가는 편이에요. 친하게 지내는 동생 중에 그림 그리고 책도 쓰는 친구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냥 이 친구의 책이 마음에 들었어요. 여행기이지만 조금 쓸쓸하고 어떻게 보면 우울할 수도 있는 스토리인데 되게 덤덤하게 잘 풀어낸 책이 있길래 작가의 SNS 계정을 찾았죠. 알고 보니 저처럼 고양이랑 같이 살고, 사는 지역도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SNS를 통해 이야기 몇 마디 나누다 어느 날 제가 만나자고 했어요. ‘작가님 우리 밥 먹어요’ 그랬어요. 지금 제일 친한 친구가 됐어요.

아무 인연도 없는데 연락한 거예요?

책이 너무 좋아서 이 친구가 궁금했어요. 저보다 나이도 어린데 멋있는 거예요. 생각도, 작업물로 세상에 내놓는 것도. 그래서 궁금했어요, 이 사람이.

이름 물어봐도 돼요?

봉현 작가라고, <나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여백이>란 책을 냈고 곧 새로운 책도 나올 예정이에요.

이성민 배우가 괜히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게 아니네요.

그건 너무 좋게 표현해주신 거고, 그냥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좋은 데 구경 가고, 사람들과 노는 거 좋아하는 거예요.(웃음) 제주도에서 시간 남는데 뭐 하겠어요. 거기다 저는 아예 한 달 동안 제주도로 이사를 갔단 말이에요. 고양이 두 마리와 한 달 치 갈아입을 옷 챙겨서. 친언니도 마침 일을 쉬고 있던 때라, 우리 이때 아니면 언제 제주도에 살아보겠느냐며 작은 집 하나 빌려서 한 달간 살았어요.

한 달 동안요? 뭐 했어요?

놀러 다녔어요.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고, 바다 구경하고, 장 서면 세화에 장 보러 갔다가 날씨 좋으면 오름에도 올랐다가, 바다가 잔잔하면 배 타고 비양도 들어갔다가…. 그러고 놀았어요, 한 달을. 촬영은 일주일에 한 두 번 했나?

어떻게 이사 갈 생각을?

왔다 갔다 하는 건 안 되겠더라고요. 고양이들도 있고, 촬영 현장에 빨리 가서 지내야 작품이 더 잘 나올 것 같은 생각도 들어서 일단 싸 들고 갔죠.

첫 주연작이라 부담감도 있었나 봐요.

아니, 오히려 신났어요. ‘드디어 나에게 이런 기회가 오는구나’ 하며 신나하다가 깨달았죠. ‘아, 주연이란 힘든 거구나.’ 찍어도 찍어도 찍을 게 계속 나오고 할 게 너무 많았죠. 거기에 제니라는 캐릭터가 어려워서 더 그랬어요. 첫 주연 신고식 호되게 치렀죠.

5년 전쯤 개인 블로그 한 적 있죠?

블로그! 아, 오글거려.(웃음)

흑역사를 들춰봐서 죄송합니다.

예. 부끄러워요.(웃음) 새벽 감성. 중2병.

그래도 그 글들 보면서 이엘 씨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자신의 감정을 글로 적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즘도 글 쓰나요?

그때 쓴 글을 다시 보면, 다는 아니지만 한두 개 정도는 제 마음에 드는 게 있어요. 그런데 주변에 글 쓰는 친구들도 있고 하니까 섣불리 어디에 쓰지는 못하겠고, 지금은 블로그는 안 해도 노트에 혼자 끼적끼적하고는 있는데 모르겠어요. 언젠가 이 노트들을 불살라버리는 날이 올 수도 있고.(웃음)

마음에 남는 글 중에 이 문장도 포함되나요?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다. 어디서든. 유익한 사람이고 싶다. 무엇을 하든.”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었다.)

그 블로그 이름이 ‘무명 여배우’였잖아요. 감회가 새롭겠어요.

그러네요. 제 블로그 이름이 그거였네요.

몰랐어요?

그걸 깜빡하고 있었는데…. 사실 ‘무명 여배우’라는 타이틀은 경리단길에 그런 이름의 와인 바가 있어서 따라 한 거예요.(웃음) ‘무명 여배우’라는 다섯 음절을 발음할 때의 소리가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도 저는 반반이잖아요. 누군가에게는 유명 배우일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무명 배우일 테니 감회랄 것까진 없어요. 알아봐주시면 감사하고 신기한데, 메이크업도 안 했는데 인사해주시면 친구들에게 항상 그래요.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알아보시는 거지? 목소리?”

SNS 때문일지도요. 연예인 인스타그램에서 일반 친구들이 드러나는 경우는 많이 못 본 것 같은데 이엘 씨 SNS를 보면 친구 아들이 몇 명인지까지 알 수 있을 만큼 배우 이엘이 아니라 사람 이엘의 일상이 전해져요.

인스타그램을 시작한 것 자체가 그런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근래 1~2년 사이에 몇만 명의 팔로워가 생기고 고양이 영상 하나 올렸을 뿐인데 만 명 가까이 봐주셔서 저 역시 놀라워요. 이렇게 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냥 저는 옛날 그대로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앞으로도 가리고 숨겨야 할 필요성은 못 느껴요. 절 보시려고 팔로하는 거니까요.

민소매 톱 키옥.

지금부터 하는 일상에 관한 질문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 보이는 거예요.

이미 블로그로 후벼 파셨는데요, 뭐.(웃음)

한옥에 살아요. 로망이 있었나요?

일반적인 집 구조에 못 견뎌 하는 성격이라서. 아시잖아요, 아파트 들어가면 다 똑같이 생겼고, 아무리 인테리어를 해도 구조 때문에 똑같아 보이고. 그런 면을 최대한 배제한 집을 찾아다니다가 발견한 거죠.

인상적이었던 건, 누구나 좋은 집, 비싼 집에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베르판 조명 아래 자개장으로 만든 테이블이 있는 이엘 씨의 주방 풍경은 조금 달랐어요.

TV장으로 쓰는 것도 낡은 자개 문갑이에요.

자개 테이블과 문갑은 대체 어디서 난 거예요?

주웠어요.(웃음) 동네에서 주웠어요. 자개 테이블은 버려진 문짝으로 만든 거예요. 이케아에서 테이블 다리를 두 개 사다가 문짝에 조립했어요.

직접요?

네. 저 조립하는 거 되게 좋아해요. 이케아 가구 조립만큼 재밌는 게 어딨어요. 다리를 고정시키지는 않았어요. 오브제처럼 벽에 세워둘 수도 있게 다리는 탈착식이에요. 아예 안 쓸 때는 광에 넣어놔요.

‘광’이란 말은 이제 우리 할머니도 안 쓰는데.

아휴.(웃음) 한옥답게 조그마한 광이 있어요.

요즘은 무슨 책 읽어요? 침대 옆에 책이 많이 쌓여 있던데.

아직 끝을 못 내긴 했는데…. 책을 맨날 들고 다니지 못해서 핸드폰에 담아놓은 책이 있어요. <우아한 관찰주의자>라고 모두 똑같은 상황에서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시야를 넓혀 더 많이 보자는 내용이에요. 어떤 사람이 욕조에서 편지를 쓰다 누워 있는 그림 한 점을 모두와 함께 보더라도 잉크 색깔, 펜의 깃털 촉감, 이 사람이 잠든 건지 죽은 건지, 상황과 주변을 더 살펴보자는 거예요. 그런 관찰력은 내가 주부건 의사건 개와 산책 중이건, 일상의 어떤 순간에도 너무나 필요한 능력이란 것을 설명해줘요. 거의 논문 같은 책인데 재밌어요. 추천해드릴 만해요.

더 잘하고 싶어서 잘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고 아까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 같네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길 다니면서도 되게 산만해요. 직진하면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 관심 가는 게 너무 많아요. 저 멀리 지나가는 강아지도 봐야 하고요, 이 자리 가게가 바뀐 것 같으면 들여다봐야 하고, 그 순간 그날 지나가는 구름이 특이하면 옆 사람에게도 보여줘야 하고, 아무튼 산만해요. 사람 관찰하는 일도 요즘 들어 더 좋아지고, 사람들 습관을 캐치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제 성향이랑 잘 맞는 책이라서 더 재밌게 읽고 있나 봐요.

배우고 싶은 점을 캐치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건 자신의 능력일 거예요.

능력이 됐으면 좋겠어요. 정말 작은 건데, 제가 영화에서 캐치한 것 하나를 <내부자들>에서 써먹었는데 그게 잘 먹혔거든요.(웃음)

뭐예요?

이게 말하자면 웃긴데,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서 장쯔이가 처음으로 게이샤 수업을 들으러 거리로 나가요. 스승이 지금 저기서 다가오는 남자를 순간의 눈짓으로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한다고, 눈빛으로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니까 장쯔이가 남자 옆을 지나갈 때 눈을 아래에서 위로 ‘요렇게’ 떠요. 그 눈을 본 사람은 가다가 막 쓰러져요. 그걸 <내부자들>에서 한번 써먹어보고 싶은 거예요. 차에서 안상구랑 얘기할 때 안상구가 “라이방이나 벗어봐. 간만에 눈이나 보자”라고 하면 제가 선글라스를 벗고 다가가잖아요. 원래 콘티는 그때 안상구가 다음 대사를 하고 안상구의 얼굴에서 장면이 끝나요. 그런데 제가 순간 <게이샤의 추억> 생각이 나면서 ‘알았어. 나야, 나 몰라?’라는 의도로 눈을 아래위로 ‘요렇게’ 떠요. 그랬더니 우민호 감독님이 그 컷으로, 제 얼굴로 신을 마무리해주신 거예요.

너무나 기억나요.

그때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배우는 찰나를 순간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그 찰나를 네가 네 순간으로 만들어서 이 신이 네 컷으로 끝났다. 잘했다.” 그 말을 품고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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