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윤은 끝에 서 있다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송하윤은 비로소 살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송하윤 - 에스콰이어

시스루 톱, 롱 원피스 모두 제이 쿠. 롱 네크리스 빈티지 할리우드. 귀걸이 케이트 앤 켈리. 링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최근에 여행을 다녀왔다고 들었어요.

네.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비우거나 채워야 할 때 가요.

이번 여행은 비우기 위해서였나요, 채우기 위해서였나요?

채우는 여행이었어요. 원래 작품을 마치면 항상 비우기 위해 떠났는데 이번에는 채우기 위해 떠났어요.

왜 이번에는 채워야 했을까요?

글쎄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는 건 그의 인생을 사는 셈이니까 작품이 끝나면 그동안 소모했던 감정들을 비워내야 했는데 <쌈, 마이웨이>의 ‘백설희’는 느낌이 달랐어요. 이 작품을 통해 채워진 느낌들 덕분에 앞으로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어요. 덕분에 사람들에게도 마음이 더 열린 것 같고요. 그래서 이런 마음을 비우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이전까진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작품이 끝나면 힘들었어요. 종영 한 달 전부터 우울증이 올 정도였죠.

우울증이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거 같아요. 함께 작품을 했던 이들과 작품이 끝난 후에 따로 만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작품을 찍고 있는 이 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현재의 마음을 꽉 잡고 작품에 임하려 했던 거 같아요. 특히 감정선이 많고 기복도 큰 캐릭터를 끝내고 나면 많이 허무했던 거 같아요. ‘나는 누구지?’라는 데서 오는 외로움. 그런데 이번에는 그냥 나와 분리되지 않은, 진짜 내 시간을 지나온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버리거나 비울 마음이 없었던 거 같아요. 그냥 이런 연애를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송하윤 - 에스콰이어

셔츠 원피스 디누에. 귀걸이 앤 아더 스토리즈.

왜 그랬을까요?

뭔가 새로웠어요. 새것 같은 느낌. 그래서 <쌈, 마이웨이>에서의 감정들은 제게 백지 상태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졌어요.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사랑에 관한 연기를 한 적은 없었거든요. 어쩌면 그래서일 수도 있지 않았나 싶어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저는 종교가 없는데, <쌈, 마이웨이>에 출연하고 싶어서 모든 신에게 기도했어요.(웃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생각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 있잖아요. 처음 대본을 볼 때 그런 느낌이었어요. 글에 담긴 모든 삶이 사랑스러웠어요. 그래서 작가님이 너무 궁금해서 빨리 만나고 싶어졌는데 만나니까 더 좋은 거예요. 그래서 설희로 살고 싶다고 미친 듯이 기도했어요. 이렇게 간절한 적이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오디션에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죠.

그럼 출연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실감이 나지 않아서 3일 정도 멍하게 있었어요. 회사에 전화해서 작가님을 찾아가겠다고 조르고, 계속 기도하고. 그런데 기적처럼 다시 연락을 받았어요. 설희를 했으면 좋겠다고. 알고 보니 떨어진 게 아닌데 중간에서 얘기가 잘못 전달됐다고 하더라고요.

엄청난 희비가 교차하는 3일이었군요. 그 와중에 어떤 신에게 기도를 했을지 궁금합니다.(웃음)

하나님, 부처님 가리지 않았어요. 나무랑 눈 마주치면 나무한테 기도하고, 달 보면 달한테 기도하고, 아침이면 해 보고 기도하고. ‘내가 오디션에 떨어졌대. 나 좀 다시 붙여줘’ 이런 식으로.(웃음)

앞으로 토테미즘을 믿으면 되겠군요.(웃음) 어쨌든 다행히도 간절히 원하던 작품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리딩을 못 했어요.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돼서. 그런데 작가님은 대본을 읽지도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앉아 있는 모습이 설희 같다고 하셨어요. 그 뒤로 긴장이 풀려서 리딩을 마치고, 제가 가진 생각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마음을 말하고 나니 “그냥 설희구나” 하시더라고요. 좀 신기했어요.

송하윤 - 에스콰이어

재킷 디누에. 톱, 스커트모두 앤 아더 스토리즈.

<쌈, 마이웨이>는 동시대 청춘들의 척박한 현실에 밀착한 드라마로 호평을 얻기도 했습니다. 백설희 역시 가난한 집안 형편에 홈쇼핑 계약직 전화 상담원으로 만만찮은 삶을 살죠.

그런데 저는 설희의 삶이 힘들 거라 보지 않았어요. 물론 설희가 힘든 순간을 지나고 있다는 건 이해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조차도 설희에겐 현실의 일부분인 거니까요. 다만 드라마가 그런 부분을 대하는 현실적인 치사함을 잘 끌어낸 거 같아요.

치사하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힘들면 부딪치기보다 외면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인데 힘들면 그냥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시면서 넋두리하면서 풀죠. 어쩌면 힘들다는 감정은 피하는 방식으로 견디는 거예요. 그런데 <쌈, 마이웨이>는 그런 상황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잘 표현한 거 같아요. 사실 제목의 ‘쌈’은 싸움이에요. 그러니까 싸우면서 마이 웨이, 내 길을 간다는 거죠. 힘든 시간과 맞닥뜨리며 치열하게 싸우는 인물들의 일상이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걸 전부라 말하지 않는 거죠. 그게 이 작품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이유였던 거 같아요.

계약직인 백설희처럼 배우 역시 계약직이라 할 수 있으니 그런 부분에서 모종의 공감대가 생기진 않았을까요?

회사에 다니는 친구의 삶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직책이 있잖아요. 배우는 직책이 없거든요. 무명 신인에서 유명한 배우가 됐다 해도 언제 다시 잊힐지 모를 일이니까. 항상 떨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제 나름대로 나만의 직책을 만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 직책과 맞지 않은 거 같아서 거절한 작품도 있었어요. ‘내가 아직 팀장인데 사장을 할 순 없지’(웃음) 이런 식으로. 후회하진 않아요. 정말 못할 거 같아서 거절했으니까. 데뷔 초엔 자청해서 보조 출연을 나간 적도 있었어요. 현장이 궁금해서 나갔는데 역시 학원에서 배우는 거랑은 다르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그 현장의 보조 출연자분들의 마음을 일일이 알 순 없겠지만 저처럼 큰 꿈이 있는 사람도 많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차근차근 과정을 밟아나가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지금 내가 시간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예전에 118세 정도 된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한 리포터가 장수의 비결 같은 걸 묻는 인터뷰를 진행했다는데 인터뷰 말미에 118년 동안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걸 물어봤더니 할아버지가 그러셨대요. 100세 때 학교 안 간 거라고. 100세 때는 101세에 죽을 줄 알았고, 101세에는 102세에 죽을 줄 알았는데 118년이나 살아버렸다고, 그럴 줄 알았으면 학교에 갈걸 그랬다는 거죠. 그러고는 최선을 다해 당신의 시간을 살라고 했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뇌가 깨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 갇히면 안 되겠구나.’ 그래서 아무리 힘든 연기를 해도 행복해지려 노력하기로 했어요. 제 인생의 최종 목표도 행복이고, 그래야 저를 보는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 같아서요.

사실 백설희가 사랑한 김주만은 3자 입장에서 봤을 때 답답한 남자처럼 보여요. 현실적 한계를 운운하며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외도가 의심되는 상황을 자초하며 신뢰까지 무너뜨리죠. 송하윤 씨 입장에선 그런 남자를 받아들이는 백설희가 이해가 되던가요?

네. 왜냐하면 그냥 사랑이니까요. 설희가 주만이를 받아들인 건 주만이의 허물보다 본인의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그런 허물이 눌러지는 거죠. 사랑에는 정답도 없고요. 설희는 그 순간의 자기 감정에 충실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백설희가 김주만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너한테 후회도 없어. 난 너한테 홧김에 헤어지자고 말한 적도 없어. 후회는 네 거야”라고 말할 때 백설희는 정말 자신의 사랑에 충실했다는 게 느껴집니다.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건강한 사람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설희는 정말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내 사랑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랑에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거죠. 주변에서 “답답하지 않아요?”라고 물어도 그런 감정이 흔들릴 수가 없는 거죠.

송하윤 - 에스콰이어

시스루 톱, 롱 원피스모두 제이 쿠. 링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송하윤이 아니라 백설희를 만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혹시 실제 송하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나요?

생각해본 적 없어요. 그냥 저는 설희였거든요.(웃음) 정말 단 한 신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없었어요. 슬프건, 아프건, 기쁘건, 그냥 얘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두근거리고 행복했어요. 그래서 설희를 연기했다기보다 내 삶의 한 부분을 지나온 느낌이에요. 그래서 설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그냥 내 인생을 답하는 기분도 들고요.

이 정도로 마음에 남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면 다음 캐릭터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되지 않을까요?

전혀 없어요. 오히려 막연하지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힘이 생긴 거 같아요. 설희의 삶을 품게 된 이후로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는 걱정되지 않는 거 같아요. 그냥 다음 작품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거 같단 마음이에요.

<쌈, 마이웨이>로 주목받은 덕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난 출연작들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2006년에 방영한 MBC 베스트극장 <태릉선수촌>도 그렇고요.

제가 막 스무 살로 넘어갈 때 찍은 데뷔작이에요. 그때의 제가 너무 부러워요. 저도 오랜만에 우연히 다시 보게 됐는데 ‘어떻게 저런 연기를 할 수 있지?’ 싶더라고요. 연기는 어색한데 그 작품에선 그냥 그 애로 살고 있더라고요. 첫 작품이라 그랬는지 백지 상태로 캐릭터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 날것 같은 느낌이 너무 부러웠어요.

한때 소속사와 분쟁을 겪기도 하고, 한동안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한 시기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사실 이런 얘기를 어느 정도 가릴 법도 한데 인터뷰에서 거리낌 없이 털어놓은 것 같더군요.

서른 살이 되니까 나를 힘들 게 하는 건 주위의 자극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욕심이나 조바심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배우라는 특별한 직업에서 오는 외로움이 큰 거라 생각해왔는데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니까 그냥 20대라면 누구나 겪는 성장통 같은 단순한 이유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특별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니까 제가 하던 고민들도 특별하지 않아졌어요. 그렇게 되니까 그런 이야기들도 별거 아니더라고요.(웃음)

2년 동안 작품 섭외가 안 들어와 고민이 컸던 시절도 있었다던데, 배우를 그만둘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지금도 해요. <쌈, 마이웨이> 하면서도 ‘다음 작품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이 끝나면 항상 고속도로를 가다 긴 터널에 들어가는 느낌이에요.(웃음)

벼랑 위에 서 있는 사람 같겠네요.

저는 항상 낭떠러지 위에 있다고 생각해요.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 그래서 저는 끝자락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 손잡고 함께 가고 싶어요. 그리고 배우로 살아간다는 건 살면서 느끼는 모든 감정을 소중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길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런 감정들을 결국 연기로 풀 수 있으니까요.

이제야 배우라는 인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배우로서 좋은 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꿈은 갖게 됐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즐거워요. 배우라는 직업이. 아픔도, 기쁨도 모두 다 쓸 수 있는 일이니까. 사실 예전엔 연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배우란 직업에 애착이 생긴 거 같아요. 빨리 다음 작품도 만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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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어시스턴트 김 신영
사진 KIM S.GON
헤어 김 선희
메이크업 박 이화
스타일링 서 래지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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