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이라는 운명-2

손예진은 배우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여배우로서 나아갈 길을 생각한다. 손예진은 믿고 있다. 손예진이라는 스스로의 운명을.

트렌치코트 버버리.

코트 로에베. 반지 지넷 뉴욕.

작년에 <협상>이라는 범죄 영화 촬영도 마쳤는데, 경찰 내의 협상가 역할을 맡았다고 들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다. 감독님이 외국의 협상가들을 만나서 소재를 얻은 터라 국내 정서와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한국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두 명 정도 있다고 들었다. 내가 연기한 하채윤이라는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강인해 보여서 매력적이었다.

어쩌면 지금이라 소화가 가능한 역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찍으면서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1분 1초를 다투면서 협상해 인질들을 살려야 되니까. 더 힘든 건 상대역과 눈을 마주치며 호흡하는 게 아니라 모니터를 보면서 연기해야 했다는 점이다. 두 개의 세트를 지어서 양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배우들이 생방송하듯 동시에 연기했다. 녹화된 영상을 보며 연기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연기에 사실감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모니터를 이용해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모니터로 감정을 주고받는 게 힘들더라. 아무래도 모니터로 보이는 표정에서는 디테일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서 최대한 감정을 끌어올리며 연기해야 했다.

어쩌면 올해 두 편의 영화가 개봉할지도 모르겠다.

둘 다 잘돼야 한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국 멜로 영화의 시발점이 될 수 있고, <협상>은 여배우도 범죄물이 어울린다는 걸 보여줄 수 있을 테니까. 잘 안돼서 여배우들을 더 어렵게 하면 안 되는데.(웃음)

어쩔 수 없이 어깨가 무거워지나 보다.

이름 앞에 수식어가 많아지니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요즘은 그것조차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았다. 작품의 흥행이란 배우의 노력만으로 성사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해도 영화가 망하면 누가 나를 써주겠나.

그런 운도 매 순간의 선택을 통해 결정되는 것인데, 마음에 남아서 자꾸 돌아보게 되는 지난 선택도 있지 않나?

지나간 일에 후회하지 않으려고 한다.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운명이라 여긴다. 그리고 나는 내 운명을 믿는다. 결국 내 느낌대로 좋아하는 작품, 도전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는 게 내 운명인 거지. 또 누구나 열심히 한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작품이 망하는 게 아니다. 결국 무엇이 주어지든 잘 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단련시켜야만 한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조금이라도 예전과 다른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다. 물론 남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거슬린다. 어디서 들었던 대사가 있으면 바꾸고 싶기도 하고. 최대한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새로운 캐릭터를 선택하기도 하고.

재킷, 바지 모두 루이비통.

<아내가 결혼했다>와 <비밀은 없다>에 함께 출연했던 김주혁 씨가 지난해 고인이 됐다. 최근에 그의 경력이 흥미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안타까웠다.

다들 장례식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일 텐데, 그래서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그리고 나는 빚을 진 것 같다. 나를 배우로 성장시켰다고 느끼게 만든 작품이 <아내가 결혼했다>와 <비밀은 없다>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연기한 인아의 상대역은 선뜻 맡기 어려운 캐릭터다. 자칫하면 불쌍하고 지질해 보일 수 있으니까. <비밀은 없다> 역시 여자 주인공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영화이고, 상대역은 연기적으로 많은 걸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그런데 주혁 오빠가 두 작품에서 그런 역할을 해줬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거 같다. <비밀은 없다>의 결말부에서 연홍이 복수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그 추운 날씨에 사흘 동안 바닥에 드러누워서 고생을 하는데 군말 없이 연기하고, 너무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빠한테 고마웠다는 말을 못 했다. 그때는 그게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래서 너무 많이 후회된다. 그리고 그냥 믿어지지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너무 아까운 배우를 잃었다. 조만간 주혁 오빠가 출연한 <흥부>라는 작품이 개봉한다고 들었는데 꼭 보러 갈 거다.

어쩌면 일상과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인생 별거 없는데 뭘 이렇게 아웅다웅하고 사나 싶기도 하고.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생각도 들고. 뒤를 돌아보면 참 고마운 사람이 많았는데 내가 마음이 넓지 않아서 잘 표현하지 못했다는 걸 깨닫는다. 결국 조금씩 성숙해지는 과정 같다.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20대에는 내가 이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고 살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웃음) 그래서 30대 초반에는 빨리 결혼해야 하지 않나 싶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이제 잘 모르겠다. 결혼하기 위해 억지로 누군가를 만날 생각은 없다. 해야 할 일도 있고, 지금 당장을 즐기고 싶다. 혼자 여행 가는 것도 좋아하고.

혼자서 여행하게 되기까지의 과정도 있었을 거 같은데.

여행 자체를 워낙 좋아한다. 아무래도 서울에서는 일상을 즐기기도 힘들다. 왠지 일에 대한 압박이 느껴지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고 할까. 그래서 외국으로 나가면 자유롭게 느껴진다. 작품이 끝나면 꼭 여행을 간다. 그렇게 다시 일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셈이기도 하고.

드레스 니나 리치. 슈즈 마놀로 블라닉.

어느덧 30대 중반을 넘어섰는데, 나이가 든다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은지.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과 얼굴에 주름이 늘어가는 것만 제외하면 다 좋은 거 같다. 여유가 생기니 주위를 둘러볼 수 있고 마음이 넓어진다고 할까. 30~40대가 돼서도 운동을 열심히 하면 20대 때보다 체력이 더 좋아지기도 한다. 지금 내 체력도 20대 시절보다 좋은 거 같고. 어쨌든 나는 나이 드는 게 좋다. 살아가는 게 편하게 느껴지고 고마운 마음도 들게 되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어릴 때는 고마운 일이 있어도 그게 고마운 건지 몰랐던 거 같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도 그런 걸 안다면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20대 시절에는 치열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의 여유가 좋다.

어쩌면 배우로서 더욱 실감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나이가 들면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한편으론 자기 나이에 맞는 위치를 찾아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20대 때는 30대가 되고 싶었다. 30대 배우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미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당장의 한 작품만 본다. 사실 40대가 돼서도 잘나가는 배우일지는 모를 일이다. 예측할 수 없다. 그러니 지금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리고 연기를 사랑하는 이상 끝까지 연기를 해보는 거고. 어느 순간 이 역할까지는 못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거나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역할을 제안받게 된다면 그때 선택하게 될 거 같다. 나이를 더 먹으면 멜로 영화를 하고 싶어도 엄마 역할만 들어오게 될 수도 있고. 결국 그때 가서 결정할 일이다. 그때 어떤 마음이 들지 지금은 짐작하기 어렵고.

브라톱 톰 포드. 셔츠 루이비통. 바지 에밀리오 푸치.

지난해 영화 관련 시상식에서 나문희 씨가 여우주연상 수상자로 여러 차례 호명됐다. 그렇게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키는 선배가 있다는 건 분명 고무되는 일일 것 같다.

큰 힘이 된다. 아마 80세가 다 되셨을 텐데, 그 나이면 인이 박힐 만한 연기를 항상 신선하고 새롭게 보여주면서 가슴을 울리는 진심을 담아낼 수 있다니, 너무 멋있다. 후배 여배우들에게는 위안이 될 수밖에 없다.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주시니까.

남자 배우들과 달리 여자 배우들은 경력이 쌓일수록 어떤 책임감을 안게 되는 것이 숙명처럼 보인다.

윤여정 선배님도 그렇고, 김혜수 선배님도, 전도연 선배님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런 선배들이 있어야 우리가 갈 길이 보이니까. 그런 선배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가야 할지 상상할 수 없었을 거다. 결국 우리에겐 그런 멋진 귀감이 필요하다.

이제 촬영장에서 선배보다 후배가 많은 나이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나이만 먹었을 뿐이지 마음은 아직 막내 같다.(웃음) 30대 중반이 넘었지만 여전히 20대 후반, 30대 초반처럼 느껴진다. 사실 누구나 다 처음부터 어른이었던 건 아니지 않나. 다만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그걸 받아들이는 것뿐이지. 후배들에게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나를 롤모델이라고 말하는 후배를 만나면 덕분에 잘 살아왔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선배에게든 후배에게든 ‘손예진은 참 열심히 하는 배우’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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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패션 에디터 권지원
어시스턴트 박 유신
사진 KIM YEONGJUN
헤어 구 미정
메이크업 무진 AT INTREND
스타일링 정 윤기, 신 지혜
출처
29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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