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이라는 운명-1

손예진은 배우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여배우로서 나아갈 길을 생각한다. 손예진은 믿고 있다. 손예진이라는 스스로의 운명을.

코트 니나 리치.

오늘이 생일이라 들었다. 화보 촬영장에서 생일을 보내게 됐는데, 오늘은 <에스콰이어> 입장에서도 특별한 날이다. 한국판 창간 이래 처음으로 여성 커버 모델을 촬영한 날이기 때문이다.

생일에 연연하는 편은 아니다. 대부분 촬영장에 있었기 때문에.(웃음) 특별한 일이 없으면 생일날 조촐하게 보낸다. 그런데 오늘은 화보 촬영 덕분에 많은 이들을 만나 축하를 받아서 생일 기분을 제대로 느낀 것 같다. <에스콰이어>의 제안을 받았을 때 좋은 취지라 생각했다. 올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을 것 같은데 새해부터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하는 느낌이라 좋다. 요즘은 사진이나 기록을 남기는 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좋은 추억이 된다는 생각도 들고.

예전에는 아니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화보 촬영을 많이 안 했다.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는 게 어색해서. 해보면 재미있기도 하지만 크게 내키지 않더라. 그런데 요즘은 지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내심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올해 해야 할 일이 많을 거라 했는데 당장 2월부터 안판석 PD의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 작품의 속내가 따로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안판석 PD는 시청자들이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1차원적인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항상 뼈 있는 내용의 드라마를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 이런 작품을 만들었다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확하다. 비틀어진 사랑이나 인간의 탐욕을 그린 내용이 아니다. 내 나이 또래의 평범한 직장 여성들이 경험할 법한 이야기다.

평범한 직장 여성들이 경험할 법한 상황이란 손예진에겐 되레 경험해보지 못한 판타지 아닐까?

맞다. 직장을 다닌 적은 없으니까. 주변의 지인들도 대부분 내 일과 연관된 분야 종사자들이고. 이젠 나와 다른 일을 하는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 이번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진아라는 인물은 커피 전문점에서 매니저들을 총괄 관리하는 슈퍼바이저인데 직장 내에서 겪는 일을 알게 되는 재미가 있었다. 내 나이 또래 여자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싶기도 하고.

드라마에 출연하는 건 5년 만인데.

소소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 <연애시대>처럼 인물 개개인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을 찾던 와중에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대본을 보게 됐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었다. 30대 후반의 내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인 것 같기도 하고.

2000년대 초반 연기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다. 요즘은 10대 때부터 연기를 하는 배우도 많지만 당시만 해도 20대 초반부터 경력을 시작한 배우가 흔치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한 건 아니지만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대학교 1학년을 보낸 뒤 휴학하고 배우로 데뷔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했는데 그나마 1년이라도 대학교를 다녀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이라도 재산처럼 남았다고 느껴져서.

대학 시절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이라도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1년 동안 충분히 놀아서.(웃음) 그리고 함께 재학했던 영화과 동기 중 감독이나 배우가 된 친구들이 꽤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꿈을 이루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나 역시 복 받은 사람이고.

왠지 큰 부침이 없이 경력을 이어온 것처럼 보인다.

많이 들은 말이다. 아무래도 대단한 스캔들에 휘말려 구설에 오르거나 자숙할 만한 사건을 저지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했던 거 같다. 예를 들어 누군가 소개팅을 해준다고 하면 상대가 나랑 만난 걸 소문내고 다니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부터 했다. 배우로서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남에게 피해 줄 일을 만들거나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놓은 편이지만 20대 시절에는 그런 강박이 강했다. 일이 가장 소중했다.

배우로서의 삶이 그렇게 절박했던 걸까? 아니면 일종의 책임감?

나도 내가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할 줄 몰랐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했다면 하버드도 갔을 텐데.(웃음) 심지어 친한 동료 배우들이 ‘너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한때는 ‘배우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그래야 멋지고 매력 있어 보일 텐데 나는 너무 정석처럼 열심히 하나?’ 생각한 적도 있다.

배우로 산다는 것에 대한 충만함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배우가 되고 싶었을까?

학창 시절에는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다. 누가 내 이름만 불러도 심장이 떨릴 정도로 예민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또래에 비해 성숙한 편이기도 했다. 내 안에서 너무 많은 감정이 느껴졌는데 표현할 자신은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시절부터 연기를 하면 내 안의 감정을 끄집어낼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지.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하다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인생의 힌트를 얻은 걸까?

그건 아니다. 어릴 때는 영화관 갈 일도 없었고, 드라마를 봤다면 그냥 재미있어서 본 거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결국 연극영화과에 진학했으니 배우가 돼야겠다는 확신은 있었나 보다.

고3 때 결심했다. 더 늦으면 못 할 거 같아서. 그래서 부모님한테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흔쾌히 허락하셨다. 내가 우리 집에서 둘째인데, 집안의 기대가 언니한테 집중돼 있어서 둘째는 좀 풀어놓은 거 같다. 그리고 고3 때 지금의 소속사 대표를 만났다. 당시는 현장 매니저였는데, 천천히 준비해나가자고 하더라.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오디션을 봤다.

고3 때 만났다면 정말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온 셈인데.

19세에 만났는데 지금 30대 후반이니까 19년 정도 됐나? 낯선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누군가와 새롭게 합을 맞춘다는 것 자체가 두렵기도 하고 지금의 소속사와 잘 맞는 편이다. 어릴 때 함께했던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 서로 나눌 수 있는 추억도 많다. 대구 촌년이 서울로 올라와 배우로 살고 있다는 것부터 잘 아는 사이니까. 나는 그런 게 좋다.

니트 톱 발망. 치마 토즈.

공효진 씨와 절친이라 들었다. 며칠 전 생일 파티에서도 함께한 것 같던데 그 자리에 엄지원, 이정현, 송윤아, 이민정, 오윤아 씨도 참석했더라. 배우들끼리 끈끈하게 지내는 모습이 흥미롭게 보였다.

사실 여배우들끼리 그렇게 친하게 지내기가 쉽지 않다. 20대 시절에는 예민하기도 했고. 그런데 30대가 되면서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기면서 누군가를 챙겨줄 수 있는 요량이 생겼다. 그리고 여배우들끼리 통하는 게 있다. 서로 어디 가서는 할 수 없는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응원도 하고, 한풀이도 하고, 위로도 하고. 동료로서 나눌 수 있는 끈끈함이 있다. 든든한 거 같다.

여배우들끼리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작품이 드물기 때문에 친해질 기회 자체가 드문 것일지도 모르겠다.

맞다. 만날 일이 없다. 남자 배우들은 함께 할 수 있는 작품이 많지만 여배우들은 그럴 기회가 드물다. 남자 배우들이 우르르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 여자 배우들이 그렇게 나오는 영화는 없으니까. 멀티캐스팅이 돼도 남자 여럿에 여자는 한두 명 정도인 상황이고. 그래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지나가는 배우가 더 많다.

아무래도 남자 배우들에 비해 매력적인 역할을 맡을 기회가 적은 만큼 경쟁심을 느낀 시절도 있지 않았을까?

그건 남자 배우들도 느끼는 감정일 거 같다. 인간이니까 당연한 마음이겠지. 어쩌면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 아닌가? 누구는 승진하는데 나만 못 하면 배 아프지 않나? 여배우들끼리 경쟁심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내 작품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는데 다른 배우 작품이 잘되면 상대적으로 의기소침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솔직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서로의 행복을 축하해줄 수 있는 동료들이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작년 11월에 촬영을 마친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동명의 일본 멜로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정통 멜로 영화 출연은 정말 오랜만이다.

요즘 멜로 영화 볼 기회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심지어 올해 개봉하는 멜로 영화가 우리 작품밖에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멜로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사명감도 생긴다. 이 작품이 잘돼야 멜로 영화가 더 제작될 테니까. 한국 영화 시장이 보다 다양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도, 관객 입장에서도, 이 작품이 잘됐으면 좋겠다.

<클래식>이나 <내 머리 속의 지우개> 같은 작품은 개봉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회자되는 멜로 영화다. 한국 멜로 영화 부문에서 큰 역할을 한 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멜로 영화를 기획하기 어려운 시장 상황을 설득한 건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담보 가치였을지도 모른다.

이랬는데 잘 안되면 어떡하지?(웃음) 섣불리 멜로 영화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회자되는 멜로 영화로 기억되는 만큼 그때가 더 좋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안 될 테니까. 아무래도 그 이상의 작품을 선택해야 할 것 같고, 더 깊은 멜로 연기를 보여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정말 오랜만에 선택한 것 같다.

멜로 영화라는 장르의 부재가 여배우들이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부재로 이어진 것 같기도 하다.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에서는 여배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확실하니까. 스릴러 장르에도 여배우들이 출연하긴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 영화는 남자 중심으로 기획하는 경향이 강하고.

요즘은 종종 이렇게까지 남자 일색의 범죄물만 봐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범죄도시>는 정말 재미있더라. 나도 막 따라 하게 되고.(웃음) 물론 어떤 영화를 보면 ‘저 캐릭터가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참 어려운 일이긴 하다. 누아르 같은 영화에서 멋있는 여자 캐릭터를 그려낸다는 게.

사실 멜로 영화의 아이콘이나 다름없었던 손예진이라는 배우에게 처음으로 ‘변신’이라는 단어를 수식하게 만든 작품이 <무방비 도시>였다. 당시에 새로운 갈망이 있었나?

<연애소설>을 시작으로 <클래식>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외출> 그리고 로맨틱 코미디인 <작업의 정석>까지, 20대 초반의 경력이 대부분 멜로물이었다. 좋은 작품도 많았지만 반복적인 경력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결국 다른 장르를 선택하게 됐다. 그 뒤로 스릴러도 찍고, 블록버스터에 출연하기도 하고, 다양한 작품을 하게 됐다.

확실히 <무방비 도시> 이후로 필모그래피가 다채로워졌다. 그리고 2007년 무렵은 한국 영화계의 장르적 팽창이 활발한 시기였다.

맞다. 지금보다 다양한 영화가 기획된 시절이었다.

어떤 역할이든 족족 잘 해내는 배우처럼 보였다. 도드라지지 않고 성실하게 제 역할을 해내는 모범생이자 우등생 같은 느낌이랄까.

열심히 하긴 했다. 그런데 다양한 장르를 선택할수록 배우의 리스크는 커진다. 멜로 이미지가 괜찮은데 굳이 코믹을 해서 망가진다는 반응도 있었고. 지금 보면 어색해 보이는 것도 많다. <무방비 도시>에서도 카리스마 있는 척하기 힘들었다.(웃음) 그런데 <아내가 결혼했다>를 하고 배우로서 자신감을 갖게 됐다. 그전까지 로맨스물의 여성 캐릭터는 여리기만 했는데 그 작품에서는 도발적인 연기를 해야 했다. 장르를 배신하는 느낌이랄까. 그게 두렵지 않더라.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몰라도 일단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다.

결국 해봐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한 사람이 다양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해도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이고 결국 같은 사람이니 꾸준히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 변화를 시도해보려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어떤 연기가 내게 어색한지 알게 되고. 그런 경험이 하나씩 쌓여가면서 점점 두려움도 없어지고 많은 걸 배우게 된다.

스스로 부족한 점을 깨닫게 되는 건 일단 두려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자극이 되니까. 한편으론 풋풋한 신인 시절이 지나면 잃게 되는 것들도 있다. 기술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능수능란하지 않아서 그 캐릭터에 딱 어울리는 듯한 모습. 그 나이가 오롯이 드러나 캐릭터와 어울리는 느낌. 최근에 극장에서 <클래식>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2003년 개봉하고 15년 만이었다. 그런데 내 대사가 너무 간지러웠다. 목소리가 달랐다. 나이가 들면 목소리도 달라지나 보더라. 그게 너무 부끄럽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그 당시 내가 가진 풋풋함이나 순수함이 그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반가웠다. 지금의 내가 그때보다 연륜이 더 쌓이고 더 나은 연기력을 갖고 있다 해도 이젠 지금의 내가 할 수 없는 게 거기 있었다. 물론 지금은 좀 더 깊이 있는 경험을 쌓아야 가능한 것들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귀걸이 셀린느.

배우 손예진의 이면을 가장 크게 끌어낸 작품은 <비밀은 없다>라고 생각한다. 손예진이라는 배우는 보름달처럼 환하고 동그란 느낌이라 생각했는데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초승달처럼 서늘하게 날이 선 느낌이었다. 배우 손예진이 이렇게 악에 받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를 연출한 이경미 감독이 여자라는 점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에서 가장 새로운 연기를 보여준 셈이니까.

사실 이경미 감독의 스타일이 독특하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런 톤으로 연기하면 될 거 같다고 생각했던 게 항상 뒤집혔다. 전형적인 걸 다 파괴하길 원했다. 언제나 다르고, 이상하게. 사실 나는 항상 관객들의 공감대와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연기를 해왔다.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관객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찍은 작품이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나?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연기한 연홍은 관객이 쉽게 따라가기 힘든 캐릭터였다. 나조차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설득했다. 이 아이는 이런 아이니까 이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면서.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만 너무 새로웠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언제 내가 이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연기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폭발하듯 감정을 토해내는 게 시원하기도 하다. 절제하는 게 오히려 어렵지. 물론 에너지가 바닥나는 느낌이기도 하지만. 친한 동료들도 그렇게 대사를 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내게 그런 에너지가 있었는지 몰랐다고 하더라.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긴 있었나 보다.

<덕혜옹주>는 <외출> 이후로 11년 만에 허진호 감독과 재회한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외출>은 전작들에 비해 감정적인 성숙함을 요구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 연기가 좋았다고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맡아야 하는 역할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4개월 동안 촬영하면서 그 캐릭터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캐릭터를 고민하면서 허진호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내 의견이 반영되는 게 재미있었다. 감독님은 배우를 찬찬히 관찰하면서 발견한 모습을 영화적인 설정으로 끌어내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감정을 잡는 편인데 감독님이 그걸 보더니 영화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있으라고 하더라. 불륜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내 역할을 맡은 것도 내 나이를 고려한 설정이었던 것 같다.

허진호 감독은 유일하게 두 번 만난 감독이기도 하다.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친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덕혜옹주는 힘든 캐릭터였다. 처음으로 역사적인 인물을 연기했던 터라 이 캐릭터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심지어 많은 예산이 필요한 시대극을 여배우가 이끌어간다는 우려도 많아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여곡절도 많았고. 그래도 과거에 쌓았던 신뢰가 있어서인지 감독님이 의지가 됐다. 한편으론 처음 만나고 10년이나 지나서 나도 감독님도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게 되면서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고. <덕혜옹주>는 ‘허진호식 멜로 영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였기 때문에 감독님도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던 것이니 그만큼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결과가 좋았으니 정말 다행이라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선 서로 잘 살아왔다는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이 새로운 작품을 연출할 기회를 얻는다는 건 배우가 새로운 작품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감독님이 굳건히 영화를 연출하고, 나는 감독님의 작품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가 됐다. 좋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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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패션 에디터 권지원
어시스턴트 박 유신
사진 KIM YEONGJUN
헤어 구 미정
메이크업 무진 AT INTREND
스타일링 정 윤기, 신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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