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진희는 잘 참는다

촬영 당일 걸려온 전화 한 통. 작은 사고가 났다고 했다. 배우 백진희 이야기다.

니트 아크네 스튜디오. 귀걸이 1064 스튜디오

<에스콰이어>와 인터뷰는 두 번째죠?

맞아요. 2014년 <오만과 편견>이라는 드라마에 들어간 직후였죠. 그때도 지금처럼 단발머리로 바꾸고 촬영했어요. 신기한 인연이네요.

단발머리 때문에 이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저글러스>의 ‘윤이’는 단발이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제가 단발로 자르겠다고 했어요. 머리카락을 갑자기 자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긴 머리보다 더 원하는 게 있으니까. 물론 자르고 나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몇 년을 기르다가 갑자기 싹둑 잘라버렸으니까요.

터틀넥 톱 렉토. 귀걸이 1064 스튜디오.

지금 가장 궁금한 건 어쩌다 다리에 깁스를 했느냐는 거예요.

드라마 촬영하다가 다쳤네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발목이 꺾였어요.

그래서인지 오늘 촬영장에 왔을 때 마음이 무척 무거워 보이던데.

저 때문에 여러 스케줄이 꼬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요. 병원에 갔는데 깁스를 꽤 오래 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걱정부터 앞섰죠. 새로운 드라마에서도 활동성이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해야 하거든요. 아마 그런 고민 때문에 얼굴이 어두웠나 봐요. 사실 오늘 촬영도 엄청 기대했거든요. 그런데 어제 다리를 다쳤으니 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어요.

그러게요. 개인적으로 저에게 백진희란 배우의 이미지는 밝게 웃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어요. 여리고 슬퍼 보였달까?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저는 주변 상황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어쩌면 오늘은 목발 짚은 캐릭터에 맞는 분위기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제가 잘하는 건 잘 참는 거예요. 뭐든지 잘 참아요. 추워도, 힘들어도, 아파도.

그건 분명 장점 같네요. 스스로 장점을 안다면 단점도 알 거 같은데요?

잘 참지만 마음이 잘 흔들려요. 갈수록 점점 여려지는 것 같고요. 눈물도 많아지고, 외로움도 많이 타요.

언제 외로워요?

요즘은 자정이 지나면 갑자기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외로워져요. 온 세상의 고민을 마치 제가 다 끌어안은 것처럼 말이죠. 배역에도 영향을 받는 거 같아요. 밝고 명랑한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그런 감정을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의외네요. 백진희란 배우는 ‘발견된 것’보다 ‘앞으로 발견할 것’이 더 많을 것 같은데.

저도 아직 저를 찾아가고 있는 단계예요. 저만의 장점도 있고, 아직 못 보여드린 모습도 있어요. 당연히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도 있고요. 그래서 지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결’이에요. 배우로서 다양한 색깔, 다양한 감정을 갖추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게 곧 깊이인 거 같고요. 나이가 아니라 실력의 깊이.

트렌치코트 디올. 티셔츠 ATM by 수퍼노말.

배우에게 색깔은 중요하죠. 당신은 어떤 캐릭터로 보이고 싶죠?

작지만 영리해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배우요. 제 에너지가 남들에게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아, 오늘은 상대적으로 힘이 좀 없었네요. 다리를 다쳐서요.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요. 그렇게 항상 잘 웃어요?

저도 사진을 보기 전까진 몰랐는데, 제가 잘 웃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잘 웃어요.

반대로 최근 드라마에선 소리치고 화내고 따지는 당돌한 배역이 많았는데.

평소에 누군가에게 따지거나 그런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도 부당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이라면 꼭 얘기는 하는 편이죠. 물론 직설적이거나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선에서요. 화내는 연기는 꾸준히 연습하고 있어요. 평소에 잘 안 하는 행동이라 연기할 때 무척 어색하거든요. 감정을 억제하는 것도 필요해요. 감정이 쏟아지면 대사 전달력이 떨어지거든요.

지금까지 특정 방송사와 인연이 길고 두터웠어요.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부터 <기황후> <트라이앵글> <오만과 편견> <내 딸 금사월> <미씽나인>까지 MBC의 작품이었죠.

의도한 것은 아니에요. 순간순간 저에게 어울리는 결정을 했을 뿐이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특정 방송사 작품을 여러 개 했어요. 반면 이번에 들어가는 <저글러스>는 KBS 작품이에요. 제가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는 건 방송사가 아니에요. 작품의 성향에 따라서 현장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뿐이죠. 장르가 로맨틱 코미디여서 즐겁게 촬영하고 있어요.

<저글러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떨리고 설레고 걱정돼서 잠을 못 잤다’고 했죠? 작품을 시작하고 익숙해지기까지 얼마나 걸려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촬영 현장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낯선 거예요. 그래서 끝날 때까지 긴장하는 편이에요. 매 순간 상황에 동화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같아요. ‘됐어. 익숙해졌어. 내가 그 캐릭터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연기할 때 그 캐릭터를 바로 놓치게 돼요.

최근에 그런 경험을 했어요?

<미씽나인>을 촬영할 때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초반에 바다에 들어가는 장면이 많아서 체력적으로 힘들었거든요. 연기할 땐 집중해서 그 상황에 몰입해야 하는데, 갑자기 캐릭터와 분리돼서 제가 그냥 나오는 순간을 느낀 거죠.

본인만 알 수 있는 미묘한 차이군요. 그럼 반대로 어느 날 아침에 거울을 보는데 내가 아니라 캐릭터가 보여서 싫은 적은 없나요?

그 상황이 오면 너무 좋을 거 같은데요? 그럼 연기를 안 해도 되잖아요. 요즘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할 때부터 캐릭터를 생각하는 거 같아요. ‘나는 윤이야, 좌윤이. 윤이는 오늘 무엇을 할까?’ 이러면서 계속 집중하죠.

슈트, 셔츠, 니트 모두 가격 미정 프라다.

좌윤이라는 이름이 독특하네요. <저글러스>에서 비서로 활약하는 것 같던데요.

5년 차 비서예요. 업무적으로 능수능란하고, 사회적으로 처세술에 능하죠. 당차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캐릭터예요. 캐릭터의 감정 변화가 크고요.

비서는 어려운 직업이잖아요. 어려운 직업을 연기하는 건 어려운 일 같은데요?

저도 어렵다고 느끼고 있어요. 말투나 걸음걸이, 표정처럼 사소한 것까지 다 비서처럼 보이고 싶거든요. 그래서 어려워요.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비서 교육을 받기도 했어요.

지금까지 해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역할, 새로운 장르네요. 부담일 텐데요.

로맨틱 코미디에 꼭 참여해보고 싶었어요. 장르의 특성상 단지 재미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를 살려야 해요. 재미와 공감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캐릭터 간의 조화도 무척 중요하죠. 그래서 함께 출연하는 연기자 모두가 고민을 많이 해요.

월화 드라마죠? 드라마 출연이 많다 보니 시청률에 민감할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무시할 수 없죠. 시청률이 높으면 감사하죠.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시청률과는 별개로 정해져 있어요. 드라마의 흐름을 위해서, 혹은 그 장면을 위해서 제대로 연기하는 게 제가 할 일이에요. 진짜 열심히 연기했다면 시청률이 안 나와도 후회하지 않아요.

요즘 드라마는 오해와 갈등이 무척 심한 거 같아요. 문제가 꼬일 대로 꼬여서 나중에는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모를 정도예요. <내 딸 금사월>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고요. 그런 상황에 놓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 무척 스트레스받죠?

당연히 캐릭터가 처한 상황이 너무 답답하죠. 캐릭터가 바로 저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감정을 실어서 더 열심히 연기할 뿐이죠. 어쩌면 그래서 제가 참는 기술이 계속 늘고 있는지도 모르죠.

그렇게 몰입해서 작품을 하다가도 언젠간 캐릭터에서 벗어나야 하잖아요.

다시 현실의 저로 돌아와야죠. 작품을 많이 하지 않았을 때는 그게 진짜 어려웠어요. 요령도 몰랐고요. 드라마 촬영을 할 때는 제 주변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있잖아요? 근데 작품이 끝나면 한순간에 제 인생에서 모두가 쑥 빠져나가요. 무척 공허해요. 제가 연기한 캐릭터뿐 아니라 캐릭터와 캐릭터가 만나서 만들어낸 세계가 사라지는 것도 힘들죠.

그런데도 여전히 연기에 욕심이 나요?

저에겐 이번 드라마가 무척 절실해요. 작품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할 거예요. 진심을 담아서. 아파도, 힘들어도, 다리가 다쳐도 꾹 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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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어시스턴트 이 영선
사진 MOK JUNGWOOK
헤어 정 은구@김활란뮤제네프 도산라벨르점
메이크업 송 은경@김활란뮤제네프 도산라벨르점
스타일링 조 보민
출처
26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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