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정의 이유

박은정 교수는 한때 경력 단절 여성이었다. 지금은 연구 성과 세계 1% 연구자다.

박은정

  • 1986 동덕여대 건강관리학과 학부 입학
  • 1993 동덕여대 약대 대학원 입학
  • 2003 삼육대 약학과 박사과정 입학(면역학)
  • 2005 동덕여대 약대 박사과정 편입(면역학)
  • 2008 동덕여대 박사 졸업. / 포스트 닥터 신분으로 연구
  • 2010 국립환경과학원 전문직 연구원
  • 2011~2016 한국연구재단 대통령 포스트닥 펠로우십
  • 2015 미래창조과학부 지식창조대상 장관상
  • 2016 톰슨로이터 선정 / 세계 상위 1% 우수논문 연구자(HCR)
  • 2017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 선정 / 세계 상위 1% 우수논문 연구자(HCR)
  • 2018 경희대학교 동서의학대학원 / 정교수 부임 / Silver nanoparticles induce cytotoxicity by a Trojan-horse type mechanism(2010), 2018.01.14 기준 508회 인용

신기주(이하 신) 도대체 왜 그렇게 죽도록 공부를 했나요?

박은정(이하 은) 처음에는 솔직히 이렇게까지 공부를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대학원에 처음 들어갈 때는 회사 다니면서 파트타임으로 공부도 하는 식이었거든요. 옛날 얘기지만 작은 건강 기능 식품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요.

박찬용(이하 박) 그 당시는 이미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일까지 하는 생활인이 돼 있었지만 공부에 대한 막연한 꿈을 놓지 않고 있었나 보네요.

원래 의대에 가고 싶었는데 상황이 안 됐거든요. 이후 결혼하고 일하면서 석사 공부를 할 때였어요.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미국 면역학회에서 발표해야 학위를 주겠다. 각자 항공편만 해결하면 가서 먹고 자는 건 해결해주겠다. 다 같이 가자.’ 따라갔죠. 처음 미국 나들이한다고 신나서 갔어요. 학회가 열린 곳은 정말 큰 체육관 같은 곳이었어요. 거기를 딱 내려다보는데 몸에서 전율이 흘렀어요.

전율이오?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한순간도 아니었어요. 냉동 인간이 되듯이 계속 전율이 느껴졌어요.

왜 전율이 느껴졌을까요?

모르겠어요. 그냥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낀 걸까? 그때 완전히 간 거죠. 거기서 학생들이 자기 연구 결과를 발표하거든요. 그 연구를 본 사람들이 질문하거나 토론하는 그런 장이었어요. 그런 연구 발표 포스트가 수백 개씩 걸려 있는 광경을 본 것 같아요. 그 모습을 위에서 아래로 딱 쳐다봤어요. 그 열기를 실제로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이거다. 그 느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믿어버렸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건지 모르겠어요.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오면서도 내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각성한 거군요. 그게 언제였나요?

2003년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고민했어요. 일을 그만두고 공부만 하겠다는 얘기를 남편한테 어떻게 꺼낼 것인가. 왜냐하면 제가 이제 돈을 못 벌게 되는 거잖아요. 아이 교육 문제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교수님한텐 또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실험실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다들 어떻게 받아들일까.

여성이 무언가에 도전할 때 앞길을 막는 장애물들이네요.

남편은 아이 걱정을 제일 많이 하더라고요. 본인은 괜찮다고. 남편이 그랬어요. ‘어차피 나도 공부를 하고 싶었다. 우리 엄마도 날 공부시키고 싶었지만 상황이 안 됐다. 그런데 너라도 하겠다면 난 좋다. 함께 상황을 극복해보자’고 했어요. 문제는 아이였죠.

멋진 남편.

그런데 정작 아이도 별로 고민을 안 하더라고요. 엄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라고. 당시 아이가 중학생이었거든요. 엄마는 엄마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멋진 아들.

전 너무 놀랐어요. 쉽게 해결이 됐죠. 그러곤 교수님께 여쭤봤어요. 다 같이 회식을 하러 가는 자리였어요. 교수님 차 안에서 제 결심을 얘기했어요. ‘남편과 아들은 허락을 했다. 이제 제가 풀타임으로 연구실에서 연구하고 공부해보고 싶다.’

그랬더니요?

신호등이 바뀌었는데도 못 움직이시는 거예요. 차가 그냥 멈춰 서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셨어요. “은정아, 근데 너 파이페팅은 해봤니?” 실험할 때 파이페팅은 기본이거든요. 정량을 넣는 거. 전 안 해봤던 거죠. 실험하는 사람한테 1번이 파이페팅인데. “아니요. 모르죠.” 교수님이 한숨을 쉬셨어요. “그래, 그래도 해야겠니?”

현실의 벽.

실험으로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교수님이 한참 고민하시더니 말씀하셨어요. “해보자.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봐야지.” 다음 날부터 곧바로 하드 트레이닝에 들어간 거죠. 일주일 내내 실험실 구석에서 파이페팅만 했어요. 200매크로 넣으라고 하면 넣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웃는 거예요. 그걸 일주일 내내 시키셨어요. 그다음엔 생화학 실습책을 가르치셨어요. 거기에 나온 원리를 또 다 외웠어요.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죠.

아드님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면서요.

진단을 받은 건 사실이에요. 탈장이 돼서 병원에 갔더니 백혈병이라는 거예요. 혈액암이라고. 그때부터 6박 7일 동안 잠을 한숨도 못 자고 애를 업고 다녔어요.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섯이었거든요. 그때 검사하느라 10개월 된 아이한테서 피를 정말 많이도 뽑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이 드는 거예요. 우리 아이가 혈액암에 걸릴 이유가 없는데. 그러다 병원에서 오전 8시에 뽑은 저희 아이 혈액이 하루 종일 방치돼 있는 걸 본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설마?

자료를 찾아봤더니 이런 상황이면 검진이 잘못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의사 선생님한테 부탁을 했죠. 검사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피를 뽑으면 곧바로 들고 검사실로 제가 직접 가겠다. 그렇게 했더니 정상으로 나온 거예요.

오진이었던 거군요.

내가 똑똑하지 않으면 내 새끼를 절대로 못 지키겠구나 생각한 거예요. 그 생각이 물고 물리고 있다가 저한테 공부할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게 만든 원천이 아니었나. 맞아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의사한테 얘기했더니 다시 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똑같이 했어요. 똑같이 정상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 제가 그때 할 수 있었던 건 병원에서 돈 내라는 거 다 내고 퇴원하는 것뿐이었어요.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애가 하루에 몇 번씩 울고불고 탈장까지 되고,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혈액암을 걱정하며 지옥 같은 시간을 일주일 넘게 보냈잖아요.

그때 결심한 게 있나요?

공부를 해야겠다고. 나중에 기회만 되면. 내가 똑똑하지 않으면 내 새끼를 절대로 못 지키겠구나 생각한 거예요. 그 생각이 물고 물리고 있다가 저한테 공부할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게 만든 원천이 아니었나. 맞아요.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 뒤로는 그냥 달린 거죠. 사실 면역학을 공부하다가 독성학으로 옮긴 것도 같은 이유였어요. 면역학을 1년 반 넘게 공부하다 보니 뭔가 두루뭉술한 거예요. 동충하초로 혈압도 고치고 당뇨도 고치고 염증도 고치고 다 고치더란 말이에요. 만병통치약 같은 느낌이랄까. 제가 궁금하고 공부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어요.

그럼 뭐였나요?

면역독성학이었어요. 우리 면역체계가 깨져서 어떻게 질병이 생기는지 궁금했던 거예요.

아이는 다행히 오진이었지만 가족들은 계속 아팠으니까요.

망가진 면역체계를 치료하는 쪽이 아니라 왜 질병이 생기는지 알고 싶었던 거죠. 제가 정말 공부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1년 반을 다른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야 깨달았어요. 그때까진 하라는 공부만 했죠.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는 데 1년 반이 걸린 거죠. 독성학이라는 분야도 그때 처음 들어봤어요. 그때부터 독성학을 하는 연구실을 찾아다녔어요. 물어물어 연구실에 들어갔죠. 이후 지금까지 면역독성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 무언가에 치열하게 매달린다면 그건 남들이 모르는 숨은 내적 동기가 있어서일 거라고 짐작하곤 해요. 교수님도 그런 거군요. 죽기 살기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면역독성학이라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는 살아온 경험이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살아오면서 궁금했던 것들이 공부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 같아요.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다 그렇거든요.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것들이 저를 움직여요. ‘왜 그랬지? 왜 그렇게 된 거지?’ 의문이 들고 질문을 하게 되면서 공부를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때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면, 연구할 때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오겠어요.

저는 언제나 인간의 동기가 궁금해요. 누구나 포기했을 법한 순간인데 매달리게 만드는 집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아픈 자식을 돌봐야 했던 엄마가 늦은 나이에 공부에 매달리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저는 항상 제 느낌을 믿고 따랐어요. 나노독성학을 연구하게 된 것도 그 느낌 때문이었거든요. 처음 미국 학회에 갔을 때 말고 전율이 흐른 순간이 한 번 더 있었어요. 바로 나노 물질을 처음 접했을 때였죠. 면역학에서 독성학으로 넘어간 것만으로도 한국 연구 풍토에선 드문 사례예요. 원래 한 연구실에 들어가면 끝까지 가거든요.

그래야 학위 따고 교수 되는 게 유리하니까요. 끌어주고 밀어주고.

저는 어차피 뭐가 되고 싶어서 공부를 한 게 아니잖아요. 궁금한 걸 찾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 거죠. 그런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연구를 계속할 이유가 있나 생각했어요. 교수가 되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한 게 아니잖아요. 뭐가 궁금한지 깨달았다면 그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만 생각하면 되는 거죠. 면역학에서 독성학으로 옮긴 케이스는 거의 없는데, 제가 그렇게 선택한 거죠. 결국 1년 반 공부한 걸 한 학기밖에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래도 저한텐 옮겨야 할 이유가 충분했고.

궁금했으니까요.

한국에서 공부는 목적이 아니라 무언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랜데.

저는 지금도 학생들한테 같은 걸 물어봐요. 뭐가 되고 싶어서 온 거냐, 궁금한 걸 풀고 싶어서 온 거냐. 만약에 뭔가 되고 싶은 거라면 나는 절대 해결해줄 수 없다. 그러나 뭔가 궁금한 게 있고 그걸 통해 자신의 미래를 열고 싶다면 그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나노독성학이란 게 도대체 뭔가요?

저도 2006년도에 처음 알았어요. 나노라는 거. 전 운이 좋아요. 처음 만진 나노가 은나노가 아니라 세륨 옥사이드라는 나노였거든요. 은나노를 만졌다면 여기까지 절대 못 왔을 거예요. 한국에선 은나노를 많이 하는데, 은나노는 다루기가 무척 힘들어요. 그런데 저는 우연찮게도 세륨 옥사이드 나노 파티클을 처음 접한 데다 그것도 아주 잘 만들어진 물질이었어요. 세포 안에서 분산이 잘 되게.

은나노랑 세륨 옥사이드의 차이가 뭔가요? 저희는 비전공자라 나노 물질 하면 미세 먼지 같은 거나 떠올리거든요. 아주 작다는 것만 알죠.

나노 물질에는 자연적 나노와 제조 나노가 있어요. 무엇보다 인공적으로 만든 제조 나노의 독성을 연구하려면 몸이나 세포 안에 집어넣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실험을 하려고 몸 안에 넣으면 나노 물질이 모여서 덩어리가 져요. 나노가 나노가 아닌 게 돼버리죠. 독성 실험을 하려면 나노 상태여야 하는데. 분산이 잘 된다는 건 나노 상태가 잘 유지된다는 뜻이에요.

세륨 옥사이드는 분산이 잘 되나 보군요.

우연찮게 그런 나노를 접한 거죠. 제가 운이 좋다니까요. 은나노는 바로 이온화돼버리거든요. 입자 상태가 아니니까 독성 실험을 하기가 어렵죠.

자꾸 운이 좋다고 하네요. 사실 많은 불운을 이겨낸 분인데.

정말 운이 좋다니까요. 제가 미세 먼지 실험에도 경험이 많았거든요. 대기 분진을 이미 공부했는데 그렇게 대기에서 생성된 나노의 독성을 공부할 기회가 온 거죠.

또 전율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고요?

처음 세포 속 나노 물질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을 때. 얘네들이 정말 미친 듯이 세포 안을 돌아다녀요. 핵막을 그냥 뚫어버려요.

작아서요?

작기도 하지만 얘네들한텐 전하가 있어요. 정전기 같은 거. 덕분에 나노들이 세포 사이사이를 뚫고 다닐 수 있는 거죠. 그 전에는 못 봤던 거예요. 신세계를 본 거죠 그때.

그렇게 세포막을 뚫고 다니면 세포가 파괴되나요?

그렇게 파괴해요. 그런데 한 세 시간 정도 지나니까 나노들이 핵막 주변에 모조리 달라붙더라고요. 우리 유전자는 모두 핵에서 나오잖아요. 그런데 핵막 주변에 나노들이 들러붙어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핵에서 단백질도 나오고 그래야 세포분열도 되고 그러잖아요. 그렇게 세포가 말라죽는 거죠. 세포의 기능을 전혀 못 하게 돼요. 현미경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이렇게 나노가 세포를 죽이는 거구나. 그야말로 소통이 안 돼서 죽겠구나. 한밤중에 현미경을 보다가 정말 전율을 느꼈어요.

또 느낌이 왔네요.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밤새 현미경을 봤거든요. 허리가 아플 정도로. 나노를 어떻게 해결해야 세포를 살릴 수 있는지 아이디어를 짜느라.

세륨 옥사이드라는 건 어디에서 나오는 물질인가요?

배기가스. 연소를 촉진하는 연소제. 원래 티타늄을 많이 썼는데 티타늄이 독성을 많이 일으킨다고 해서 대체 물질로 세륨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세륨도 독성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학술진흥재단에서도 세륨 독성 연구를 과제로 선정한 거고. 티타늄 나노 파티클을 대체할 수 있는 세륨 옥사이드 나노 파티클의 독성 연구. 그런데 아직도 대체가 안 되고 있죠. 티타늄 나노를 쓰는 분야가 워낙 많아서.

시계에도 티타늄을 많이 쓰는데.

맞아요. 자외선 차단제에도 쓰여요. 립스틱에도. 페인트에도. 티타늄에도 종류가 정말 많거든요. 금속형도 있고 비금속형도 있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노출되는 제조 나노 물질이 그렇게나 많나요? 그런 물질이 어떻게 우리 몸 안에서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지조차 아직 정확하게 모르고.

그렇죠. 연구된 것도 증명된 것도 너무 적어요. 그러니까 규제를 하려고 해도 데이터가 적어서 안 되는 거죠. 활용하려고 해도 데이터가 적어서 어렵고. 그런데도 정부 쪽에선 이미 나노 물질 독성 연구는 어지간히 된 게 아니냐고 해요. 2011년에 처음 나노 독성학 과제를 딸 때부터 그랬어요. 나노는 이미 다 한 건데 뭘 더 하느냐고.

모르니까.

그래서 제가 전혀 연구가 안 돼 있다고 그랬어요. 그걸 계기로 대통령 포스닥 펠로십도 될 수 있었던 거고.

사실 교수님 논문이 전 세계 나노 독성학 분야에서 500회 가까이 인용됐잖아요. 인용이 많이 됐다는 것 자체가 관련 연구가 세계적으로 그만큼 덜 진행됐다는 반증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운이 좋다는 거예요.

또 운이 좋다고 그러네요.

정말이에요. 한국 사람들이 정말 성실하고 빠르잖아요. 하지만 실험을 시작하는 게 늘 늦어요. 100m 뒤에서 시작하니까 쫓아가기가 힘들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선행 연구를 한 분들의 연구를 우리가 인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런데 나노는 안 그랬어요. 우리도 같은 선상에서 출발했어요. 같은 라인에서만 시작해도 우리가 뒤처질 이유가 없거든요. 어느 나라에서 며칠 밤을 새워가면서 실험을 해요. 우리만 그렇게 해요.

교수님 덕분이네요.

아니에요. 그때 우리나라 정부가 손을 빨리 썼어요. 그리고 은나노 세탁기 사건도 있었죠. 삼성전자에서 은나노 세탁기를 만들어서 수출했는데 문제가 생겼잖아요. 은나노 세탁기의 독성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하는데 없으니까.

미국에서 은나노 세탁기의 독성 데이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무역 분쟁이 됐죠.

그런데 독성 데이터를 제대로 못 줬거든요. 그때 우리도 독성 데이터가 있어야 수출을 할 수 있다는 걸 빨리 깨달은 거죠. 그때 갑자기 과제가 만들어졌어요. 당시 저는 미세 먼지 등으로 나노 물질에 익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준비가 돼 있었던 것뿐이고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

공부할 때는 운이 좋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생활이 교수님을 방해한 불운한 경우도 많았잖아요.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할 수 없게.

엄마가 췌장암을 앓았던 게 제가 공부를 늦게 시작한 이유 중 하나죠. 박사 면접을 보러 가야 하는데 엄마가 아이를 못 봐주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박사는 조금만 있다가 따라고. 그때 조금 속이 상했어요. 저는 준비가 됐는데. 알았다고 말만 하고 며칠을 엄마한테 안 갔어요. 그런데 아버지한테 전화가 와서는 엄마가 아프다고 한번 가보라고 하는 거예요. 가보니까 한 달 전과는 모습이 너무 다른 거예요. 너무 놀랐어요. 그때만 해도 검진 결과도 안 나와서. 나중에 서울대 병원에서 검진하니까 난소암으로 나왔어요. 수술을 들어가서야 수술할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알게 되고. 그 시작이 췌장암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때부터 5개월 동안 간병을 했어요. 하루에 한두 시간씩 자면서. 엄마는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공부를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네요.

사실 그때도 생각했어요. 엄마도 유전적인 게 아무것도 없는데. 심장이라면 몰라도 왜 췌장암일까. 이건 아닌데. 5개월 내내 간병하면서 그 생각을 했어요. 왜일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일주일 있다가 시아버님이 자꾸 딸꾹질을 하신다고 해서 찾아뵈니까 정말 딸꾹질이 멈추지를 않는 거예요.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삼성병원에 모시고 갔어요. 검사를 해보니까 위궤양으로 인한 출혈이 있었던 거예요. 피가 덩어리가 져서 딸국질이 난 거죠. 검정 쓰레기봉투가 8개나 나오도록 위세척을 다 했어요. 그러곤 MRI 검사를 했더니 식도암 말기였어요. 식도하고 기도가 다 붙어버릴 정도로. 엄마 돌아가시고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불행들이 교수님을 더 연구실의 현미경 앞에 앉혀놓았던 걸까요.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순간만큼은 생활의 온갖 번민이 다 사라지는 거죠. 세상에선 불행하지만 연구실에서만큼은 행복했고.

연구실에서만큼은 정말 온갖 번민이 다 사라져요. 그 순간에는 우리 아이가 잘 먹고 잘 자고 있는지 그런 생각조차 안 들어요. 그게 좀 미안하죠. 아이는 엄마 기를 먹고 자라야 하는데 엄마의 기가 다 세포하고 쥐한테 가 있으니까.

아드님은 건강하게 잘 자란 거죠? 당시 오진이었으니까. 이젠 어른이 됐겠네요.

올해 스물여덟 살이에요.

아드님도 엄마가 연구실에서 가장 행복해한다는 걸 아나요?

그럼요. 제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거예요. 남편과 아들이 제게 늘 든든한 힘이 돼줬어요. 늘 저한테 물었어요. “지금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지?” 보통 아이들은 엄마한테 뭔가 해달라고 그러는데. 아들은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면 됐다’고 늘 그랬어요.

멋쟁이.

멋쟁이죠. 사실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오래 일하다 보면 위축되거든요. 지원도 했지만 다 떨어졌고. 지원했다가 떨어졌을 때 보내주는 ‘쏘리 레터’의 멘트를 보면 늘 똑같아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지원했는데 나중에 현실을 좀 파악한 다음엔 아예 지원을 안 했거든요. 지원했다가 떨어지면 일주일 정도는 힘들어할 수밖에 없어서. 그런데 아들이 어깨를 펴주면서 기운 내라고 했어요. 가끔은 제가 아들을 키운 게 아니라 아들이 날 키운 거 같아요.

어떻게 하면 엄마와 아들이 그렇게 잘 지낼 수 있나요?

저희는 좀 친구 같아요. 자기도 힘들면 살짝 와서 아빠 자리에 누워요. “엄마 오늘은 나랑 자자” 그래요. 그러면 ‘얘가 오늘 힘들구나’ 그러죠. “엄마, 나랑 같이 산책 가줄 수 있어?” 그래서 같이 산책 가면 속상한 거 얘기하고.

무언가에 몰두하려면 가족의 정서적 지원이 꼭 필요한 것 같아요.

맞아요. 다른 것보다도 그냥 ‘파이팅’ 한마디 해주는 그런 지원. 심적인 지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사실 연구에 몰두를 못 하죠. 실험하다 보면 3박 4일씩 못 들어가는 건 허다하거든요. 그걸로 집에서 짜증을 내면 못 하죠. 그런데 3박 4일 안 들어가도 그냥 놔두니까. 밥은 먹었느냐고 가끔 문자 오는 정도. 대답이 없으면 바쁜가 보다 그러고. 남편이 애 태워갖고 와서 김밥이나 햄버거 올려주고 그러거든요. 속옷하고 챙겨서 올려다 주고. 두 남자의 지원이 없었으면 지금의 저도 없었어요.

두 남자의 지원을 받다니. 이제 보니 정말 운이 좋네요.

요즘은 일하는 젊은 사람들, 남자든 여자든, 아이나 가족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일을 좋아하면.

그건 아니에요. 가족은 중요해요. 아들과 여자 친구 문제도 상의하고 그러거든요.

흔히 일에만 몰두하는 게 더 능률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삶이 일의 에너지원이 된다는 말씀 같네요.

여자 친구한테 선물해주고 싶을 때는 엄마한테 동대문 시장에 같이 가자고 그래요. 옷 사러 안 가느냐고 은근히. 시장에 가면 이거 하나 사주면 안 되느냐고 은근히 물어요. 여자 친구한테 선물해주고 싶은 거죠. 지금도 종종 그런 얘기를 해요. 나 괜찮은 엄마였다고. 대개 엄마들이 짜증도 내고 화도 내는데 나는 한 번도 안 그랬다고. 저희 모자는 그냥 서로를 격려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남편분은 어떠세요? 교수님을 위해 희생하신 걸까요? 노력하신 걸까요?

저희 남편은 가끔씩 딸을 키운다고 하거든요. 자기는 딸 하나, 아들 하나라고. 그냥 팔자려니 한다고. 사실 저희가 선을 봐서 한 달 만에 결혼을 했어요. 처음 선을 보면 저녁 정도는 먹고 헤어지잖아요. 그런데 오렌지 주스 한 잔 딱 먹고 헤어졌어요.

별로여서?

헤어지면서 한다는 소리가 “뭔가 하고 싶은 일이 되게 많으신 것 같아서요”였어요. 자기는 동생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가봐야겠다고. 그러고 그냥 가는 거예요. 그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니, 지금 네가 나를 찼어? 내가 차는 상황까지 만들어서 차겠어.’ 그러곤 제가 전화해서 애프터 신청을 했어요.

멋진 여성인데요.

남편이 야구를 좋아해요. 한국 시리즈 맨 마지막 날 경기를 함께 봤어요. 암표까지 사서. 그날 내내 야구 얘기만 하다 끝났어요. 김밥 먹으면서. 그때 물어봤어요. 왜 애프터 신청을 안 하고 갔느냐고. 그랬더니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은 사람처럼 보였대요. 그런데 본인은 동생 둘하고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고. 게다가 자기는 종손이라고. 할머니까지 모셔야 한다고. 그렇게 어르신 두 분에 여동생 둘을 거느리고 가정을 꾸릴 사람을 찾는데, 저는 잠깐 얘기해봤지만 하고 싶은 일이 많아 보였다는 거죠. 이 사람은 마음에 들지만 놓아줘야 하는구나 싶었대요. 그런데 제가 낚아챈 거죠. 그때 본인이 느꼈대요. ‘내가 낚였구나.’ 그래서 이걸 팔자라고 생각한다고.

딸 하나 더 키우게 된 팔자.

그 얘기를 가끔씩 해요. 그러면서 그냥 운명적으로 자기는 이런 상황에 놓인 것 같다고. 그런데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제가 오히려 우울해하고 속상해하는 걸 보면 저보다 더 속상해해요. 아빠 같고 오빠 같고 친구 같은 그런 남자예요.

멋진 남자가 있을 수 있는 건 멋진 여자가 곁에 있어서이듯이, 멋진 여자가 있을 수 있는 것도 이렇게 멋진 남자가 있어서인 것 같네요.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이제부터는 내가 도와줄게”라고 하셨다면서요.

그게 하필 그때였네요. 시아버님이 식도암 발병하고 5년 넘게 지난 때였어요. 암은 5년이 지나면 완치로 보잖아요. 그때까진 간병을 열심히 했어요. 5년 정도 지나고 나서 공부를 해도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미국 학회 다녀온 다음에 남편한테 용기를 내서 결심을 얘기했던 거죠. 1년 반 공부한 다음엔 독성학으로 전공도 바꿨고. 막 연구에 몰두할 때였어요. 아직 날짜도 기억나요. 10월 2일. 아버님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한방병원에 계셔서 가봤는데 뭔가 이상하신 거죠. 그래도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오는데 다시 연락이 왔어요.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가셨죠.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가셨어요. 그때였어요. 치매가 다시 온 게. 이번엔 심각했어요. 제가 다시 간병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전 공부가 그야말로 피크에 달한 상태였고 멈출 수도 없었어요. 남편이 고민하다가 묻더라고요. 제가 다시 간병을 할 수 있겠느냐고요. 공부를 할지 간병을 할지 결정해야하는 순간이 온 거죠. 그때 제가….

지금도 감정이 복받치시네요.

그때 제가 정말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남편이 자기가 하겠다고, 전 공부하라고 그랬어요. 그 이후로 우리 집에서 5년을 모셨어요. 그런데 참 우리 식구가 기특하게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편이 휴직하고 저는 공부하고 살림도 빠듯하고, 아이 학교 성적도 그렇게 좋지 않고. 그러면 집이 시끄러워야 하는데 단 한 번도 안 그랬다는 거예요.

비결이 뭘까요?

모르겠어요. 각자 자기 역할이 다들 버거웠는데. 제가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 일요일 오전이었어요. 나머지는 실험실에서 일했고. 남편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일주일에 고작 4시간 남짓이었고. 작은 시누이가 와서 잠깐 아버님을 봐주는 시간. 그다음에 제가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일요일 오전뿐이고. 그런데 가족 모두가 그걸 딱 그대로 지킨 거죠. 신랑이 장 봐다 놓으면 저는 일요일 오전에 반찬하고 아버님 빨래를 한 다음에 다시 실험실에 가서 연구하고. 집도 학교 옆으로 이사했고. 모든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나갔어요. 그동안 한 번도 불화가 없었어요. 사실 지식창조대상 장관상을 받으러 갈 때 입고 간 옷이 아름다운가게에서 산 5500원짜리였어요. 저는 옷에 별로 신경 쓰는 스타일도 아니고. 돈 쓰는 거에 신경 쓰는 스타일도 아니라.

그래도 돈이 필요하잖아요. 비정규직 연구원의 월급이란 게 빤하니까.

그것도 운이 좋았어요.

또 운이 좋았다고요?

외환 위기 때였어요. 11평짜리 아파트가 하나 있었는데 전세를 놓고 있었거든요. 그걸 외환 위기 직전에 어쩌다가 팔았어요. 그런데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집값은 떨어지고 저희는 현금을 쥐고 있고. 그런 게 운이죠. 저도 열심히 살았거든요. 공부하기 전엔 아기 유치원 보낸 다음에 알바를 세 군데씩 뛰고. 그렇게 모은 현금으로 집값 떨어졌을 때 집을 샀어요. 그 집이 네 배인가 올랐나. 그래서 또 팔고. 아버님이 편찮으실 때도 그 돈으로 버텼어요.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고.

맞아요. 진짜 우리가 그랬어요. 살아보면 그래요.

그래도 막다른 길이다 싶은 순간이 있었나요? 실험할 때든 생활할 때든.

많죠. 제가 오죽했으면, 하느님이 왜 나한테 자꾸 이런 시련을 주시나 매일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뭔가 나를 써먹을 때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이렇게 생각하며 버텼어요. 아니면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히실 이유가 없으니까.

사실 생활이 우리를 잠식하잖아요.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어도. 실험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하지만 생활은 이어지고 있고 실험이 늘 잘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실험이 늘 잘되는 건 아니니까. 쥐로 실험을 하거든요. 손으로 쥐를 잡아놓고 하도 실험을 하다 보니까 손 신경이 눌린 거죠.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게 됐어요. 올 스톱. 숟가락조차 못 들고. 발가락까지 저린. 치료받느라 6개월을 쉬어야 했어요.

생활에 치이는데 연구도 못 하는 막다른 길이네요.

그때도 포기를 안 했어요. 이 시간은 나한테 쉬라고 주는 시간이니까 체력 보완을 하자고 생각했어요. 아파트에 한 달에 3만원만 내면 이용할 수 있는 헬스클럽이 있어요. 거기 가서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그동안 챙기지 못했던 아들도 살피고. 그동안 못 했던 일들을 하다 보니까 또 할 일이 많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계속 제 머릿속은 움직이고 있었고. 그때부터 어디 일할 데 없나 서류를 여기저기 넣었어요. 그때 국립암센터 선임 연구원 한 분이 어딘가에 한번 지원해보라고 추천해주셨어요. 그게 바로 대통령 포스닥 펠로십이었어요. 그런데 남은 날짜가 일주일밖에 없는 거예요. 아직 손가락이 다 움직이지도 않는데. 독수리 타법으로 지원서를 썼어요. 마감 5분 전에 겨우 낸 거 같아요. 그게 된 거죠. 사실 전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왜 모든 기회는 마감 임박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러니까요. 저희 남편도 똑같은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번에 경희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랬어요. 제가 원래 무급 연구 강사로 일하고 있었거든요. 무급 연구 강사여도 연구실에서 자리를 얻으려면 연구 기관의 인정을 받아야 해요. 그렇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이 5개월이나 있었나. 이 상황에서 무슨 기회가 있겠나 싶어서 매일 요리책 보고 그랬어요. 저희 남편이 괴로워했죠. 맨날 이상한 요리를 먹으라고 하니까. 그런데 막다른 골목에서 지난 11월에 시상식이 있었어요. 그러곤 <중앙일보> 인터뷰가 나갔고. 처음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인터뷰냐고 그랬는데. 이번에도 기회가 맨 마지막에 온 거죠.

<중앙일보> 인터뷰가 나가고 한 달도 안 돼서 경희대에서 정교수로 일할 수 있게 된 거죠?

경희대에서 제안을 받은 건 인터뷰가 나가기 전이었어요. 시상식장에 경희대 정서영 부총장이 계셨거든요. 사실 2015년도에도 같은 상을 받았어요. 그때마다 이런 상황이 있었어요. 한번 지원해보라고. 그때는 뭣 모르고 또 했어요. 근데 아무것도 안 됐거든요. 이번에도 또 이러니까 그냥 형식적인 거고, 뭐 이제는 5개월밖에 안 남았으니까 다 포기한 상황이었거든요. 왜 마음에서 내려놓으면 뭐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서류를 내보라고 해도 저는 꿈쩍도 안 했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부총장님은 그다음 날부터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거죠. <중앙일보>에서 그다음 날 인터뷰를 요청했고, 토요일에 기사가 나갔어요. 인터뷰하고 간 게 12시 좀 넘어서였고 제가 경희대 전화를 받은 게 2시인가 그랬어요. 그날 6시에 만나니까 모든 게 다 결정이 난 상황이었어요. 이미 여기서는 총장님 보고까지 끝나고 제가 수락만 하면 되는 단계였고. 속으로 비정년 트랙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비정규직이거든요. 3년만 해줘도 좋다. 근데 그다음 날 기사가 터지면서 그날부터 다 말씀은 못 드리지만 오퍼가 엄청나게 왔어요. 여기 와 있는 동안에도 왔어요. 아주 높으신 분들까지 다 움직이셨어요.

세상에나.

저도 놀랐던 게 어제와 비교해 오늘 제 논문 숫자가 바뀐 것도 아니고, 제가 바뀐 것도 아닌데 어제와 오늘이 너무 다른 거예요.

그 전과 후의 차이가 뭘까요? 그 이전에 교수님에 대한 평가가 낮고 기회도 적었던 이유가 뭘까요? 연구 성과가 이렇게나 좋은데.

아니죠. 연구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나이가 있어요. 저희는 대통령 포스닥 펠로십을 줄여서 ‘대포’라고 하거든요. 대포 1기 동기들이 다 얘기해줬어요. 누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 어때?”라고 얘기한대요. 그럼 제일 막내 교수한테 물어봐요. 그 막내 교수가 나이가 많아서 힘들 것 같다고 하면 끝인거죠. 시작도 못 하는거죠. 첫 번째는 나이였고, 두 번째는 고집스럽다는 이미지. 면역학에서 독성학으로 옮기면서 고집스럽게 자기 연구하는 친구들을 연구실들이 진짜 싫어해요. 자기 고집 있다고. 정말 정말 싫어해요. 무조건 융화가 중요해요. 하지만 제가 고집스럽게 제 연구를 해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실적이 어떻게 나왔겠어요. 저는 연구자인데 고집을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한국의 연구 풍토가 집념을 고집이라고 폄훼하는군요.

저는 연구비를 오직 제 연구를 위해서만 썼거든요. 연구 재단에서는 너희는 모든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있으니까 제대로 해야 한다고 해서 개인적인 것에는 한 푼도 안 썼어요. 나중에 욕먹을까 봐. 트집 잡힐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사실 전 연구 책임자였기 때문에 연구 책임자급으로 출장비가 나와요. 그걸 전부 다 절약해서 기계 하나 더 샀어요. 욕먹을 짓 절대 안 하고. 남들이 볼 때는 갑갑하고 고집스러운 인간이겠죠.

그래서 외톨이가 되는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래도 저는 그렇게 해야 됐어요. 이번에 여기 올 때도 그냥 하던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3년. 왜 3년이냐면 제가 담배 연구를 하고 있었거든요. 담배에서 막 재미가 오르고 있는데 연구비가 없어서 스톱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이것만 좀 풀고 싶었거든요.

여자한텐 기회가 안 와요. 맨 뒤에 있어요. 제가 독성학으로 옮기고 나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면, ‘저 사람은 하다가 힘들면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이었어요.

나이, 전공 특성, 연구 풍토와의 충돌. 또 여성이라는 것도 있었나요?

여성, 많죠. 거기다 나이 든 여성이잖아요. 여자한텐 기회가 안 와요. 맨 뒤에 있어요. 윗분들이 보실 때 육아 같은 일에서는 여자들이 먼저 나가거든요. 통계적으로 그냥 그렇거든요. 아기가 아파도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먼저 달려가잖아요. 제가 독성학으로 옮기고 나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면, ‘저 사람은 하다가 힘들면 나갈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이었어요. 나이 든 아줌마에 대한 시각이 그거였어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중요한 일을 안 맡겨요. 첫 번째는 남자한테 중요한 걸 맡기고. 게다가 나이 든 여성은 이상하게 전적으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거죠.

한국 사회는 그렇게 여성을 단정 지어버리는군요.

지금은 저희 학생들 수업료를 지원해주지만 예전엔 수업료 지원 없이 한 달에 30만원 받는 게 다였거든요. 그건 진짜 한 달 점심값도 안 됐어요. 제 지도 교수님의 원래 전공이 환경 독성이었어요. 저한텐 인건비 30만 원 나온 거 맡겨두시고 중요한 일들은 거의 약대 출신 학생들 데리고 일하셨거든요. 약대를 막 졸업하고 왔는데도 60만원씩 주고 저는 30만원씩 주는 상황이었어요. 그들은 키울 사람이라는 거죠. 그걸 벗어나는 데만 한 2년 걸렸어요.

2년.

실험하다 보면 정말 머리카락이 다 녹아내려요. 그렇게 독한 걸 흡입하면서 밤새도록 일했어요. 대기 상황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잖아요. 먼지 받은 대기에 중금속이 얼마나 있는지 분석하려면 가급적 짧은 시간 안에 2000개를 추출해야 돼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대기 상황이 바뀌기 때문에 영향이 많아져서 데이터가 흔들려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끝내려고 3일 밤을 그냥 새워버리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에 이걸 다 들이마시게 돼요. 머리니 피부니 다 망가져요. 손도 화상 입어서 다 뒤집어지고. 뜨겁고 녹고. 200도씩 막 끓여서 뚜껑 열고 물 부으면서 다시 녹이고 해야 되니까. 그걸 하고 나면 정말 호흡기니 뭐니 다 망가져요. 우유를 정말 많이 마셔요. 중화시키려고. 저는 그걸 다 했어요. 인정받아야 제가 하고 싶은 연구에 지원을 더 받으니까. 재료비든 뭐든 조금 더 충당하기 위해서라도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었죠.

아이가 아플 때도 여자가 먼저 달려간다. 그건 여자가 먼저 달려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 때문이잖아요.

그래서 여자들한텐 사회적 환경과 제도가 너무 중요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지금까지는 사실 이런 풍토, 정책이 없었잖아요. 비정규직 여성에게 일자리를 주자는 정책적 배경이 없었어요. 지금은 경력 단절 여성을 어떻게든 살려내자는 정책적 합의가 있잖아요. 그래서 제 이야기가 기사화될 수 있었던 거고. 똑같은 상황이 3년 전부터 지속됐는데 왜 3년 만에 이렇게 됐을까 생각해보니까 이런 사회적 흐름이 있으니까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억울한 게 한두 가지였겠어요. 저하고 딱 맞아서 지원했는데 떨어지고. 나노 독성 분야에서 한국에서는 저랑 경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건 저도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어떤 교수님은 저한테 전화해서 이번에 누구 돼야 하니까 지원하지 말란 소리까지 하셨어요. 그런 전화를 몇 번씩 받았어요. 그러면 속상하죠. 그 전화 받고 안 속상할 인간이 어디 있어요.사람을 좌절시키는 건 언제나 사람이네요.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어차피 저는 어떤 자리에 가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연구를 오래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한 건데. 저희 남편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는 연구실에 자리가 없으면 지방이라도 갔거든요. 원룸 하나 얻어서. 충북 청주에도 갔어요. 그때 남편이 짐 옮겨주고 제가 박혀서 실험하면 그러려니 하고 지켜봐줬어요. 한번은 저한테 재료비 하라고 120만원을 보냈어요. 우리가 못 먹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거 한번은 해보라면서. 집 안 현금을 다 턴 게 120만원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들이 다 지나가더라고요.

사회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게 남자일 수도 있고, 젊은 사람일 수도 있고, 명문대 나와서 인맥이 잘 쌓인 사람일 수도 있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그런 유리함을 유지·관리하느라 정작 연구할 시간이 없어요. 사실 그게 없으면 연구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오히려 그래서 성과가 나오는데. 반면에 그런 사람들은 갈 데가 없네요.

이 연구라는 걸 다들 이상하게만 봐요. 어떤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3년 지나도 교수 안 되면 그 연구 다 휴지 조각 되는 거 아시죠?” 이런 얘기. 여기 교수로 결정되고 나서도 들었던 게, 연구 잘한다고 교수 되면 교수 못 될 사람 없다고. 저 이미 내정된 상태였는데 말 안 했어요. 그냥 알겠다고 했어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풍토예요.

교수님이 가진 연구자로서의 강점이 뭘까요?

다양한 경험? 저는 경력 단절이 됐다가 집에서 생활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쌓은 경험인 것 같아요. 경력 단절 후 다시 일하거나 공부하고 싶어 하시는 여성분들에게 결코 단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20대 초반에 바로 공부를 했다면 이런 걸 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어요.

틀에서 벗어난 사고를 할 수 있는 거죠.

저는 이미 많은 경험을 했잖아요.

그 경험에서 질문을 찾은 거네요.

맞아요. 그 속에서 질문이 나오는 거죠. 제 인생에서 질문이 나오는 것 같아요.

연구자로서 연구실만 경험했다면 질문할 수 없는 것들.

그렇죠. 그리고 제가 하는 게 독성학이잖아요. 생활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가장 좋은 게 여자로서 엄마로서 내 아이 챙기고 내 가족 챙기는 거. 이게 우리 애한테 나쁘면 어쩌지. 그런 것들이 다 현재의 질문으로 이어지잖아요. 저는 그런 경험이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말하는 단절이 교수님한테는 단절만은 아니었네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꾸 단절을 강조하거든요. 제가 어떤 방송에서 그랬어요. 그때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열심히 살면 되고 연구자일 때는 연구자로서 열심히 살면 된다고 간단히 말씀드렸지만, 사실 그게 그 뜻이었어요. 지금 단절된다고 해서 두려워할 게 없다는. 사실 저도 두려웠죠. 그러니까 엄마한테 짜증도 내고 애 좀 봐달라고 징징대고. 사실 그 이후에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이만큼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10년이란 시간이 버려진 시간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관심이 이렇게 갈 수밖에 없었나 봐요. 면역학에서 독성학으로 넘어오고 한 게 제 백그라운드에서 이런 데 궁금증이 생겼고 그 과정이 궁금증을 풀기 위한 과정이었어요.

삶이 있어서 질문이 가능한 거죠.

맞아요. 여자로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제가 독성학을 택한 거고. 대학교 때도 저는 보건학을 해서 미세 먼지, 환경 독성 공부를 다 했고. 제 저변에 깔려 있던 모든 것에서 질문이 나오는 거죠. 그건 누구도 못 하잖아요. 암하고 치매하고 이런 걸 엮고 ‘이게 왜 이렇게 됐지’ 하면서, 궁금증을 풀어갈 수 있었던 원천은 시아버님이 식도암에 치매를 앓으신 거였어요. 저희 아버님 삶이 자동차 운전이었고 담배를 피웠고 이런 거거든요. ‘가족력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아버님이 이러셨을 거야. 이게 원인이었을까’ 그걸 찾는 거예요. ‘기름차 운전하는 분들이 제대로 식사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친 것이 식도암의 원인이 됐을 거고. 기름차 운전하면서 계속해서 디젤이나 이런 걸 흡입하셨을 거고. 그럼 그게 치매의 원인이 됐을까. 그게 암으로 갔을까. 암의 원인을 제어했을 때 치매 유전자가 갑자기 발현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저는 삶 속에 그 원인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희 엄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경험을 통해 그분들의 삶을 보는 거죠. 나는 이러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들. 이런 게 전부 다 원천이죠.

인생의 불행을 질문으로 바꾸고 질문의 답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찾네요.

그렇게 멋있는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저는 끊임없이 그래요.

보통은 보이는 데서만 원인을 찾거든요. 불행의 원인일수록.

긍정적인 성격도 원래 타고났나요? 낙천적인 거.

쉽게 포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어렸을 때 진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컸거든요. 그리고 아버지가 사업 실패도 되게 많이 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전학도 많이 하고. 옛날엔 건강기록부라는 게 있었어요. 전학을 많이 하니까 칸이 모자라서 만들어 쓸 정도였고. 그럼에도 공부가 어렵다든지 못할 거라든지 제 미래가 어둡다든지, 그렇게 절망하는 일은 없었어요. 그냥 엄마가 되게 많이 사랑해주셨어요. 엄마의 사랑을 먹고 커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풀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일이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 더 나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또 이상하게 다 도와주셨어요. 중학교 때도 진짜 돈이 없었는데 우연찮게 담임선생님이 장학금을 주선해주셔서 그걸로 공부했고 고등학교 때도 어떻게 다녔고. 대학도 과 수석 되면서 다녔고. 그냥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어요. 저도 그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해요.

노벨 생리의학상을 생각한다고 하셨는데, 엄청난 목표잖아요. 지금 말씀 나눠보니까 과장되게 말씀하실 분은 아니라.

남편한테 좀 화날 때가 있잖아요.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냐, 오라는 데도 없는데 뭘 그렇게 죽기 살기로 하냐’ 신랑이 매일 그러거든요. 그럼 저는 그래요. ‘나중에 보자. 노벨상 받아서 내가 다 갚는다.’ 큰소리를 쳐요. 뭔 배짱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어요. 내일 그만둘 수도 있는데.

그렇지만 목표는 노벨상.

저는 운이 좋아요. 그냥 흘러왔거든요. 뭘 해야겠다고, 뭐가 되겠다고 악착같이 산 게 아니라 그냥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저는 정말 공부가 너무 좋았어요. 저희 남편이 공부시킨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공부하기 전에는 진짜 잠이 많았어요. 하루에 뭐 10시간도 자고 11시간도 자고 그랬거든요. 대학 때는 최고 많이 47시간까지 자봤어요. 그런데 그렇게 잠을 자던 사람이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잠을 안 자요. 잠이 안 와요. 정말 신기해요. 정말 3박 4일 동안 단 1분도 안 자고 그 실험을 다 해요. 그러고 나중에는 사람들한테 인사도 하고 웃어야 되는데 안면이 다 굳어서 그걸 못 해요. 3박 4일 동안 쥐를 잡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앞에서 샘플링하고 그러면 나중에는 안면 조절이 안 돼요. 근데 그러고도 잠깐 자고 일어나면 또 멀쩡해져요. 그러면 또 일 시작해요, 저녁에. 누가 시켜서는 절대 이렇게 못 해요. 진짜 저는 이게 너무너무 좋고, 이거 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냥 머릿속에서 뭐가 막 움직여요. 어떨 때는 ‘나 미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요. 근데 너무 좋아요.

듀오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교수님께는 정말 여쭤보고 싶은 질문이네요. 행복하세요?

걸어 다녀도 날아가는 것 같아요. 제가 방송에 나가서 그랬을 거예요. 저도 모르게 떠들고 있더라고요. 사실 저는 정말 스웨덴에 노벨상 받으러 가고 싶었어요. 노벨상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저 사람은 연구를 잘하는 사람. 저는 노벨상에 그렇게 의미를 부여했어요. 노벨상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정말 뭔가 사회나 국민에게 역할을 하는 사람. 그거에 대한 표창장, 보상 이런 게 아닐까. 진짜 내가 밤새우고 뭐 하고 해서 얻은 결과가 내 아이를 지키고 옆 사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고, 그걸로 내가 상을 받으러 간다면 정말 좋은 거 아닌가. 과학자라는 게 내재된 희생정신이 없으면 못 하거든요.

희생정신요?

나노 독성 물질에는 연구자가 제일 많이 노출돼요. 은나노 실험할 때도 제가 제일 많이 노출됐어요. 저는 코피도 나고 그랬거든요. 왜냐하면 계속 흡입을 하니까. 근데 어차피 저는 그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고, 이게 좋아서 하는 거고. 목적도 그냥 내 아이 지키기 위해서니까. 아이를 지키려면 똑똑해져야 하니까. 그리고 이런 결과물을 갖고 누군가한테 도움을 준다면야 논문 하나 쓰는 건 별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논문은 많은 사람들한테 알릴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거지, 논문을 쓰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거든요. 사람들한테 알리려면 공식적으로 인정받아야 되니까 쓰는 거예요. 그런데 이젠 머릿속에 있는 걸 다 풀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어요. 정교수니까. 아무도 안 건드리잖아요. 65세 정년이 기본이니까 13년은 더 갈 수 있다고요. 3년이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13년이라니. 데이터 보면서 여유 가질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데요. 지금 꿈꿀 수 있는 이 상황이 말도 못 하게 행복해요. 미래를 생각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길어진 거. 사실 제 건강을 위해서는 지금 멈추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어차피 저는 이 길을 가기로 한 사람이잖아요. 저희 아이한테도 그런 얘기를 가끔씩 해요. ‘엄마는 이 길을 가기로 한 사람이고, 아마도 이런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너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된다.’ 그리고 저한테 학생들이 들어와요. 그러면 제가 갈고 닦은 것을 누군가한테 전수하면서 그 아이들한테 궁금증을 만들어줄 수 있어요. 이제는 저 혼자가 아니라 저와 함께하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잖아요. 이런 상황이 만들어졌는데, 장난 아니죠. 행복하죠.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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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김 참
출처
3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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