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서울 하늘이 갑자기 흐렸던 날 예은을 만났다. 예은의 또 다른 이름, 핫펠트의 새 앨범 준비가 한창이던 오후였다.

예은, 핫펠트 - 에스콰이어

핫펠트의 새 노래, 올가을 공개 예정이죠? 가사를 미리 봤어요.

여기는 영어 제목으로 ‘Book About Me’라고 쓰여 있는데 한글 제목은 ‘나란 책’이에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해주고 싶은 제 얘기예요.

정말 벽 하나가 무너진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안 숨길 작정이에요?

요즘 그게 심해지는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너무 장벽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요. 누가 찌르면 다 나오거든요. 입을 꿰매야 하나? 그래서 지금 되게 긴장돼요. 막 다 얘기할까 봐.

열 두살, 열다섯 살에 느낀 분노가 있었어요?

원래 가사는 더 솔직했어요. 분노라는 감정을 배우는 시점이 다 다를 것 같은데, 열두 살은 부모님이 이혼하셨을 때예요. 처음 그런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열다섯 살 때는?

그때는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깨달았어요.

예은, 핫펠트 - 에스콰이어

흰색 티셔츠 발렌시아가(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청바지 포사.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감추고 싶은 얘기일 수도 있어요.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실 그렇죠. 누굴 되게 좋아할 때 쓴 가사예요. 그런데 이런 얘기를 전혀 못 했어요. 제가 되게 쿨한 척하는 병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얘기도 웃으면서 하고 숨기지를 못해요. 상대가 봤을 때는 이상한 거죠. ‘쟤는 저런 얘기를 웃으면서 하네?’ 그러면서. 그렇다고 울면서 할 수도 없잖아요?

언제 쓴 가사예요?

몇 달 전. 요즘은 혼자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해요. 영화도 음악도 내가 어떤 걸 진짜 좋아하는지 알아가고 있어요.

핫펠트도 그런 과정이었죠? 첫 앨범을 들었을 때 제가 느낀 건 ‘아, 이 음악으로 큰 인기는 못 끌겠다’는 거였어요.

하하. 정확하신대요?

다만 예은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벗어나려고. 그때 안무가 거의 현대무용이었죠? 예술로 출구를 찾고 싶을 때 가장 극단적인 출구가 저는 현대무용이라고 생각해요. 직접적이고. 그냥 몸으로 하는 거니까. 그때 그렇게 절박했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누구 말을 아예 안 들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했어요. 성적이 안 나온 건 아쉽지만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

아이돌 그룹으로 산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죠. 일단 자기를 포기해야 하고 그 자체를 즐겨야 되는 일이잖아요? 자아가 강하거나 자아로 승부하고 싶은 사람한테 아이돌로 사는 건 참 힘들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걸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10년 동안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어요. 많은 사람들한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었죠. 그런데 스스로는 만족하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핫펠트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도 그랬어요. 성적에 관계없이 좋은 음악을 하려는 아티스트가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아이돌이니까 멜론 1위를 해야 하고, <인기가요>에서 1등을 해야 하고, 앨범을 얼마 팔아야 한다는 기준치가 있는 거예요. 연애도 그렇죠. 저는 진짜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감춰야 하는 거죠. 얼굴에 대해서도 그래요. 흠이 있으면 고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거나 주름이 생기면 펴야 하고 그런 것도 답답했어요. 음악을 하면서 버텼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음악이 출구였어요.

앨범에는 ‘나란 책’과 ‘새 신발’, 두 곡을 수록할 예정인가요?

‘새 신발’은 개코 오빠가 쓴 곡이에요. 새로운 시작에 대한 얘기. ‘나란 책’이 과거에 대한 얘기라면 ‘새 신발’은 미래에 대한 얘기죠. 아직 어떤 곡을 넣을지는 모르지만 ‘피어싱’이라는 곡도 있어요. 끝내야 하는 시점인 걸 알면서도 못 끝내는 연애에 대한 얘기예요. ‘새틀라이트’라는 곡은 제 꿈에 대한 얘기예요. 옥상에서 별을 보다가 위성 하나가 지나가는 걸 봤어요. 하늘에 별이 정말 많았는데, 위성이 깜빡이는 별처럼 보이지만 별이 아니잖아요? 제가 가짜 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도 내 길을 간다는 노래. 어떤 곡이 들어갈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웰컴 투 다크 사이드’라고 썼어요?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앨범에 쓸거라서.

정말?

에이, 별거는 아니고. 어떻게 보면 제가 되게 양지에 있었잖아요? 제가 해 지는 시간을 되게 좋아해요. 아이돌로서의 저는 좀, 강아지의 이미지였던 것 같아요. 항상 밝고 늘 곁에 있어주는 느낌. 그런데 이제는 제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입장이 됐죠. 늑대가 되어가는 입장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개와 늑대의 시간에 대해 앨범을 만들려고 해서, 그거에 대해 생각하느라 적어놓은 거예요.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 가는 해 질 녘. 제가 그런 시기에 있지 않나 생각하는 거예요. 뭔가 어두워지는 시기가 왔을 때도 나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가 없는, 안 들어 있는 음악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지난 앨범보다 조금 어두워졌나요?

이번엔 조금 더 알앤비 성향이 있어요. 더 말랑말랑할 것 같아요.

예은, 핫펠트 - 에스콰이어

예은 씨는 솔직하고 일관된 사람이에요. 그게 인터뷰에 다 드러나요. 2008년 8월에 한 인터뷰에서 “원더걸스의 끝은 어디인가요? <가요무대>까지 갈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해요?

글쎄요?

“해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중략) 기회가 된다면 내 색깔이 담긴 앨범을 내고 싶어요”라고. 그리고 “연기와 다른 것들은 생각해본 적 없어요”라고. 사람이 안 변한다는 건 의지라고 생각해요. 예은 씨는 그때부터 핫펠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소름! 그때 ‘SoHot’ 때였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는 확신, 기분 좀 좋지 않아요?

정말 좋아요. 신기해요.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이런 얘기가 나오죠. “저는 서른 살쯤 (결혼)할 생각이니 앞으로 5년 정도 남았네요.”

하하하. 그건 못 지킬 것 같아요. 당시의 꿈은 딱 서른에 결혼하는 거였어요. 서른까지만 활동하고 결혼해서 CCM 가수로 활동하는 게 꿈이었는데, 살다 보니 서른이 너무 빨리 와서요. 그 당시에는 서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을 다 이룰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직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어요. 일단은 핫펠트로서의 커리어를 쌓고 싶어요. 저보다 오래 살 수 있는 음악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목표예요. 만약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그때 다른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은, 핫펠트 - 에스콰이어

왜 아메바컬쳐를 선택했어요?

제가 개코 오빠랑 컬래버레이션을 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았거든요. 인간으로서나 뮤지션으로서도. 그때부터 계속 잘 지내다가, 언젠가부터 아메바컬쳐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다이나믹 듀오 두 분은 래퍼, 뮤지션을 넘어서 그냥 예술가예요. 지금이 아메바 소속 첫 인터뷰예요.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예요. 원더걸스 미국 활동할 때랑 비슷해요.

고생이 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멤버들은 정말 좋았다고, 유학 간 느낌이었다고 들었어요.

고생이긴 했죠. 마음이 외로운 일이었고, 언어도 안 되는 상태에서 갔으니까요. 그런데 그 나이에 그 세계를 봤다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으니까요. 그때 그 시간을 뉴욕에서 보낼 수 있어서.

아프리카를 좋아한다고 했죠? 뉴욕과 아프리카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의 정서는 어떤 거죠?

자유. 뉴욕에서는 제가 정말 자유로웠어요. 길에서 춤도 추고, 비 오는 날 이어폰 꽂고 걷고. 한국에서는 그렇게 못 하잖아요? 그런 자유. 아프리카는 정말 대자연이에요. 되게 다른 종류의 자유예요. 거긴 모든 게 너무 느렸어요. 밥을 두 시간 동안 짓거든요. 그러면 진수성찬이 나올 것 같잖아요? 아니에요. 그냥 죽이랑 고기예요. 그럼에도 되게 좋았어요. 우리는 다 쫓기고 사니까.

예은, 핫펠트 - 에스콰이어

혼자 있을 때는 그래도 자유롭지 않아요?

아니요, 제일 힘들죠. 저 스스로 가장 괴롭히는 시간이죠. 그렇지 않나요? 계속 저에 대해서 분석을 하는 거예요. 제 상황이나 있었던 일이라거나 앞으로의 일이라거나. 나만 그래?

불안해지면 어떻게 하나요?

어떨 때는 해온 음악에 대해 자부심이 있다가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무너지고 그래요. 내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이 왔다 갔다 해요. 하지만 요즘은 그냥 각자 잘하는 게 다른 거니까. 세상에 똑같은 목소리는 없다고 하잖아요? 내 목소리는 나한테만 있는 거니까.

누가 예은 씨를 좌절시키죠?

저 스스로가 가장 저를 좌절시키지 않을까요? 누가 아무리 날카롭게 비판해도 제가 더 심해요.

가장 최근의 괴로움은 뭐였어요?

오늘 아침에 운전하다가 벽을 박았어요. 제가 남의 차는 안 박는데 자꾸 혼자 그래요. 그런데 괜찮아요. 차는 막 굴리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슨 차 타요?

머스탱이에요.

지붕 열리는 거?

열려요.

배기량 큰 거, 작은 거?

큰 거요. 그거 탄다고 하면 다들 웃어요.

왜요? 멋진데?

기름도 많이 먹는데, 뭔가 여자 차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다들.

유턴할 때 가속페달 꾹 밟으면 신나지 않아요?

그냥 직진만 해도 신나요. 저는 위험한 짓은 안 해요. 요즘은 오토바이를 살까 생각 중이에요. 원래는 정말 싫어했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싫어했어요. 그런데 제가 저를 스스로 가뒀던 부분에 대해서 좀 열어보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스쿠터 정도일 것 같아요. 아마 다음 달 정도? 베스파 정도?

제 속이 다 시원하네요. 빗장이 하나씩 풀리고 있는 거죠.

타투도 시작했어요, 작년에. 여기 이건 자두예요. 그런데 아무도 자두인 줄 몰라요.

왜 자두를 했어요?

하하하. 제가 한번 여쭤볼까요? 저 지금 질문 하나 해도 돼요?

그럼요.

포도, 사과, 레몬, 배가 있어요. 그중에서 한 과일을 고르자면 저는 뭘까요? 저랑 어울리는 과일을 하나 골라주세요.

포도요.

일단 되게 감사하고요. 이게 진짜 재미있는 테스트예요. 사과는 친구 같은 사람, 레몬은 이상형, 배는 꼴도 보기 싫은 사람. 포도는 섹시한 사람이래요.

저도 되게 솔직한 사람이에요.

이 테스트를 누군가한테 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저한테 자두라고 그랬어요. 그게 되게 오래 남았어요. ‘나란 책’ 가사의 주인공이었어요.

왜 자두라고 했을까요?

그냥 자두가 생각났대요. 생각해봤는데요, 자두가 사람들이 딱 좋아하는 과일은 아니잖아요? 메인 과일도 아니고. 하지만 먹으면 되게 맛있잖아요.

그래서 바로 자두 문신을 했어요?

네. 그리고 여기도, 여기도, 여기도 있어요. 목뒤에는 나비가 있어요. 철로 된 나비. ‘아이언 걸’이라는 곡에서 ‘번데기 안의 나비’라는 가사에 철을 입힌 거예요. 여기는 총이 있어요. ‘본드’라는 곡에서 나온 소재죠. 007의 7을 총으로 했어요. 여기는, 혹시 해리포터 좋아하세요? 거기 나오는 그리핀도르의 검이에요. 용기 있는 자만이 그 칼을 뽑을 수 있거든요.

예은 씨한테 섹시하다는 건 뭐예요?

계속 보고 싶은 것. 더 알고 싶은 것.

그럼 어떤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는 배우 문소리 선배님. 이번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너무 멋있었어요. 한국에서 여자 배우가 감독으로서 자기 얘기를 풀어낸다는 것, 그걸 해내셨다는 게 멋져요. 자기 얘기를 가감 없이. 남자는 생각나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우원재? 그분도 사람들이 ‘쟨 뭐 저런 얘기를 하나’ 싶은 엄마, 알약 막 그런 솔직한 얘기로 공감을 끌어내니까. 멋있어요.

예은 씨보다 오래가는 곡을 만들고 싶다고 했죠? 목소리로는 어떤 경지까지 가고 싶어요?

두 가지인 것 같아요. 제가 전인권 선생님이랑 가까운데요,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그 나이까지 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축복일 것 같아요. 쉬운 일은 아니겠죠. 할 수 있다면 해외 활동도 많이 하고 싶어요. 계속 투어 다니고 공연 다니고 싶어요.

지금 예은 씨를 가장 두렵게 하는 건 뭔가요?

지금 두려운 건 나이를 먹는 거예요. 서른에 다가가고 있잖아요? 음악이라는 분야 자체가 어리고 때가 덜 탔을 때만 나올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요. 젊음이 갖는 독창성이나 그런 것들이 퇴색될까 봐 두려워요. 제가 하는 것들이 점점 뻔해질까 봐. 요즘은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됐어요.

역시,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는 거죠?

그런 것 같아요. 맞아요.

가난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없어요. 저는 비싼 걸 안 좋아해요. 하지만 제가 팬시하고 럭셔리한 삶을 살지 않으면 사람들은 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서 산다는 게, 저는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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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 YOON SONGYI
헤어 박 희승
메이크업 서 아름
스타일링 이 하나
출처
24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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