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의 언어 ‘서화’

말없이 말하다.

‘백악춘효’는 현재의 북악산인 백악의 봄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춘효’는 간밤에 봄비가 온 줄도 모르고 자버린 일을 후회하는 당나라 맹호연의 시 구절에서 차용한 것이고요.”

국립중앙박물관 김승익 학예연구사가 심전 안중식의 그림 ‘백악춘효’를 소개했다. 안중식은 근대 서화의 거장으로 꼽힌다. 6월 2일까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의 중심인물이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그리고 그해 서거해 올해 100주기를 맞은 안중식을 기리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 100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공통점 외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을까. 김승익 학예연구사가 이어 말했다. “대한제국기 고종 연간에 궁중 화가였던 안중식은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등 현대 한국화의 대가들을 가르친 인물입니다. 전통과 현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지요. 3·1운동을 기념하면서 대부분 독립운동이나 독립운동가를 떠올리지만 1919년은 한국 문화·예술에서도 중요한 한 해입니다. 안중식이 서거한 뒤 그의 제자들이 다음 세대 화단의 주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떠나면 뒤이어 누군가 또 자리를 채우는 게 어디 특별한 일일까. 그러나 그 일이 1900년대라면 귀중해진다.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수치,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우리는 국권을 빼앗겼다.

 

백악춘효 白岳春曉(여름), 1915년

안중식(安中植, 1861~1919), 비단에 엷은 색, 129.5×50.0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록문화재 485호

‘백악춘효’는 경술국치 5년 후 안중식이 그린 그림이다. 그해는 일제가 산업 박람회 격인 조선물산공진회를 명분으로 경복궁을 훼손하기 시작한 때다. 4000여 칸에 이르던 궁 대부분이 헐리고 서양식 임시 진열관이 들어섰다. 비분강개. 안중식은 붓을 들었다. 일찍이 중국 톈진과 일본 교토에서 유학한 데다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의 제자였던 안중식은 전통과 근대의 화법을 오묘하게 섞어 구사해냈다. ‘백악춘효’ 역시 전통 산수의 근대적 변모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힌다. 완벽하지는 않으나 서양식 원근법과 같은 시점의 변화가 보이고, 대상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처리되어 현실감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감이 있다’는 다른 문장으로 치환해야 할 듯하다. ‘현실을 벗어나 현실을 그리다’라고. ‘백악춘효’는 일제가 경복궁을 망가뜨리자 온전하고 굳건하던 옛 모습을 추억한 그림이다. 여름날 풍경을 그린 그림에는(가을 풍경을 그린 ‘백악춘효’도 있다) 관악산 줄기 아래 경복궁과 광화문이 울창하다. 푸르던 경복궁의 모습이 선명하다. 그런데 어딘가 정적이다. 거리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구중궁궐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나라 잃은 소리 없는 애달픔일까. 안중식은 그림으로 말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그리고 일제 치하로 시대가 요동치는 사이 그는 전통 화법에 자신이 배운 근대 화법을 더해 후학을 양성했다. 나라를 넘어 문화까지 억압하려 했던 일제강점기에 그가 버티고 지킨 화단은 우리의 다음 세대를 오롯이 키워냈다. 봄 새벽을 깨우는 근대 서화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승일반송도 昇日蟠松圖, 1888년

강진희(姜璡熙, 1851~1919), 종이에 엷은 색, 91.0×60.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1981년 이홍근 기증)

조선 26대 왕, 대한제국 1대 황제. 고종의 실과 과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지만 자주외교를 구축하려 했던 움직임은 분명히 남아 있다. 여기, 청운 강진희의 그림도 그중 하나다. 강진희는 1887년 초대 주미전권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에 부임할 때 통역관으로 동행해 그를 수행했다. 미국 정치 잡지 <하퍼스 위클리>는 당시 공사 일행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우아하고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불렸다.” 글과 그림에도 능통했던 강진희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부터 역사가 될 일상을 기록했다. 서양의 종이에 동양의 먹과 붓으로 그린 ‘승일반송도’ 역시 당시 기록 중 하나다. 구한말 조선인이 미국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앞선 시기의 그림 중 하나로 꼽히는 ‘승일반송도’는 특히 고종의 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한 메시지였다. 왕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해,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와 영지, 구름이 우아하고 고고하다. 특히 소나무는 고종이 어릴 적 타고 놀던 운현궁의 정이품 대부송과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주군을 그리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공사 일행은 청나라의 방해로 2년 만에 강제 귀국당하며 대한제국 자주외교의 꿈을 다시 속에 품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강진희는 이후 안중식과 함께 서화미술회에서 글씨와 전통 화법을 가르치며 곧은 절개를 기록하는 법을 전했다. 그리고 2019년 5월 22일, 재개관 1주년을 맞는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공사관 옛 청사에 강진희의 그림이 전시될 예정이다.

 

 

석란도 石蘭圖, 1920년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종이에 먹, 140.0×37.4cm, 개인 소장

우당 이회영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유승을 비롯해 위로 10대가 사대부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현재 명동 일대 대부분이 그 집 땅이었다. 유복했던 그의 인생은 경술국치일을 계기로 완전히 바뀐다. 일가족 50여 명이 전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넘어간 것이다. 당시 재산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약 600억원. 가늠하기 힘든 돈을 가지고 이회영 일가는 왜 만주로 갔을까. 이회영을 찾아보면 ‘화가’라는 수식어보다 더 먼저, 더 자주 보이는 표현이 바로 ‘독립운동’이다. 이회영 일가는 전례 없이 모두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독립군 지도자 양성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를 키워냈다. 만주의 겨울바람만큼 곤혹스러웠을 독립운동 생활에 재산은 금세 동났고, 이에 이회영은 묵묵히 난을 쳤다.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묵란을 그려 판 것이다. ‘석란도’는 그가 그린 묵란 중 유일하게 서명이 남아 있는 작품이다. 얼마나 그렸을지 모를 수많은 묵란을 대신하여 그 옛날 이야기를 전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은은한 향을 내며, 유약해 보이나 어떤 꽃보다 강인한 것이 난이라고. 이 난을 친 사람 역시 그러했다고. 이회영은 1932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산수도 山水圖, 1932년

황철(黃鐵, 1864~1930), 지운영(池雲英, 1852~1935) 합작, 비단에 색, 250.0×84.0cm,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 소장

‘산수도’는 황철이 그리다 죽고난 후 지운영이 완성했다. 한국인 최초로 고종을 촬영한 사진가이자 서화가 지운영, 역시 한국 최초의 사진관을 운영한 것으로 전해지는 황철 사이에는 사진이라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누구보다 스나가 하지메가 주효했다. 일본인인 스나가 하지메는 한국의 여러 지식인, 예술인을 후원했다. 황철도 그와 인연이 있다. 그림 상단의 글은 지운영이 쓴 것으로 황철과 스나가 하지메의 관계를 설명한다. 글에 따르면 황철이 남긴 그림을 1932년 스나가 하지메가 서울의 지운영에게 가져와 마무리를 부탁했고, 지운영은 황철이 남긴 화구로 색을 입혀 완성했다. 지운영의 화법이 묻어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파격적인 구도와 극적인 농담을 자랑한 황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스나가 하지메는 한국인을 후원했을까. 왜 하나의 근대사 박물관을 이룰 만큼 방대한 교류의 흔적(글씨, 그림, 편지 등 1만 점이 넘는다)을 남겼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그는 자신이 후원하는 인물들을 종종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 “나름대로의 철학을 지녔어. 장래 뭔가를 해낼 사람이야.”

 

탑원도소회지도 塔園屠蘇會之圖, 1912년

안중식(安中植, 1861~1919), 종이에 엷은 색, 23.4×35.4cm,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다시, 활시위를 당기다>의 저자 손태호는 그림에 적힌 글을 이렇게 풀이했다. “탑원의 도소회 그림. 임자년 정월 초하루 밤에 탑원 주인 위창 오세창 인형(벗의 높임말)의 질정(꾸짖어 바로잡음)을 바랍니다.” ‘탑원’은 집에서 탑골공원의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잘 보여 붙은 당호로 집주인 오세창의 집을 이르는 말이고, 도소회는 새해맞이 술인 도소주를 마시는 모임이란 의미다. 정월 초하루 탑골공원과 석탑이 아스라이 보이는 밤, 안중식을 비롯해 여덟 친구가 모인 술자리인 셈이다. ‘탑원도소회지도’는 실제와 가상의 풍경이 혼합되어 안중식의 탁월한 조형 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림 속 모임은 악귀를 물리친다는 도소주를 마시며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평범한 자리일 수 있지만, 임자년 1912년은 나라를 빼앗긴 후 맞은 두 번째 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학계는 여기 모인 여덟 명을 안중식, 집주인 오세창을 비롯해 이들과 절친한 관계였던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으로 추측한다. 망국 후 지식인들은 누각에 모여 저 먼 곳을 바라보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미래를 도모했을까, 현실을 궁리했을까. 모든 것이 마치 안개를 닮은 그림의 여백처럼 아득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작품 속 인물로 추정되는 이들이 훗날 ‘민족대표 33인’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특히 오세창, 손병희, 권동진, 최린은 1919년 3·1 독립선언을 기획한 인물로 꼽힌다. 100년 전 탑골공원은 ‘대한 독립 만세’가 울려 퍼진 곳이다. 안중식이 ‘위창 오세창 인형의 질정’을 바라던 누각에서 내다보이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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