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주에 대한 기억

일본 오키나와에서 좋은 소식이 들렸다. 한기주가 예년에 비해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얘기다. "마지막일지 모를 도전을 시작합니다.” 마지막일 필요는 없다. 출전하는 모습만으로도 야구팬들은 행복해할 것을 확신하니.

광주 동성고 시절 한기주는 말 그대로 ‘천하무쌍’이었다.

2005년 때의 뉴스로 기억한다. 광주 동성고에 재학 중인 한 투수가 고교 무대를 말 그대로 씹어먹고 있다는 보도였다. 물론 뉴스에서 ‘씹어 먹다’는 표현이 나온 건 아니었지만 최대한 비슷한 수준의 표준어로 앳된 얼굴의 영건을 묘사하고 있었다. 바로 한기주였다. 187cm 키에 100kg에 육박하는 몸무게, 시속 153km의 강속구, 그리고 고교 3년 통산 방어율 0점대까지. 스포츠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스펙의 주인공 한기주는 신인 역대 최고 계약금 10억원에 기아 타이거즈에 입단하게 된다. 당시 기아 팬들은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구단 재정 상태가 좋지 못했 해태 타이거즈(기아의 전신)시절, 베테랑, 신인 할 것 없이 타 구단에 내줬기 때문에 특급 선수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구단 재정 상태가 좋았다면 서재응, 김병헌, 최희섭 중 1명 이상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승과 특급 선수라는 두 가지 염원을 모두 해갈해줄 것으로 기대를 받았던 한기주는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10승 8홀드 1세이브, 방어율 3.26을 기록했다. 동기생이었던 류현진이 워낙 괴물급 활약을 보여줘서 그렇지, 꽤 훌륭한 성적이었다.

기아 타이거즈 입단식 때의 한기주. 앳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듬해인 2007년부터는 아예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변경했고 2007-2008년 2년 연속 25세이브 포인트를 기록했다. 당시 기아 타이거즈의 성적은 각각 꼴찌, 6위였기 때문에 얼마 있지도 않은 세이브 기회에서 얻은 쾌거였다. 어느 때보다 팬들의 기대가 높았던 2009년, 한기주는 시즌 개막 때부터 제대로 된 공을 던지지 못했다. 개막하고 두 달 가까이 그는 3세이브 포인트에 머물러 있었다. 마무리 보직에서 물러나 셋업맨으로 역할을 변경했지만 공은 여전히 포수 미트에서 벗어나기 일쑤였다. 한기주는 점차 팀에 중심에서 멀어져 결국 핵심 전력에서 제외됐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기아 타이거즈는 승승장구했고 그토록 염원했던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이 당시 한기주의 모습을 두고 다수의 전문가와 팬들의 뜨거운 설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미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부터 이상 징후가 엿보였다는 의견과 원래 큰 경기에 강하지 못한 전형적인 새가슴이라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의 좋지 못한 성적을 두고 ‘불기주’ ‘한작가’라는 불명예를 붙여 비아냥대던 팬들이 늘어난 것도 이때쯤이었다.

안 좋은 소문으로 설왕설래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기주의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 확정이 공식 보도됐다. 최소 1년을 팔꿈치 재활에 쏟아 부어야 하는 바로 그 토미 존 서저리였다. 그리고 더 무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상적인 팔꿈치 상태가 아니었다는 사실과, 프로 입단한 뒤에도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공을 던졌다는 사실이었다. 야구팬들 사이에 공공연히 돌았던 ‘한기주 부상 썰’은 결국 사실로 드러났다. 누구 한 명을 딱히 꼬집을 필요없이 그의 혹사를 종용한 모두의 잘못이 낳은 최악의 결과였다.

한기주는 팔꿈치, 어깨, 손가락 등 몸에 성한 부위가 없었다. 고교시절부터 당한 혹사때문이었다.

부상에서 돌아온 한기주는 이미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2011-2012년 연속 7세이브 포인트에 그쳤고 많은 이닝을 소화할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13년엔 어깨 회전근 부상을 입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이후엔 우리가 아는 스토리 그대로다. ‘부상, 재활, 부진, 다시 부상, 재활, 부진.’ 매년 스프링캠프가 열릴 무렵, ‘한기주 부활 청신호’란 기사가 반복적으로 쏟아졌고 그럴수록 팬들은 하나 둘 기대를 접었다. 한기주는 언론이 만든 ‘양치기 소년’이 됐고 그렇게 기억 속의 선수가 됐다.

 

지난 연말, 추억의 투수는 타자 이영욱과 1대1 트레이드 돼,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올 2월, 삼성 라이온즈의 오키나와 스프링 캠프에서 라쿠텐 이글스와의 연습경기에 등판해 좋은 투구 내용을 보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솔로홈런을 맞아 1실점을 했지만 공이 전반적으로 낮게 깔리며 제구력이 부쩍 좋아진 모습이었다. 한기주는 이후 열린 LG 트인스와의 연습경기부터 한국프로야구 시범경기까지 4연속 무실점 경기를 이어가고 있다. 수년간 재기를 기다리다 지친 기아 타이거즈 팬뿐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 팬, 그리고 야구팬마저 이번엔 한기주가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그의 재기를 염원 중이다.

물론, 한기주는 MBC스포츠플러스와 인터뷰에서 “삼성은 내겐 마지막일지 모를 도전 무대”라 밝힐 만큼 절실할 것이다. 각오를 다지는 것은 좋지만 지금 상황을 좀 더 즐기며 공을 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팬들이 말하는 재기 한기주가 아픈 팔을 참아가며 승리를 위해 공을 던지는 모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모진 세월을 겪고도 여전히 젊은 한기주가 앞으로 10년은 더 건강하게 뛰길 바라는 의미의 재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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