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내 생활의 일부야.” 왁싱 4년 차 김예리 씨가 말했다. “우선 편해요. 쾌적하고. 이제 털이 있으면 이상해요. 왁싱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 서빙고동에서 만난 신민정 씨도 팥빙수를 먹으며 이야기해주었다. “저는 혼자 사는데요, 집 바닥에 그 털이 있는 게 너무 싫었어요. 내 몸에 없으면 털이 돌아다닐 일도 없겠죠.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녀는 왁싱 3년 차라고 했다.

“안 해봤어요.” 유독 깔끔해 보이는 남자라서 김인건 씨에게 물어봤지만 그는 음모 제모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몇 가지 신경 쓰이는 게 있죠. 내 소중한 곳을 남에게 보이는 것부터. 누구한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한번 하면 계속해야 한다는데 것도 신경 쓰이고요. 계속하는 게 은근히 비싸다고도 들었어요.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더 비쌌어요.” 서희진 씨는 올해 왁싱 11년 차라고 했다. 프런티어다. “제가 처음 왁싱하던 때는 30만원씩도 했어요.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많이 싸졌어요. 연간 회원권 같은 개념으로 돈을 내두면 더 싸기도 하고요.” 어쩌다 그때부터 왁싱을 했을까? 11년 전은 2007년, 빅뱅의 ‘거짓말’과 원더걸스의 ‘텔 미’가 나온 해다. “저는 그때 유학을 가서 처음 접했어요.” 역시 새로운 습관은 새로운 지역에서 얻는 경우가 많다. 서희진 씨는 왁싱에 무척 만족해서 주변 친구들에게도 많이 추천했다고 했다. 일종의 왁싱 문익점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프죠.” 서희진 씨는 추천 경험이 많은 만큼 예상 질문에 대한 답도 거침없었다. “처음이 제일 아프고, 하다 보면 안 아파져요. 처음 할 때 가장 많이 뽑히는데 꾸준히 하다 보면 털의 양 자체가 줄어들어요. 저는 이 정도 되다 보니 그냥 늘 하는 언니랑 수다 떨면서 해요.” 나는 늘 하는 언니와 수다를 떨면서 왁싱을 받고 있는 서희진 씨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남자들이 왁싱을 꺼리는 진짜 이유는 발기였다. 왁싱을 하다 발기가 되면 어쩌지? “그냥 몸이니까 그러려니 한대요.” 서희진 씨가 늘 하는 언니는 진짜 프로였다. “그리고 남자는 몸 구조상 왁싱이 잘되려면 발기가 되어야 한대요. 그런데 왁스를 발랐다가 떼는 게 너무 아프니까 발기가 되었다가도 왁스를 떼면 ‘악!’ 하면서 수그러든대요. 또 만지면 다시 커지고, 또 떼면 다시 작아지고, 그 반복이래요. 보다 보면 안쓰럽대.” 모두가 이분 같지는 않다. 남자에게는 왁싱을 하지 않는다는 왁서 이야기도 꽤 들었다.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는 일이다.

남의 이야기를 물어볼수록 확실해졌다. 여자 이야기는 많지만 왁싱한 남자 이야기는 찾을 수가 없었다. 며칠 고민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전화를 걸었다. 토요일 오전 10시. 예약 완료.

“요즘은 남자분들도 많이 하세요.” 내 첫 왁서 선생님은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이었다. 전화를 걸어 “남자… 되나요?”라고 물었을 때 “네, 됩니다”라는 말에 별 망설임 없이 예약을 결정했다. 토요일 오전에 만난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기도 했다. “이 동네에는 외국에서 살다 오신 분이 많아서, 유학 다녀온 분들도 많이 하시고요. 젊은 분들이 많이 하죠. 20~30대가요. 며칠 전에는 군인도 와서 하고 가셨어요.” 왁싱한 군인이라. 왠지 일을 깔끔하게 할 것 같았다.

“가위질 좀 먼저 할게요.” 왁서 선생님의 말이 이어지면서 내 음모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내 2차 성징의 결과물이 사라지는 걸 느끼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겪은 왁싱의 순서는 이랬다. 첫째, 성기 윗부분에 나 있는 음모를 자른다. 둘째, 그 부분에 왁스를 발라 떼어낸다. 셋째, 성기 부분의 각 굴곡에 왁스를 발라 뗀다. 넷째, 자세를 바꿔 회음부 부분의 음모를 제거한다. 다섯째, 남은 음모를 집게로 제거한다.

어땠을까? 아팠을까? 생털을 떼어냈으니 고통이 있었지만 아주 아프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참을 만했다. “저는 기술이 있어서 안 아프게 하는 편이에요”라고 말한 왁서 선생님의 기술일 수도 있다. 수치스럽지는 않았나? 의외로 덤덤했다. 몸 어딘가에 나 있는 털일 뿐인데 뭐. 하지만 내가 이번 왁싱을 일의 일부로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커졌나? 나도 조금 걱정했지만 신기할 정도로 한 번도 안 커졌다. ‘나를 발기부전으로 보면 어쩌지’ 싶기도 했지만 금세 ‘혹 그렇게 생각하면 뭐 어때’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왁서 선생님께 내 능력(그런 게 있다면)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왁서 역시 털을 제거하는 프로페셔널일 뿐이다. 왁서 선생님도 내가 발기하지 않자 조금 더 안심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몸이 건강하신가 봐요. 피부 결이 좋네” 같은 덕담도 해주었다. 오히려 이게 조금 민망했다.

“저도 왁싱해보고 싶은데요.” 은수현 씨는 엉뚱해서 귀여운 구석이 있다. “명절마다 고향에 가면 엄마랑 공중목욕탕에 가요. 그때 (내가 왁싱한 걸 보면) 엄마가 놀랄까 봐 못 하겠어요. 엄마랑 목욕탕 가는 그 추억을 대체할 수 없어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고민이다. 왠지 루 크리스티의 ‘비욘드 더 블루 호라이즌’이 생각난다.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해봤으니 말씀드릴 수 있다. 음모 없는 생활은 음모론 없는 정신 상태처럼 간결하다. 방바닥에 굵은 털이 떨어질 일도, 삼각 속옷의 가장자리 곁으로 털이 빠져나올 일도 없다. 은수현 씨에게도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이 정도로 좋다면 어머니도 이해해주실 것 같다.

무엇보다 음, 촉각적으로 명쾌하다. 여러 부분에서. “남자한테 정말 좋아요”라는 말 역시 사실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섹스를 좋아하지만 왁싱할 돈은 아깝다는 권헌준 씨에게 꼭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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