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목화의 맛

혀끝에 새겨진 기억은 어떤 것보다 강렬하다.

미국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은 식사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생존을 위한 식사와 즐거움을 위한 식사. 음식과 술에는 생존과 즐거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추억과 역사, 세대가 담겨 있다. 삶의 모든 것이 농축돼 있다. 그 기억은 입안의 미뢰와 머리의 뇌세포에만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맛에 대한 기억에는 온몸으로 살아낸 삶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혀끝에 새겨진 기억은 어떤 것보다 강렬하다. 음식과 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생존과 즐거움, 그 모든 것의 기억을 소환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억은 간사하다. 맛에 대한 기억은 더 그렇다. 맹신할 것이 못 된다. 아주 어린 시절 경험한 어떤 음식이 그렇다. 갓 솜을 치기 시작한 연한 목화다. 가족 손에 이끌려 면화밭에서 따 먹은 것 같긴 하다. 언제, 어디서였는지가 분명치 않다. 당시 내 고향에서 목화를 재배했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허황한 이야기로 들릴까 봐 가족에게 물어본 적도, 다른 이에게 발설한 적도 없다.

그 맛이 뇌리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희한한 일이다.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약간은 따스하기까지 했다. 그 후에 맛본 어떤 음식과도 달랐다. 그래서 더욱더 또렷하다. 그 기억 때문에 목화를 먹은 것이 어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맛은 정말 내가 경험한 것이 맞을까? 정말 내가 목화를 따 먹기는 한 것일까?

목화에 대한 아리송한 기억은 아버지의 회상과도 관련이 있다. 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었다.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의 과거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가끔 절제력이 무너질 때도 있기는 했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갔을 때였다. 그럴 때 아버지가 내뱉는 말은 대부분 못마땅했다. 당최 사실일 리가 없는 이야기여서였다. 없는 얘기를 꾸미거나 최소한 과장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마흔여섯에 나를 낳았다. 당시 어머니는 서른아홉. 양친 모두 느지막이 만나 자식을 늦게 뒀다. 두 분 다 복잡다단한 개인사를 갖고 있었다. 나는 그 사연이 듣기 싫었다. 그 결과가 못마땅한 것투성이였으니까. 내색은 자주 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이가 할아버지뻘인 아버지가 마뜩찮았다. 학창 시절 내내 부모가 학교를 찾는 것을 싫어한 것도 그래서였다.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불러야 하는 경우조차 학교에 어떤 핑계든 대서 기어코 무산시키곤 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교실 뒤편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중년의 아버지를 본 후로 늘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이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와 크게 다퉜다. 무엇 때문에 티격태격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홧김에 이렇게 소리쳤다는 것만 또렷하다. “우린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얘기가 안 돼. 다른 집은 아버지가 아들한테 술도 가르쳐주고 한다는데” 나는 안방 문을 꽝 닫고 쿵쿵거리며 2층 내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저녁도 거르고 몇 시간을 잤을까.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깼다. 2층에서 내려와 아버지와 늦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보통 저녁상이 아니었다. 상다리가 휘어질 듯한 차림이었다. 그리고 밥상 한 귀퉁이에 우뚝 서 있는 오비맥주 세 병.

맨 정신으로는 말주변이 없었던 아버지가 묵묵히 술을 따랐다. 당신과 내 잔, 두 잔에 다 따른 후 그 흔한 건배사나 설교도 없이 혼자 홀짝였다. 나도 그간 보고 배운 대로 고개를 돌려 들이켰다. 맥주 맛은 부드럽고 따사로운 면화처럼 오래도록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분명 찝찔하고 쓴맛이었지만 달고 시원하기도 했다. 그 맛은 아버지에 대한 오랜 원망과 그로부터 사내로 인정받았다는 희열만큼이나 이중적이었다.

둘이서 세 병을 나눠 마시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어색했지만 첫 경험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을 굽혀가면서까지 자식을 배려하려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두 잔 마신 후에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날 평생에 걸쳐 괴롭히게 될 고독과 우울로부터 나를 지켜줄 든든한 두 친구를 만났다. 아버지와 술, 둘이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될 무렵 아버지는 20대를 막 넘기고 있었다. 당시 내 고향은 해방 공간의 갈등이 집약된 곳이었다. 그로 인해 숱한 인명 손실을 겪고 있던 중이었다. 아버지도 첫 가족을 다 잃은 상태였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청년이었다. 이성을 잃고 어느 한편에 섰던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가 자진해서 맡은 역할은 탈영병 수색과 체포. 패전 위기까지 몰린 군이 섬 남서쪽 끝에 설치한 신병 훈련소는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였다. 군인에게 필요한 보급품은 물론 식사도 제때 공급되지 않았다.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 탈영하는 강제 징집 청년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훈련소로 되돌리는 일은 당시 전쟁을 치러야 했던 군경이 아니라 아버지 같은 준군사 조직 민간인들에게 맡겨졌다.

그날도 탈영병 수색으로 그는 뭍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탈영병 한 명이 그 배에 숨어들었다는 첩보도 입수한 상황이었다. 그날 그는 처음으로 권총을 지급받았다. 오랫동안 갈망해온 것이었다. 그는 배를 샅샅이 뒤졌다.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큰 면화 덩어리들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면화 덩어리들을 일일이 뒤졌다. 배에 숨어들었다던 탈영병 시신이 발견된 것은 그 덩어리 가운데 하나에서였다. 맨살이 다 드러나다시피 한 해진 옷과 신발 차림이었다. 숨죽인 채 있느라 그랬는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의 입에는 솜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버지에게 꼭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 이야기는 그림처럼 선명한 데다 마치 영화처럼 극적이어서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웠다. 허구거나 부분 창작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내 어린 시절의 그 목화 맛과 시신이 들어 있던 면화 솜 덩어리는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참을 허탈한 마음으로 보냈다. 따로 시한을 정하지 않고 내 삶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를 꽤 긴 휴가를 보냈다. 그중에는 고향에서 마음을 추스르느라 보낸 시간도 있었다.

그때 궁금했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고향에서는 1970년대까지 목화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 고향이던 섬 서쪽은 꽤 늦게까지 면화밭이 유지되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에서 육지로 실어 나르던 몇 안 되는 수출품 중 하나가 바로 면화 솜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일가족을 잃은 아버지가 한때 이념 단체 활동을 했던 기록도 확인했다. 가장 격렬한 활동가였던 그가 어느 순간 그 일을 그만두었다는 증언도 들었다.

기억은 때때로 사람을 속인다. 맛에 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맛에 대한 기억이 진실의 파편을 극적으로 소환할 때가 있다. 그때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더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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