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는 사람도 산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거주 형태, 아파트. 아파트 키즈들은 말한다. 재테크 수단이기 전에 아파트에도 사람이 살았고, 살고 있다고.

아파트 쇼핑

“친구들끼리 모이면 아파트가 얼마나 올랐는지 맨날 얘기해. 1년 동안 7000만원이 올랐는데도 평균 시세보다 낮다고 속상하다고 하더라고. 그때 내 통장 잔고를 생각하면 자극을 안 받을 수 없었지. 결국 대출받고 여유 자금 다 끌어서 아파트를 샀어. 입주도 하기 전에 호가를 매일 들여다보는 거야. 지금 3000만원쯤 올랐나. 대출금은 30년 동안 갚아야 되는데 말이야.”

30대 후반, 석 달 뒤 결혼을 앞둔 양재선 씨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파주 근처에서 원 테이블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그의 아파트 구입은 예상에서 한참 먼 일이었다. 결혼을 감안하더라도 별명이 돈키호테인 사람이 아파트를 사다니.

아파트 실제 구입가와 대출액을 듣는 순간 ‘하우스 푸어’ 다섯 글자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10분 정도 대화가 더 이어졌을 때 그가 먼저 스스로 하우스 푸어가 됐다고 자신의 신세를 정리했지만.

양재선 씨의 아파트 구입은 결혼이 결정적 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나이 친구들의 고민에 함께할 수 없다는 소외감과 재산 증식에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함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개미 투자자가 주가를 매일 검색하듯 그는 오늘도 아파트 시세를 살펴보고 잠이 든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아파트

1990년대, 아파트의 지상 주차장 겸 마당에서 자전거를 배우며 친구들과 뛰어놀았고 식사 시간이 다가오면 엄마가 창밖으로 이름으로 불렀다. 아침저녁으로 가까운 중고등학교의 수업 종소리도 들렸다. 이 풍경은 1988년경 쌍문동에서 성장한 ‘덕선이’가 자라던 <응답하라 1988>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느덧 성인이 되어 주거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할 무렵, 우리 사회에 남은 건 아파트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과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아예 아파트 자체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도 흔하다.

아파트는 도시에 사는 이들에게 익숙하고 편리하며 실제로 가장 많은 이들이 살고 있는 주거 형태다. 여유가 된다면 설계부터 시작해 온전히 자신만의 주거 공간을 소유하는 것이 최선일 테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부모님에게 물려받거나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원룸 월세, 전세 빌라 이후 바로 아파트 혹은 개인 소유 주택으로 대출 없이 수평 이동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파트 키즈들이 가장 활발한 경제 인구 연령대인 지금, 이 멀고도 가까운 주거 형태를 다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다. 좀 더 원론적으로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선 이 도시가, 공간이 누구로부터 시작됐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한번 의문을 품어본다면 세상을 인식하는 시각이 달라진다.

<효리네 민박>으로 전 국민이 샅샅이 알게 된 가수 이효리의 제주도 소월리 집. 그곳에서 이상순과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알려졌다시피 매년 결혼기념일에 둘만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훗날 그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지금 거주하는 공간에서 죽음을 맞고 싶다니. 태어난 집에서, 혹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바람은 아름답지만 이 시대의 가장 사치스러운 욕망이 아닐까.

서울, 수도권 지역에 사는 다양한 사람의 집을 방문해 그들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프로젝트 <포스트 서울> 매거진이 있다. 인터뷰 후 책 발간까지 1~2년쯤 흘렀을까? 원래 살던 집에 그대로 사는 이는 절반도 못 미쳤다.

아무리 애정을 쏟아도 짧으면 2년, 길어도 수년 이내에 새로운 곳으로 이사해야만 하는 도시의 주거 생활.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에 최근 1~2년 사이에 들어선 ‘신상’ 아파트 단지도 어쩌면 30년 뒤에는 다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니 순간 초라해 보였다.

한 세대도 온전히 품지 못하는 주거 형태에 이렇게 큰 가치와 시간과 에너지와 노력을 부여해야만 하는 건가. 서울 시내의 수많은 아파트가 처음 지어질 때 과연 30년 후를 생각했을까?

30분, 서울 도시계획의 시작

“김현옥 서울시장은 주택을 가장 싸게 해결하는 방법으로 ‘69 시민 아파트 건설 계획’을 세웠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17번씩 기공식이 열렸는데 시장이 전부 참석했어요.”

정재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파트 생태계>에서 1960년대 서울 도시계획국장이었던 손정목이 한 말이다. 서울 인구가 매일 9000명씩 늘어나는 상황에서 집을 공급하는 것이 급선무였지 주거 형태에 대한 고민이 들어설 여유는 없었다. <아파트 생태계>에서 가장 웃기면서 서글픈 장면이기도 하다.

여의도, 영등포, 잠실 구시가지 세 곳을 연결해 도심을 개발하는 이른바 ‘서울시 3핵 개발 정책’이 30분 만에 결정되었다는 것. 이 3핵을 중심으로 지하철 2호선의 노선도 완성됐다. 인구 1000만 명을 상회하는 이 도시의 시작은 약 50년 전, 30분 동안의 논의에 불과했다.

여의도 시범 아파트, 회현 시민 아파트처럼 정부가 주도적으로 개발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 시대를 거쳐, 2000년대 초반부터 톱스타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기 시작한, 이른바 브랜드 아파트로의 변화를 거친 지금, 아파트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느냐 또한 고심해봐야 한다.

단지형 아파트는 입주민들의 공간과 외부를 확실히 구분 짓는 게이티드 타운으로 강화됐고, 모델하우스만 보고 계약하는 방식은 변함이 없다. 모델하우스는 아파트를 구입할 때 집뿐만 아니라 아파트 입구부터 아파트를 둘러싼 조경, 이웃 주민과 스치는 복도와 통로까지 모두 공간을 공유한다는 개념에 선을 그어버린다. <아파트 생태계>에서 건축가 조성룡이 아시아선수촌 아파트를 설계할 당시의 의도를 설명할 때도 이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아파트 생태계>는 “만질 수 있는 너를 사랑하네”라는 노랫말이 흐르며 둔촌주공아파트 전경을 비추는 걸로 끝이 난다. 이제는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아파트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곳에 생성된 장소성, 애정과 시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집의 시간들>에 따르면 둔촌주공아파트는 1980년에 건축해 1999년부터 재개발 논의를 시작했고 2018년 10월에 143개동 5930세대의 거주민 이주가 완료됐다. 앞으로 같은 자리에 1만2120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다. 경건하게 애국가를 부르고 재개발 후 아파트 1+1 획득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조합원 설명회와 거주하던 고양이들이 안전하게 터전을 옮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음은 영영 마주칠 수 없더라도, 분명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아파트 키즈의 아파트

다른 사람 모두 아파트 소유자가 되어도 뒷짐을 지고 취미 생활에 몰두할 것 같던 사람이 아파트를 구입하고 부동산 재테크에 동참했다는 소식을 접한 다음 날, 다큐멘터리 <말하는 건축가> <말하는 건축: 시티홀> 그리고 최근 장편영화 <나비잠>을 연출한 정재은 감독을 만났다.

정식으로 개봉하지 않았지만 서울 독립 영화제, 건축 영화제 등에서 공개한 <아파트 생태계>는 ‘아파트 키즈’라 불리는 30대 중반의 서울 시민이 굳이 궁금해하지 않았던 이 도시의 출발점을 찾아낸다. 거기에 있었으니까 살았을 뿐인 아파트가 아니라, 삶의 형태까지 고민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이때 실마리를 찾게 도와준다. 아파트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 ‘생태계’가 제목에 붙은 이유다.

여기에 아파트에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든 아파트의 현재와 소멸을 기록하고 전하고 싶어 만든 콘텐츠도 등장했다. 재건축을 앞둔 둔촌주공아파트를 집중 조명한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이다.

텀블벅 프로젝트가 성공하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인터뷰에 참여한 바탕에는 역시 같은 마음이 있어서다. 이들과 아파트를 주제로 나눈 대화는 사실 다른 형태의 주거 공간에 살아도 무리 없이 연결된다. <집의 시간들>의 라야 감독, 이인규 프로듀서는 아파트를 두고 계산기만 두드릴 것이 아니라 다른 시선이 필요함을 아름답게 증명했다.

정재은 감독은 그래서 아파트에 주목했다

‘집의 시간들’을 기록한 라야, 이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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