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의 족보

한국에서 일찌감치 다문화 사회를 이룬 건 어쩌면 빵집이다.

마케팅에 감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건 군소리가 되었다. 요즘 시내를 다녀보면 간판에 ‘3대’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대물림하는 장사에 지갑이 열린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가짜도 많다. 아무 증거 없이 70~80년 되었다는 국밥집, 몇 대를 이어왔다는 냉면집이라고 주장하는 곳도 봤다. 오래된 기술이 맛을 보증한다는 선입견을 건드리자는 뜻이다. 고백하건대 우리 고조할아버지가 최초의 이탈리아 유학생이 된 건 내 운명에 영향을 끼쳤다. 고조께선 갑신정변에 휘말려 도쿄로, 다시 유럽으로 망명했고 당시 일본의 유명 정객이자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다케누마 고이치를 로마에서 만났다. 그의 주선으로 로마의 한 여관에 유숙하며 피자 기술을 배우셨다고 한다. 다음 달에 나는 고조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청담동에 피자집을 연다. 가게 이름은 ‘5대(代) 피자’다. 주메뉴는 피자 반죽을 크게 부풀려 뻥을 친 후 새빨간 소스를 발라내는 것이다.

옛것이 좋다는 심리는 음식 동네에서도 마찬가지로 통용된다. 일본식 영어인 ‘사라다빵’은 추억을 건드린다. 굳이 샐러드라고 고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역사를 얻는다. 오래된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품질보다 감성으로 팔겠다는 뜻이다. 그게 먹힌다.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추억 자체가 상품성이 되고, 새로운 세대는 유행으로 받아들여 관심을 갖는다. 이렇게 좋은 마케팅이 어디 있나. 복고풍은 그렇게 유행이 되었다. 올림머리에 판탈롱을 입고 사라다빵을 먹는 첨단의 유행이 존재한다.

언젠가 페이스북에 옛 서울의 제과점, 빵집 이름을 올려본 적이 있다. 폭발적인 댓글이 달렸다. 어느 빵집의 따님 미모까지 기억하는 글도 있었다. 빵집 이름이 소년기와 청년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나도 그 세대에 속하리라. 서울의 중심지 종로에 있던 집들만 해도 독일빵집, 고려제과, 덕수제과, 무과수제과 등이 열거되며, 지금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제과 명장들은 거개 이런 집에서 수련해 자기 가게를 갖게 된 이들이다.

우리나라의 제과·제빵 역사는 본격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됐다. 물론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한 1600년대를 시초로 볼 수도 있다. 뻥이 아니다. 그가 밀가루를 얻어서 빵(으로 유추되는)을 만들었다고 추정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먹는 건 적어도 하멜의 빵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제과·제빵 선진국이라기는 좀 뭐한 우리나라가 그 역사에서만큼은 가장 독특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문이다. 일본은 유럽을 통해 빵을 이수했다. 거기에다 자기 민족 고유의 과자를 보탰다. 그게 일제강점기 36년을 거치면서 고스란히 우리 땅에 남았다. 일본인들이 귀환선을 타고 사라지면서 서양과 일본이 짬뽕된 유물이 남은 것이다.

오래된 것을 전면에 내세우는 건 품질보다 감성으로 팔겠다는 뜻이다. 그게 먹힌다. 옛날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추억 자체가 상품성이 되고, 새로운 세대는 유행으로 받아들여 관심을 갖는다.

김천 집에서 제과점을 했던 소설가 김연수의 회고를 보면, 명절을 앞두고 온 집안이 바빴다고 한다. 대도시에 갔던 사람들이 귀향하며 빵이며 케이크를 다투어 사 갔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포장을 맡았는데, ‘로루’를 싸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로루란 ‘롤케이크’를 이르는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식 이름은 꽤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사라다빵에 쇼쿠팡이라 발음하는 일본어에서 비롯된 식빵, 도나스(도넛), 단팥죽에 가케모노도 있었다. 꽈배기 같은 마른 과자가 바로 가케모노였다. 단팥빵을 어른들은 여전히 앙꼬빵이라 부른다. 모찌와 모나카(最中)는 대체어도 사실상 없다. 누가 모찌를 굳이 찰떡이라고 부르겠는가. 누가 군산 이성당에 가서 사라다빵 아닌 ‘샐러드빵’ 주세요 하겠는가. 우리 시대의 제과점은 갈레뜨 드 루아와 카스테라와 사라다빵과 모찌와 간장을 넣은 센베가 공존하는, 참으로 희한한 내용을 안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다 화교의 영향으로 중국 빵도 있다. 오래된 과자점에서는 중국식 공갈빵과 호떡도 팔았다. 한국식도 더러 있었다. 떡볶이를 파는 제과점도 있었으니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형들이 미팅을 하는 곳은 제과점이었다. 교복을 입은 채 빵과 우유를 시켰다. 물론 사전을 헌책방에 팔거나, 참고서를 산다고 마련한 돈이었다. 테이블에 단팥빵과 생도나스와 꽈배기에 우유가 놓였다. 그러고는 포크로 빵을 찍어 먹었다. 더러 돈 없는 청춘들은 그냥 식빵을 시키기도 했다. 썰지도 않은 식빵을 손으로 뜯어서 설탕을 달라고 하여 찍어 먹었다. 하기야 분식집에서 미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물만두와 쫄면을 시켜 먹었다. 남학생은 물만두, 여학생은 쫄면이나 가케우동. 진짜라니까. 그 가케우동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져서 지금 스파게티가 소개팅 1위 메뉴로 올라 있는 것이다. 국수는 시대 불문하고 별식인 셈인 건가.

아, 그리고 최근에 뉴욕제과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2억원을 줬다는 뉴스가 떴던데 아마 해방 후 부산에서 시작하여 서울로 진출한 추억의 뉴욕제과를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추억을 건드리는 뉴스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뉴욕제과는 원래 주인과 상관없이 일찌감치 남에게 넘어간 브랜드다. 그리고 아마 첫 문단에 쓴 말은 모두 다 뻥이다. 그래도 첫 문단만 읽은 사람들 덕분에 내가 청담동에 5대 피자집을 연다는 얘기가 진짜처럼 소문이 날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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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박 찬일(로칸다 몽로 셰프)
출처
33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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