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경영학

불황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 단 5분의 시무식을 가졌다.

“<에스콰이어> 에디터 여러분, 2019년은 정말 열심히 했지만 겨우 제자리걸음을 한 해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여건이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당연히 <에스콰이어>에도 불리한 조건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여러 가지 전략과 전술을 떠올렸습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단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에스콰이어> 에디터 여러분에게 2019년은 반드시 하고 싶었지만 미처 하지 못한 것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 편집장은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2019년이 마무리될 때 에디터 여러분 각자만큼은 최대한 새롭게 성장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제가 제시하는 2019년 <에스콰이어>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1월 2일 오후였다. <에스콰이어> 5분 시무식에서 한 말이다. 이제 아는 사람은 알지만 <에스콰이어>는 전체 회의도 전체 회식도 거의 없는 팀이다. 매거진 하면 으레 상상하기 마련인 편집장 중심의 편집부 전체 기획 회의도 없어진 지 오래다. 전체 회식도 연말에 한 번 정도다. 그런 편집장이 새해 업무 첫날부터 전체 회의를 소집했으니 다들 뜻밖이라는 얼굴이었다. 역시나 시무식은 <에스콰이어>답게 5분도 채 안 돼서 끝이 났다. 정작 에디터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메시지는 짧았지만 파장은 작지 않았다는 얘기다.

누군가는 리더의 결코 낙관적이지 않은 전망에 놀랐을 수 있다. 실제로 5분 시무식 직후 하루 만에 패션 매거진 업계에 뜬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편집장이 2019년에 하고 싶은 걸 다 하라고 했다’가 ‘2019년 이후는 기약할 수 없다’로 와전된 듯했다. 이런 소문을 수집해서 <에스콰이어> 에디터들한테 들려줬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에스콰이어> 에디터들은 모두 5분 시무식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받아들였다. 많이 힘들 테지만 절대 도전을 멈춰서는 안 된다. 현재가 힘들다고 눈앞의 문제에만 매달리다가 미래를 잊어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에스콰이어>는 계속 전진한다. <에스콰이어>는 2018년에도 남성지 1등이었고 2019년에도 또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이다.

경기 침체가 조직에 미치는 진정한 악영향은 현재의 성과가 나빠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연초니까 희망찬 얘기부터 할 수도 있다. 과도한 희망은 자칫 과도한 목표 설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무리한 목표는 조직을 병들게 만든다. 무리한 운동이나 다이어트가 체질을 망쳐서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시대의 리더는 조직이 듣고 싶어 하는 얘기가 아니라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만 한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듣기 좋은 미사여구는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결국 위기를 헤쳐나갈 리더십마저 훼손시킨다.

2019년 세계 경제는 분명 불황기로 접어들고 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2019년 전망은 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지난해 연말 정부가 제시한 2019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6% 수준이었다. 민간 경제 연구원들이 제시한 성장률 전망치는 당연히 더 낮았다. 경기가 이쯤 퇴행하면 정부가 맨 먼저 해야 하는 건 돈 풀기다. 시중에 돈이 돌면 가계의 소비가 살아나고 수요가 증가해서 기업이 공장을 돌리고 일자리가 늘고 그러면 다시 가계의 소비가 살아나는 선순환을 일으켜야 한다. 이게 교과서적인 경기 부양책이다.

정부는 2019년 예산을 470조원 가까이 늘려 잡았다. 2018년보다 40조원이나 늘어났다. 문제는 이렇게 돈을 풀어도 돈이 선순환되지 않을 만큼 한국 경제가 구조적 와해를 겪고 있다는 점이다. 이젠 세상이 교과서대로 안 돌아간단 말이다. 일단 돈이 풀려도 가계로 돈이 들어가질 않는다. 고용이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는 돈이 떠돌지만 그 돈을 가계 소득으로 전환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 임금으로 돈을 줄 수 없으면 부채로 돈을 빌리게 하는 방법도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 부채는 1500조원이 넘는다. 더 이상 가계는 빚을 낼 여력이 없다. 이쯤 되니 내수 부진은 필연이다.

이렇게 아무리 돈을 풀어도 돈 냄새조차 못 맡는 가계를 위해 정부가 마련한 선의의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이다. 임금 자체를 올려주면 가계로 그나마 돈이 더 흘러들어갈 거란 계산이다.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건 700만 명이 넘는 자영업자였다. 최저임금 인상은 영세 자영업자에게는 직격탄이었다. 심지어 최저임금을 줄 여력이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조차 추가 고용을 꺼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경기 전망이 안 좋아서 인력 고용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에스콰이어>가 속한 미디어 산업과 매거진 비즈니스는 이런 대내외 경기 변동과 구조적 경제 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패션 매거진업은 전통적으로 인플레이션 비즈니스다.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인한 중상층 이상의 소비 여력 확대 내지는 중하층 이하의 소비 욕구 확산에 기반해서 성장해왔다. 양적 완화가 끝나버린 글로벌 경제와 부채 잔치를 끝내야 하는 한국 경제의 환경 속에서는 과거와 같은 전통적인 성장을 이어가기 어렵다. 그렇다면 매거진 비즈니스는 극복할 수 없는 성장 한계에 부딪힌 것인가. 연말에 이 질문을 화두로 고민도 하고 공부도 했다. 이런 불황기에 매체를 이끌어야 하는 편집장의 의무였다.

1월 2일 <에스콰이어> 5분 시무식은 그렇게 찾아낸 답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요약하자면 더 확실한 임파워먼트를 선언한 것이었다. 편집부의 각 부서와 디렉터들과 에디터들의 자율권과 재량권을 가능한 한 확대하는 권한 위임이 핵심이었다. 따지고 보면 편집부 전체 기획 회의를 없앤 게 첫 단추였다.

<에스콰이어>는 솔루션 콘텐츠 미디어로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있다. 과거 하드웨어 제조사였던 IBM은 극심한 위기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IT 솔루션 기업으로 재정의해서 부활했다. 컴퓨터라는 하드웨어를 팔기만 하던 회사에서 각 기업이 스스로 풀지 못하는 IT 난제를 해결해주는 회사로 거듭났다. 매거진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다. 잡지라는 하드웨어 완제품을 팔고 개별 콘텐츠라는 소프트웨어 반제품을 유통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설적이지만 매거진 조직이 지닌 핵심 역량은 잡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소비자를 연결시키는 마케팅 솔루션으로서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 화보이든 기사이든 에디터 개인의 영향력이든 상관없다.

솔루션 비즈니스가 어려운 건 숙제도 다종다기하고 해법도 한 가지가 아니라는 데 있다. 덕분에 솔루션 비즈니스는 지속 가능성도 크다. 대신 조직이 충분히 민첩해지지 않으면 콘텐츠를 통해 그때그때 적절한 마케팅 솔루션을 제시하기 어렵다. 임파워먼트가 중요해지는 이유다. 생각하는 머리가 하나면 한 가지 솔루션밖에 안 나온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머리를 맞댈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콘텐츠를 생산하는 에디터 개개인에게 권한을 확실하게 위임해야 한다. 회의라는 이름으로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자율적인 콘텐츠 생태계를 조직 안에 만들어야 한다. 리더로서 편집장이 할 일은 각자 찾아낸 솔루션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가능한 한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매체의 성장 이상으로 중요해지는 게 에디터 개개인의 성장이다. 각각의 기획력과 실행력이 커질수록 기업과 소비자가 원하는 다양한 솔루션 콘텐츠를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때 리더의 임파워먼트는 필요충분조건이다. 2019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에디터 개개인의 역량이 이렇게 커진다면 현재가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이 미래를 대비하는 셈이 된다. 경기 침체의 악영향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미래만큼은 지켜낸 꼴이 된다. 2019년은 <에스콰이어>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 주체 모두에게 힘겨운 한 해가 될 것이 틀림없다. 힘든 때일수록 멀리 볼 줄 알아야 한다. 불황에는 성장은 못 해도 성장 잠재력은 키워놓아야 한다. 그래야 다시 기회가 왔을 때 턴어라운드를 할 수 있다. 매거진이든 기업이든 국가 경제든 마찬가지다. 불황의 경영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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