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전원 그리고 아버지

베토벤의 '전원' 같은 삶이길 바란다.

베토벤, 전원, 아버지

고2 때였다. 학교를 다녀오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빨간 딱지가 집 안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집 안 창가에 쳐둔 커튼이 걷히지 않았다. 당시 살던 집은 아파트 1층이었는데 시시때때로 빚쟁이들이 찾아와 문이고 창이고 두들겨대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를 가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학교를 다녀온 내게 약수터에나 들고 다닐 법한 플라스틱 물통 두 개를 쥐여주셨다. 그러고는 당신도 두 개를 들고 앞장서 갔다. 어머니를 따라간 곳은 아파트의 공용 수도였다. 물통 네 개에 물을 가득 담아 집으로 돌아왔다. 수도가 끊겨 있었다. 그 뒤로 전기가 끊겼다. 가스가 끊겼다. 촛불을 켰고, 휴대용 버너로 밥을 지었다. 욕조에 채운 물로 나도 씻고 쌀도 씻었다.

언제부턴가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라졌다. 얼마 뒤 집은 경매에 넘어갔다. 40평의 자가 아파트가 15평의 월셋집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없었다. 나는 당신이 미워졌다. 언젠가 나와 어머니를 버린 당신이 보란 듯 잘살면서 당신을 한없이 비웃어줄 날이 올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스물두 살 무렵이었다. 연락이 왔다. 아버지라고 했다. 항상 당신을 만나게 되면 격발하겠다며 세상에서 가장 못된 욕을 실탄처럼 채우고 있었음에도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만나기로 했다.

고속터미널 대합실 한복판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멀리서 그를 보았다. 몇 년 사이 세월을 한껏 머금은 얼굴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얗게 샌 머리엔 노인의 기미가 역력했다. 그의 얼굴이 내 마음을 긁었다. 잠시 말이 없었고, 잠시 말이 있다가도 다시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두툼한 종이 봉투를 건넸다. 옷이라고 했다.

종이 봉투와 삼킨 말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말처럼 봉투에는 옷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옷에서 당신의 누추한 마음과 처지가 보였다. 그제야 당신을 향해 뱉어주리라 장전해왔던 욕이 튀어나왔다. 눈물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당신을 미워한다는 것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를 위해서 당신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저 등지고 살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살아졌고, 살고 있었고, 결혼을 하게 됐다. 어쩌다 보니 결혼식을 하지 않게 돼서 결혼식에 아버지를 모실 필요가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론 어떤 식으로든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이 도리인가 고민했다. 결국 전화를 했다. 아버지께 결혼을 하게 됐지만 결혼식은 하지 않을 예정이니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했다.

그는 청계천 광장에서 보자고 했다. 지금의 아내와 함께 그리로 갔다. 청계천 방향으로 길을 건너는데 맞은편에 그가 보였다. 인사를 했다. 아내도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건넸다. CD라고 했다. 베토벤 6번 교향곡 ‘전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전원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언젠가 베토벤 9번 교향곡 ‘황제’를 주겠다고 했다.

기억이 났다. 아버지는 클래식을 즐겨 들었다. 덕분에 유년 시절의 나도 아버지의 클래식 CD를 듣곤 했던 기억이 났다. 그 뒤로 말을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가 잃었다. 침묵 사이에서 거듭 하늘을 봤다.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어떤 시간들이 자꾸 눈으로 아프게 올라오는 것 같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봤다.

별 한 점 보기 드문 새카만 밤이었다. 그 새카만 밤 어딘가에서 아버지는 말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 나는 그냥 하늘을 향해서 말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부디 건강하시라고 말했다. 그렇게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나는 그가 준 CD를 듣다가 조금 울었다. 그리고 알았다.

내게 아버지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단어이자 그 어떤 시절이었다. 되돌릴 수 없다. 더 이상 살이 차오르지 못한 채 썩어서 잘라내야만 하는 기억이었다. 나는 영원히 당신에 대한 상심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더 이상 안간힘을 써서 이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지난날로부터 멀어지기로 했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와도 이별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도하기로 했다. 그래야 나도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의 삶이 평온하길 바란다.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위해, 부디 그렇다. 당신의 삶이 내게 더 이상 눈물이 아니길 바란다. ‘전원’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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