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대가, 크리스토퍼 놀란

크리스토퍼 놀란에게도 영화는 고통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덩케르크 - 에스콰이어

소문에 촬영장에서는 절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던데.맞다.
나는 사람들이 촬영장에 스마트폰을 가져올 생각을 하지 않게 됐을 때 촬영을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꺼내는 행위 자체가 프로답지 못하다고 인식될 때 말이다. 스마트폰이 있으면 아무래도 산만해진다. 집중을 요하는 창의적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처음엔 좀 어색하고 어렵겠지만, 결국에는 다들 더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많은 스태프들이 내게 고맙다고 얘기한다.

과거 한 연구에서 창의적인 사람일수록 일을 뒤로 미루고 질질 끄는 습관이 있다는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 혹시 당신도 그런 부류인가?
보통 산업적인 일에는 반드시 맞춰야 하는 기일이 있게 마련이고, 그렇게 정해진 시간으로부터 밀려오는 압박감이 집중력을 높여주긴 한다. 사실 나도 일을 뒤로 미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지만 작은 것에 연연하는 타입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말까지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 때문에 매일같이 조바심을 내진 않는다. 다만 실제로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한지 스스로 가늠해볼 필요성은 느낀다.

당신의 영화에서는 반전이 거듭되기도 하는데, 가끔은 여기서 한 번 더 이야기를 꼰다면 관객이 스토리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어떻게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야기의 균형을 유지하나?
사실 반전이 지나치게 거듭되면 결국 감상이 평이해진다. 동시에 사람들은 너무 빤해 보이는 속임수가 펼쳐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야기를 분석해내는 데 시간을 많이 들이는 편이다. 거장 앨프리드 히치콕이 만든 영화를 보면 내러티브를 조절해내는 능력이 굉장히 깔끔해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기본적인 규칙을 세우는 방식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된다. 규칙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적인 인과관계를 튼튼하게 다지는 것이다. 그렇게 규칙만 제대로 세운다면 관객은 알아서 따라온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론 <인셉션>이 관객과의 그런 관계를 가장 멀리까지 끌고 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쓸모 있는 아이디어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는가?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나 열정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작가이자 감독 역할을 하는 내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우선 작가로서 글을 쓴 다음 일정 수준의 객관성을 유지하며 다시 읽어본다. 물론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읽어보도록 해도 좋겠지만 궁극적인 목표가 꼭 객관성에 있는 것만은 아니니까. 내가 공학도도 아니고, 다리를 짓겠다는 것도 아니지 않나.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쓴 영화의 내러티브를 정말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관객 입장에선 믿을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 그래서 영화 제작은 감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감독이란 좋은 직업이니 징징거리고 싶진 않지만, 어쨌든 어려운 건 사실이다. 특히 이미 했던 걸 다시 하면서 열정을 갖기란 쉽지 않다. 거대한 스케일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된다면 그걸 다시 한번 만들기로 결심한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도 알게 될 거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사랑하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면 분명 그 과정에서 특별한 가치를 찾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 덩케르크 - 에스콰이어

영화 <덩케르크>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과 배우 핀 화이트헤드.

무작정 열정을 쏟기 전에 자신이 열정을 제대로 쏟을 수 있는 것을 찾았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열정이란 찾아내는 게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열정이 찾아왔다. 글을 쓰고 싶다면 그 이전에 특별한 목적 없이 우선 많은 글을 읽은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나는 늘 TV나 영화 보기를 좋아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우선 그렇게 어떤 영감을 주는 것에 마음을 열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창의력이란 내 손안에 있는 게 아니란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미칠 것 같다고 느낀 적은 없었나?
그럴 때도 있다. 하지만 긴장은 언젠가 풀리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결국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조바심도 사라진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뭔가 잔뜩 쌓여 있는 걸 보면서 원래 그렇게 뭔가를 쌓아두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덩케르크>는 지금까지의 연출작 가운데 처음으로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인데,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5년 전, 제작자이자 아내인 에마와 나는 보트를 가진 한 친구와 함께 도버 해협을 건너갔다. <덩케르크>에 대한 구상은 거기서 시작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경험이었다. 우리가 건너갈 땐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실 영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덩케르크>는 어릴 때부터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명백한 패배였지만 그 패배 속에서 벌어진 대단한 일들을 담은 이야기다. 누군가는 구원을 바라고, 그게 실제로 이뤄지고, 어쩌면 성서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원초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이게 매력적인 이유는 개인의 영웅담이 아닌 집단적 영웅담이기 때문이다. <덩케르크>가 다른 영화와 다른 건 바로 그런 수많은 일원이 하나의 공동체로 완성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영화 역사상 누구도 이 얘기를 들려주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다. 나는 감독으로서 늘 그런 공백을 주시해왔다.

1990년대 초반, 당신은 먼 길을 인내하며 걸어왔다. ‘거절 편지가 산처럼 쌓이던 시절’이라고 스스로 언급한 적도 있는 그 시절에 어떻게 계속 창작적 의욕을 유지했나?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아주 일찍 깨달은 교훈이 하나 있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건 오직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건 오직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상을 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학교 다니면서 늘 시험을 보고 점수를 받다 사회로 나오면 아무도 스스로에게 점수를 매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우린 선택하게 된다. 스스로 만족하는 게 전부인 세계로 들어갈지, 아니면 단지 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볼 것인지. 단 하나의 진실은 스스로의 믿음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남는 건 자신의 믿음과 열정뿐이다. 물론 타인의 조언도 무시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이유는 그걸 사랑하기 때문이다. /글_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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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WARNER BROS., ⒸMelinda Sue Gorden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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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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