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의 여운

'라이프'는 딜레마다.

구승효 총괄사장은 이노을 선생을 따라 소아과 병동을 돌아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데이트인지 사장 순시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썸’이 깨지는 건 복도에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 때문이다. 아이는 이노을 선생한테 엄마가 어디 갔는지 묻는다. 이노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한테 버림받았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이 어른들에게 엄마의 행방을 묻던 아이는 구승효한테만큼은 매달리지 않는다. 소아과 병동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가던 구승효는 아이와 다시 마주치자 이렇게 묻는다. “너 왜 나한텐 엄마 어디 갔냐고 안 물어?” 아이는 대답 대신 울음을 터뜨린다.

<라이프>는 냉정한 현실과 낭만적 희망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드라마다. 병원도 돈을 벌어야 하는 사업체일 수밖에 없다는 비정한 기업 논리와 의사는 돈보다 생명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당위적 직업 윤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메스와 펜이 대치하는 순백의 <라이프> 포스터처럼 말이다.

<라이프>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총괄사장 구승효는 의사들의 낭만적 이중성을 깨부수는 존재다. 더 나아가서 시청자들에게 당위에서 벗어나 현실을 각성시키는 존재다. 소아과 병동 장면은 드라마에서 구승효가 어떤 역할인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언뜻 이노을 선생의 손에 이끌려서 잠시 이상주의와 타협하는 듯 보인다. 시청자들은 몰라도 아이는 알고 있다. 구승효가 철저한 현실주의자라는 걸 말이다. 구승효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대가 현실을 깨닫게 만드는 존재다.

아이에게 돌아오지 않을 엄마가 곧 돌아올 거라고 얘기하는 건 결코 아이를 위한 일이 아니다. 아이의 고통이 아니라 아이에게 현실을 알려주는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착한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에게 헛된 희망을 주는 건 아이의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이때 구승효는 기꺼이 현실을 알려주는 쪽을 선택하는 인물형이다. 헛된 희망이 현실을 악화시킨다는 역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괴물 작가 이수연은 <비밀의 숲>에 이어 <라이프>에서도 냉철한 현실주의로 드라마를 시작한다. 구승효의 첫 등장 신은 의사 사회의 이중성을 날 선 메스로 단칼에 수술해버리는 명장면이다. 그동안 드라마에서 그려졌던 병원 조직은 본질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인류애적 집단이었다. 반면 <라이프>의 병원은 온갖 모순과 비리를 숨긴 채 개인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여느 인간 조직과 다를 바 없었다. 구승효는 병원도 다르지 않다는 현실을 까발리면서 등장한다. 구승효는 아무리 잘 포장해도 병원을 장악하려는 거대 재벌의 앞잡이다. 그런데도 구승효가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게 되는 건 이런 현실주의의 통쾌함 때문이다.

구승효 총괄사장은 화정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는 본색을 여실히 드러낸다. 병원의 의료 정보 개당 가격을 놓고 그룹 계열사인 생명보험사와 밀당을 한다. 동시에 재벌 2세 회장 앞에선 개처럼 긴다. 그런데도 구승효가 매력적인 건 그가 신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구승효가 기업화와 자본화를 강조하는 건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병원 경영을 합리화하는 것이 병원이 지닌 사회적 부가가치를 최대화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구승효에게 병원은 병도 고치면서 돈도 버는 ‘기업’이다. 두 개의 가치는 구승효에겐 모순되지 않는다. 그걸 모순된다고 여기는 자를 경멸할 뿐이다. 구승효 안에서 생명과 돈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지 않는 건 그 모순을 통합하도록 철저하게 개조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구승효는 이른바 ‘호모 이코노미쿠스’다.

<라이프>는 구승효를 외환 위기 때 집안의 사업 실패와 몰락을 경험한 IMF 세대로 묘사한다. 아주 짧은 한 문장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설명이다. 병원이라는 성 안에서 외환 위기의 풍랑을 피해 간 낭만 닥터들이 구승효 같은 사람들이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현실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이노을은 구승효에게 끈질기게 묻는다. “사장님의 선택은 처음부터 계획됐던 것인가요, 아닌가요? 그것에 따라 사장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거든요.” 경제적 선택의 순수성을 따지는 순진무구한 이노을은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경제적 선택에는 동기의 합리성이 중요할 뿐 동기의 윤리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노을은 상국대 병원에서 구승효가 일으키는 혁신이 반갑다. 그러나 정작 혁신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다. 혁신을 경제가 아니라 윤리의 잣대로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승효의 경영 논리가 쾌도난마처럼 병원을 혁신하던 드라마의 초·중반이 <라이프>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구승효 사장이 유기견 센터에 자원봉사를 다녀온 다음 종합병원에 수의과를 설치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는 장면까지가 압권이다. 기업 경영자의 선택은 언제나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상국대 병원의 낭만 닥터들처럼 그 이중성을 비겁하게 숨기거나 구승효 사장처럼 그 이중성을 당당하게 인정하거나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라이프>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기업 조직은 결국 돈이냐, 사람이냐의 선택을 강요받는다. 병원이라고 하면 사람이 먼저여야 한다고 얘기하던 사람도 그걸 기업이라고 고쳐 쓰면 이내 이윤 추구가 우선이라는 논리에 동의한다. <라이프>가 말하고 싶은 건 이제 어떤 조직도 더 이상 기업이기를 거부하거나 부정하기 어렵다는 현실이다. 생명을 최우선시해야 하며 그걸 위해 엄청난 적자까지 합리화되는 병원조차도 말이다. <라이프>에서 구승효의 모든 선택은 결국 돈과 사람이라는, 충돌하는 가치 사이의 모순을 통합하는 행위들이다. 그렇게 CEO는 수많은 모순 속에서 합리적 선택을 하는 직업이다.

아쉽게도 <라이프>는 중반 이후 긴장감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상국대 병원에 신원 미상의 코마(혼수상태) 환자가 실려 오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라이프>는 병원을 배경으로 한 냉철한 기업 드라마에서 미스터리 스릴러로 장르가 전환된다. 구승효가 아니라 화정그룹의 재벌 회장이 최종 보스로 등장하면서 오히려 드라마가 던졌던 메시지가 훼손된다. <라이프>의 매력은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현실을 말한다는 데 있었다. 재벌이라는 절대 악이 등장하면서 애써 구축했던 드라마의 구조가 무참하게 무너졌다. 무엇보다 아쉬운 건 극의 중심이 구승효에서 낭만 닥터들로 옮겨가면서 이어진 나이브한 전개다. 예진우 선생과 주경문 과장이 사고사로 숨진 환자의 유족을 그저 감정에 호소해서 설득해내는 장면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었던 건 또다시 구승효의 존재 때문이었다. 구승효는 상국대 병원 낭만 닥터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조금씩 설득되는 모습을 보인다. 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업계의 논리에 동의하되 업계 안에선 결코 생각하기 어려운 창의성으로 산업을 혁신하는 경영자의 태도다. 동시에 <라이프>는 구승효 이전에는 이보훈 원장이라는 훌륭한 CEO가 상국대 병원에 있었다는 사실도 암시한다. 역설적이지만 문성근이 연기한 부원장의 연극적 방백 덕분이다. “너희들 모두가 이보훈을 뜯어먹고 살았잖아.”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중적 선택으로 해결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숙제다. <라이프>에서 구승효의 존재가 압도적이었던 건 우리 모두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CEO를 애타게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현실을 깨닫게 하고 현실을 헤쳐나갈 길을 알려줄 사람 말이다. <라이프>는 말한다. 그렇게 돈과 생명, 돈과 인생, 돈과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당하는 자본주의적 딜레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라이프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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