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의 스쿠터 운전사

공유 전동 스쿠터를 타고 나니 서울, 파리, 샌프란시스코 어디든 축지법을 쓰는 듯 돌아다녔다.

갈색 스웨이드 재킷, 하늘색 터틀넥 니트 톱, 붉은색 폴로셔츠, 검은색 바지, 남색 니트 로퍼 모두 가격 미정 프라다. 은색 헬멧 사진가 소장품.

이번에도 별수 없나 싶었다. 매 시즌 파리 패션 위크를 취재할 때마다 에디터들을 가장 애먹게 만드는 건 교통 체증이다. 파리의 교통 체증은 악명 높다. 도로는 좁고 차는 많아서다. 파리 패션 위크는 파리라는 도시 전역에 흩어져서 열린다. 2019 F/W 시즌 에르메스 쇼가 유서 깊은 프랑스 교육진흥위원회 가구 창고에서 열린다면 벨루티 쇼는 유명한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리고 디올 맨 쇼는 웅장한 앵발리드 앞에서 열리는 식이다. 매 시즌마다 쇼장이 계속 바뀌고 에디터들은 낯선 거리에서 낯익은 교통 체증과 씨름해야 한다. 덕분에 파리 전체가 런웨이가 되지만 그 탓에 에디터들은 하루 종일 파리 이곳저곳을 오가느라 죽어날 수밖에 없다. 이번 파리 패션 위크에도 그렇게 쇼를 보는 시간보다 쇼를 보러 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비효율적인 취재 동선을 따라다니던 참이었다.

파리 오페라하우스 근처에서 디올 맨의 리시(re-see)가 열리는 앵발리드 다리 너머 디올 본사로 가야 했다. 평소 같으면 택시를 잡든 우버를 타든 했을 일이었다. 파리의 교통 체증을 감안하면 약속 시간에 늦을 건 뻔했다. 문득 길거리에 서 있는 형광 초록색 전동 스쿠터가 눈에 들어왔다. 살금살금 다가갔다. ‘라임’이라는 상표가 붙어 있었다. 파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이런 전동 스쿠터를 여러 번 목격한 기억이 났다. 그랬다. 이것이 소문으로만 들었던 공유 전동 스쿠터였다.

사실 지난해 실리콘밸리 취재를 갔을 때도 샌프란시스코 도심 여기저기에서 공유 전동 스쿠터를 목격했다. 버드였다. 버드는 실리콘밸리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유니콘 기업이 됐다. 버드에 대한 호기심은 컸지만 막상 버드를 타볼 생각은 못 했다. 파리에서 마주한 라임이 버드의 유력한 경쟁자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역시나 목이 말라야 우물을 파는 법이다. 스마트폰에 재빨리 라임 앱을 다운로드했다. 신용카드를 등록하고 이용 방법을 숙지하는 데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게 스마트 모빌리티였다.

그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파리에서 축지법이라도 쓰고 있는 듯했다. 평소에 30분도 더 걸리는 거리를 10분 만에 주파했다. 덕분에 디올 맨의 리시를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리시란 쇼를 통해 공개한 착장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주는 리뷰 행사다. 이번 디올 맨 쇼는 어떠한 장식도 배제한 채 오직 검은색 런웨이에 하얀 조명만으로 무대를 꾸몄다. 움직이는 무빙워크 런웨이 위에 모델들을 조각상처럼 세워놓았다. 쇼가 아니라 옷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였다. 그렇다면 디올 맨의 리시에서 가능한 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가능한 한 자세하게 옷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라임 덕분에 그게 가능했다. 이동 시간을 아껴서 업무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라임과 버드 서비스를 검색했다. 물론 있을 리가 없었다. 공유 자동차 서비스는 지난 수년 동안 차례로 한국 시장에서 쓴맛을 봤다. 우버도 퇴출됐고 차차는 멈춰 섰고 쏘카도 힘들고 카풀은 더 힘들다. 타다가 유일한 희망이다. 글로벌 기술 혁신의 화두는 연결에서 이동으로 이동한 지 오래다. 2010년대가 스마트폰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로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기술의 시대였다면 2020년대는 스마트 모빌리티를 활용해 인간과 인간에게 이동하는 기술의 시대다. 이용자에게 언제 어디서나 적재적소의 이동 수단을 제공하는 공유 자동차 서비스는 스마트 모빌리티의 핵심이다. 정작 한국은 공유 자동차 기업들을 차례로 퇴출시켰다. 한국이 공유 경제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혁신은 파괴를 수반한다. 실력 있는 정부는 시장에서 일어나는 혁신을 가속화하면서 파괴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줄 안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는 말이 있다. 정부는 절대 시장을 이기려 들지 말고 시장과 같이 가야 한다는 격언이다. 정작 한국의 모빌리티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이렇게 자조한다. “한국은 정부의 실력이 쓸데없이 너무 좋아요. 그래서 시장을 이겨버려요. 하루아침에 블록체인을 망가뜨리는 거 보세요.” 그나마 타다가 선전하고 있는 것도 95조에 달하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의 틈새를 기적적으로 찾아냈기 때문이다. 정부의 철통 규제를 시장이 요리조리 우회한 결과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은 사실상 스마트 모빌리티 비즈니스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법이다. 택시 같은 기존 운수 사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빌리티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이 법을 통째로 암기할 정도다. 한국에서 창업하려면 기술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기보다 법부터 외워야 한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런데 라임이나 버드가 있을 리가 없다. 공유 택시도 없는 나라에 공유 전동 스쿠터가 있을 리가 있나. 서울이 파리나 샌프란시스코에 비해 얼마나 뒤처진 도시가 돼가고 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에도 킥고잉이라는 공유 전동 스쿠터 서비스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지난해 하반기에 강남권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모양이다. 당장 킥고잉 앱을 다운로드했다. 강남 일대에 킥고잉이 흩어져 있는 게 지도상으로도 확인됐다. 한참을 걸어서 겨우 강남 주택가 골목에서 킥고잉 한 대를 찾아냈다. 당장 탔다. 사용법은 파리에서 탔던 라임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 서울에서도 축지법을 쓸 수 있게 됐다.

공유 전동 스쿠터는 도시에서 단거리 이동의 개념을 바꿀 게임 체인저다. 장거리 콜만 선호하고 좁은 골목길에 들어가길 꺼리는 택시의 스마트한 대안이다. 매연이 없으니 공해도 없다. 앉아서 타는 자전거와 달리 서서 타기 때문에 복장의 제약도 덜하다. 파리 패션 위크에서 드레스업을 하고도 얼마든지 탈 수 있다는 말이다. 공유 서비스니까 목적지에 도착하면 두고 들어가면 그만이다. 다음 이용자가 알아서 타면 된다. 공유 경제의 무덤에서 피어난 킥고잉의 존재가 너무 반가웠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만 경험하면 다들 금세 공유 전통 스쿠터의 편리함에 길들여지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편리한 신기술은 심리적 진입 장벽을 조금만 낮춰주면 금세 전파된다. 누군가 옆구리만 살짝 찔러주는 넛지만 해주면 된다. <에스콰이어>가 공유 스쿠터 확산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줘야 한다고 확신했다. 지구 환경을 지키고 시장을 혁신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에스콰이어>의 정신이다.

수소문 끝에 킥고잉을 론칭한 스타트업 울룰로를 찾아갔다. 10명 정도의 직원이 근무하는 작은 벤처기업이었다. 최근에 사무실을 이전해 간판조차 없었다. 문득 초창기 티몬과 쿠팡의 단칸 사무실로 취재하러 갔던 기억이 났다. <에스콰이어> 같은 패션지가 왜 자신들한테 관심을 갖는지 의아한 눈초리였다. 역시나 언론에 대한 경계심도 갖고 있었다. 적잖은 초창기 스타트업이 취재를 빙자한 일부 언론의 무리한 광고 영업 탓에 내상을 입곤 했다. 킥고잉이 서울의 도심 풍경을 바꾸는 데 무엇으로든 도움이 되고 싶다고 진심으로 설명했다. 예상대로 킥고잉은 날이 풀리는 3월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서비스 확장을 준비 중이었다. 아직 강남권을 중심으로 350대 수준인 스쿠터 숫자를, 광화문을 비롯한 서울 도심 전역을 대상으로 1만 대까지 늘릴 작정이었다. 킥고잉과 비슷한 서비스를 하는 경쟁 업체도 생겨날 모양이었다. 2019년이 스마트 모빌리티 원년이 될 거란 모빌리티업계의 전망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에스콰이어>가 그런 혁신을 돕고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언론의 소명이고 기자의 보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3월호 <에스콰이어>에는 킥고잉 서비스를 소개하는 패션 화보 한 컷이 실렸다. 프라다를 입은 패션모델이 경복궁 영추문 앞에서 킥고잉을 타는 장면을 신은지 에디터가 스타일리시하게 연출해줬다. 사진 아래에 이렇게 썼다. “킥고잉이 서울의 스타일을 바꿉니다.” 이렇게 <에스콰이어>의 작은 노력이 더해져 서울의 풍경이 더 나은 모습으로 바뀌길 바란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교통 체증이 줄어들고 미세먼지가 줄어들고 주차 전쟁이 줄어든 내일의 서울을 상상한다. 오늘의 파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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