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 월드

'미스터 션샤인'이 '도깨비'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김은숙 작가의 저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미스터 션샤인'이었다.

‘기주’라는 이름이 이토록 사랑받긴 처음이었다. <파리의 연인> 덕분이었다. 남자 주인공 이름이 기주였다. 다들 모였다 하면 기주 얘기만 했다. 물론 신기주 얘기가 아니었다. 한기주 얘기였다. <파리의 연인>의 주인공 한기주는 국민의 연인이었다. 다들 하도 기주, 기주 하기에 한번 찾아나 봤다. 드라마에 빠져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급기야 기주가 기주를 기주로 착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일상생활에서도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무리수였다. 그것이 김은숙 드라마와의 첫 번째 인연이었다.

솔직히 <파리의 연인>을 보고 나서도 작가 김은숙이라는 이름 석 자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김은숙이라는 이름을 되새기게 된 건 10년 뒤 만난 또 다른 김은숙 드라마 때문이었다. <신사의 품격>은 김은숙 드라마 스타일이 완성된 작품이었다. 우선 4명의 남자 주인공이 만들어내는 ‘브로맨스’가 드라마 전면에 부각됐다. 자연스러운 구어체와 억지스러운 문어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갔던 김은숙 작가의 언어유희가 ‘은숙체’로 완성된 것도 <신사의 품격>에서였다.

<에스콰이어>에서 일하면서 김은숙 드라마가 대한민국 남성 문화에 끼치는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김은숙 작가는 여자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남자들은 선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남성상을 만들어냈다. 김은숙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은 당대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매력과 능력을 갖춘 존재들이었다. <파리의 연인>의 기주도, <신사의 품격>의 4총사도 모두가 전성기의 남자들이었다. 전성기의 남자라는 뜻의 영어 표현은 ‘Man at his best’다. <에스콰이어>가 반세기 넘게 지켜온 가치관이다. <에스콰이어>에 김은숙은 숙명일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남성상을 제시한다는 시대적 역할을 나눠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편집장을 맡고 나서 <도깨비>의 공유와 이동욱, 그리고 <태양의 후예>의 송중기까지 김은숙의 남자들을 <에스콰이어> 커버스토리로 다룬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가운데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은 <도깨비>다. 전작 <태양의 후예>도 좋다. 아직까지도 편집부 단체 카톡방에서 <태양의 후예>의 이모티콘을 날릴 정도다. 가장 좋아하는 이모티콘은 유시진 대위가 서대영 상사에게 “둘이 있으니까 시너지가 납니다”라며 어깨동무를 하는 장면이다. 전우애로 굳게 단결하는 <에스콰이어> 편집부의 분위기에 썩 잘 어울린다(고 편집장 혼자만 생각한다). <태양의 후예>는 김은숙 스타일을 김은숙 장르로 완성시킨 작품이다. 브로맨스에 ‘시스맨스’가 가미됐고 김은숙 작가의 언어유희에 연출자 이응복 감독의 군사작전급 액션 스케일이 덧붙었다. 무엇보다 <태양의 후예>는 다층적인 드라마였다. 겉으로는 로맨스 장르였다. 김은숙 작가는 죽이는 군인과 살리는 의사라는 두 주인공의 엇갈린 직업을 통해 국가란 무엇인지, 의무란 무엇인지, 선택이란 무엇인지를 캐묻고 있었다. 단지 그런 메시지를 드라마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사랑 이야기와 말장난이라는 달콤한 볼거리들 사이에 은근히 숨겨놓았을 뿐이다. 상업적인 이야기 속에 철학적인 메시지를 먹기 좋게 버무려놓는 실력은 이미 할리우드의 특급 작가들을 능가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태양의 후예>보다 <도깨비>를 최고로 치는 건 김은숙 작가가 <도깨비>로 스스로의 한계마저 초월해버렸다고 봤기 때문이다. 김은숙은 본질적으로 로맨스 작가다. 김은숙 작가는 전생과 현생을 오가는 도깨비 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과 만남과 이별이라는 인생의 궁극적 물음을 던진다. <도깨비>는 사랑 이야기라는 예쁜 술잔에 종교와 철학이라는 숙성된 술을 담아 시청자와 밤새 인생을 논한 작품이었다. 김은숙 작가는 <도깨비>에서 김신과 저승사자와 지은탁이라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을 창조해냈다. 로댕은 자신의 작업을 돌을 조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돌 속에 갇혀 있는 조각상을 꺼내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은숙이 김신이라는 남자를 만들어낸 것도 로댕과 같았다. 공유라는 배우의 내면에서 김신이라는 캐릭터를 꺼내듯 작품을 썼다. 그래서 드라마 속 김신은 현실 속 공유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지은탁 역시 그대로 배우 김고은이었다. <도깨비>를 다시 보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젊은 배우 김고은의 저력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절제된 공유와 활기찬 김고은은 완벽한 도깨비 부부였다. <도깨비>는 판타지였지만 드라마 속에서 납득이 되지 않는 사건과 대사와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도깨비>로 김은숙 작가는 자기 완결적 세계관을 지닌 김은숙 월드를 창조했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도깨비>와 비교하게 됐다. 김은숙 작가가 과연 <도깨비>를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했다. 솔직히 중반까진 실망스러웠다. 구한말 경어체를 특유의 은숙체로 구현한 대사는 나름 중독성을 발휘했다. 김은숙 특유의 브로맨스가 <미스터 션샤인>에선 자꾸만 클리셰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유진 초이와 고애신의 사랑도 그들끼린 국적과 신분을 초월하느라 애달프다지만 생사를 초월한 <도깨비>의 사랑에 비하면 덜 비극적이었다. 조선을 구해보겠다는 주인공들의 노력 역시 역사의 결말을 아는 입장에선 흥미가 떨어졌다. 서로 마주 보고 있으되 서로 어루만지지도 못하는 배우 이병헌과 김태리의 안타까운 눈빛과 안정된 발성만큼은 참 보기도 듣기도 좋았다. 그나마도 늘어지면서 지리해졌지만 말이다. 드라마 중반까지만 해도 김은숙 작가가 도대체 왜 100년 전 구한말로 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은숙 작가의 저력을 새삼 느낀 건 <미스터 션샤인>이 후반부로 접어들면서부터였다. 브로맨스고 언어유희고 다 집어치우고 드라마가 비장한 결말로 치달아가면서 겨우 집중력이 되살아났다. 그때서야 비로소 김은숙 작가가 <미스터 션샤인>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깨달았다.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고애신이 조선의 은유라는 건 모를 수가 없다. 유진 초이와 김희성과 구동매는 모두 조선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배신을 당했다. 고애신을 지키는 것은 자신을 버린 조선을 지키는 것이다. 세 남자는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모순을 극복한다. 세 남자는 모두 허물어지는 세상에서 새로 태어나는 세상을 지키는 쪽으로 나아간다.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깨닫는다. 그것은 결국 고애신을 지키는 쪽이었다. 생각해보면 김은숙의 남자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언제나 책임감이었다. <신사의 품격>의 철부지 네 남자도 결국 나이에 걸맞은 책임을 지게 되면서 마침내 성장한다.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 대위는 배우 송중기처럼 책임감 강한 남자였다. <도깨비>의 김신은 죽음까지 초월하며 사랑을 책임지기 위해 분투한다. <상속자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김은숙 작가에게 가장 멋있는 남성상은 잘생긴 남자도 말 잘하는 남자도 아니었다. 자신의 사랑과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남자였다. 사실 책임감이란 단어는 어감부터가 참 고색창연하다. 어쩌면 그래서 김은숙 작가는 고색창연했던 100년 전, 이제는 멸종된 남자들에게 새삼 주목한 건지도 모른다. 시대의 무게를 책임졌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궁극의 멋스러움과 진정한 섹시함은 인생과 세상과 사랑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에서 나온다.

이번에도 <에스콰이어>한테 김은숙은 숙명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의 세 남자 주인공 유진 초이와 구동매와 김희성은 시대와 맞서기 위해 총과 칼과 글이라는 각자의 무기를 선택한다. 총과 칼과 글이라고 쓰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라고 읽으면 고스란히 <에스콰이어>가 다루는 주제가 된다. 결국 그들 모두가 미스터 에스콰이어다. 100년 전 경성 신사 김희성은 100년 후 서울 남자들을 위해 명언을 하나 남겼다.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뭐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10월호 <에스콰이어>에도 역시나 그렇게 아름답고 그래서 유용한 것들이 가득하다. 문득 처음 기주와 김은숙한테 홀렸던 그때처럼 무리수를 두고 싶어진다. “L은 러브고, H는 허그라면, E는 <에스콰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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