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와 혁신 사이

블록체인 시대에 왜 스위스의 작은 마을이 유명해졌을까?

취리히 공항 바닥의 석재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고급스러움은 화려함에서 오지 않는다. 바닥에 깐 석재나 설계의 비례감, 에스컬레이터 끝부분과 바닥이 시작되는 부분의 이음매, 화장실 타일의 간격과 방향제 냄새가 이른바 고급을 이룬다. 취리히 공항은 렌터카 사무실도 깔끔하게 설계했다. 거기서 가장 저렴한 차인 피아트 500 수동을 빌렸다. 갈 곳이 있었다.

취재 목적지는 주크(Zug)였다. 주크는 취리히 근처의 작은 도시로 인구가 2만5000명 정도다. 스위스는 26개의 주(canton)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주크주와 주크시는 존재감이 꽤 낮은 편이다. 그런데 2018년 들어 주크시가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주 전체 인구가 12만5000명에 불과한 주크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크립토밸리 때문이었다. 주크에는 암호화폐 관련 업체가 밀집되어 있다. 2018년 3월 21일 <파이낸셜 타임스> 기사에 대략의 일대기가 나와 있다. 시작은 2013년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한 거버스(Johan Gervers)가 모네타스(Monetas)를 세웠다. 2014년에는 비트코인의 초기 개척자인 찰리 슈렘(Charlie Shrem)이 주크에 비트코인 스위스를 열었다. 그리고 비탈릭 부테린이 왔다. 그는 비트코인에 이어 시가총액 2위인 암호화폐 이더리움을 만들었다. 이더리움 본사도 주크에 있다. 왜 스위스일까? 왜 주크일까? 취리히도, 베른도, 바젤도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피아트의 수동 변속기를 움직거렸다. 취리히 공항에서 목적지까지는 40분 거리였다. 이날 처음 만나기로 한 사람은 주크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입구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오라고 했다.

1960년대까지 주크는 스위스에서 가장 못 사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낮은 법인세와 전향적인 기업 유치 전략으로 가난에서 벗어났다.

“몇 년 전에 학교로 돌아가 옥스퍼드 대학에서 금융 석사 학위를 받았어요. 논문 주제를 찾다 이더리움을 알게 됐죠.”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 안에서 샘 채드윅이 말했다. 주크에는 톰슨 로이터의 본사가 있었고, 채드윅은 톰슨 로이터에서 일하며 크립토밸리 어소시에이션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이런 시스템이 금융계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란 걸 깨닫고 논문 주제를 이더리움으로 잡았어요. 논문을 쓰기 위해 이 산업과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했죠. 그러면서 점점 이 업계 사람들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 알게 된 세 명이 정식 단체를 만들기로 했죠. 블록체인의 결정권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생태계를요. 톰슨 로이터에서의 제 일도 변했어요. 이제 저는 톰슨 로이터의 블록체인 전략 팀장이에요. 전통적인 금융 데이터를 블록체인 데이터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어요.” 석사 학위 논문이 인생을 바꾼 셈이었다.

“전혀 알 수 없어요. 무척 어려운 이야기예요.” 채드윅은 무책임한 영업 사원처럼 블록체인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다. 그는 블록체인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했다. “100% 긍정적이라고 볼 순 없어도 잠재력이 있는 기술인 건 맞죠. 여전히 극 초반 단계지만요.” 그때 나는 블록체인 기반 기술 중 암호화폐만 생각했던 터라 리스크가 없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리스크 문제가 아니라 애플리케이션 문제예요. 이 기술을 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생긴다면 이 기술 구조가 미래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수 있겠죠. 문제는 새로운 회사가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면 기존 회사가 그걸 위협으로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리스크는 테크놀로지가 아니에요. 모든 새로운 기술은 옛날 비즈니스 모델과 경쟁하는 겁니다.”

2018년 2월 초에는 국회입법조사처가 국회의원 이학영, 김한표, 박선숙과 함께 ‘가상 통화 규제의 쟁점과 개선 과제’를 주제로 회의를 열었다. 2월 27일에는 정병국 국회의원과 대한변호사협회 주관으로 ‘법적 측면에서 본 가상화폐 제도화 및 이용자 보호’를 주제로 한 회의도 열렸다. 두 회의록의 공통점은 가상화폐와 암호화폐에 대한 용어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상화폐와 암호화폐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며 한국에서 열풍이 불었던 비트코인은 암호화폐에 속한다. 두 회의록 모두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생길 경우 고쳐나가자는 입장과 새로운 기술의 문제가 생길 테니 우선 엄격하게 막고보자는 입장이 대립한다. 역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옛날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이 경우 옛날 비즈니스 모델은 한국형 규제인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 회의록을 읽고 있으니 채드윅의 통찰이 떠올랐다.

“여기는 뉴스 에이전시지만 뉴스 에이전시는 우리 일에서 아주 작은 영역이에요.” 채드윅이 이런 통찰력을 가진 건 그가 저널리즘 비즈니스 분야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블록체인으로 치면 암호화폐가 신기술, 기존 금융권이 옛날 비즈니스 모델이다. 저널리즘 비즈니스로 치면 SNS 서비스가 신기술, 기존 저널리즘이 옛날 비즈니스 모델이다. “우리의 거의 모든 비즈니스는 결정권자를 위한 정보 생산입니다. 금융권, 법조계, 세무 관련 정보예요. B2B입니다. 물론 로이터의 B2C 모델도 있지만 우리가 생산하는 거의 모든 뉴스는 금융 서비스 산업에 대한 거예요. 우리 회사에는 2500여 명의 저널리스트가 일하고 있지만 로이터의 매출은 10%가 안 됩니다. 저널리즘이 위기라고 하지만 그건 신문 저널리즘 이야기예요. 우리는 B2B 저널리스트입니다. 패션이나 스포츠 뉴스를 덜 만드는 대신 기업 뉴스에 집중해요. 우리의 목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뭔가의 시장 가격을 바꾸는 거예요.” 그는 저널리즘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암호화폐 생태계에도 잘 적응할 것 같았다.

스타트업 센터. 우체국 거리인 포스트플라츠에 있다(실제 우체국은 없다). 입지와 건물의 용도 변경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다음 사람은 주크의 스타트업 센터에 있었다. 옛날 우체국을 공용 사무실로 개조한 곳이었다. 근대국가의 상징인 우편 서비스를 하던 건물을 스타트업 센터로 바꾼 것에서도 시대의 변화가 느껴졌다. 여기서 안드레 볼케를 만나기로 했다. 밸리디티 랩스라는 회사의 CEO라고 했다.

“코스를 만들어요.” 볼케는 말이 무척 빨랐다. “블록체인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코스입니다. 교육 기간에 따라 세 종류쯤 돼요. 워크숍 요청이 계속 들어오더라고요. 스마트 계약이 무엇인지, 블록체인 기술로 우리가 만들어줄 수 있는 솔루션이 무엇인지.” 천천히 물었다. 본인이 블록체인에 기반한 플랫폼을 만든다는 건지. “그렇죠. 손님을 위한 플랫폼을 만드는 겁니다. 블록체인, 특히 거의 이더리움 기반으로요.” 새로운 시스템으로 수익을 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보를 모아 글이라는 형태로 정리하는 내 일에 비하면 확실히 최신형 직업이었다.

“(직원은) 스위스에 몇 명, 독일에 두 명 있어요. 텍사스에도 한 명 있어요.” 볼케의 회사는 인력 구조도 새로웠다. 다만 온라인 기반이라도 해야 할 일은 있었다. “스위스 사람도 고용했어요. 이곳의 지역경제에 기여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현지인 고용은 주크에서 블록체인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몇 안 되는 의무 가운데 하나다.

“기술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여기에 전문가가 있지는 않아요. 기술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개인입니다. 블록체인 기술은 아주 젊은 기술이에요. 나는 이 기술의 권위자가 없다는 사실이 맘에 들어요.” 그가 주크에 온 건 아주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크립토밸리는 주크에서 2014년쯤 시작됐을 거예요. 처음엔 실리콘밸리와 비슷했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몇 년 지나자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주크로 모여들었어요. 주크는 세율이 매우 낮거든요.” 결국 세금이었을까? 중요한 이유는 될지라도 전부는 아니었다. “다른 점도 있습니다. 주크는 암호화폐라는 신(scene)을 껴안았어요. 주크는 시 차원에서 나서서 ‘우리는 비트코인을 받아들입니다’라고 했어요. 이미 2년 전에 말이죠. 이런 작은 동네가 새로운 변화에 누구보다 빨리 대응한 거예요. 물론 블록체인 관련 회사들이 여기에 회사를 차린 이유는 다른 나라에서는 이 비즈니스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주크는 작은 도시다. 작은 도시의 숙제는 어디나 비슷하다. 큰 도시에 많은 기회가 있다. 작은 도시에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공간이든 업계든 뛰어난 두뇌가 들어와야 발전한다. 작은 도시는 매력이 없어서 사람이 안 오고, 사람이 없어서 매력이 사라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역시 작은 도시에 일자리가 많지 않은 건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다. 주크는 외부 업체의 기업 활동을 도우면서 고용을 아웃소싱했다.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서 세금과 사람이 모이게 했다. 이렇게 되도록 주크시가 한 일은 하나뿐이었다. 껴안은 것.

“전력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볼케에게 블록체인의 미래를 묻자 그는 큰 단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주었다. “지금 전력은 늘 필요해요. 그런데 전력 자체는 2000년 전부터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모든 사람이 쓰지는 않았죠. 지금은 당연히 모두 전력을 쓰고, 심지어 전력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없으면 이상하다고 여기죠. 블록체인 기술은 전력과 비슷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 있는 게 아니라 없으면 이상한 게 되는 겁니다.” 그의 말이 얼마나 맞을지 궁금했다.

“우리는 크립토밸리가 되기 위해 드라이빙을 걸지 않았어요.” 혈액순환이 잘되는지 얼굴이 뽀얀 귀도 부겔로니는 말도 천천히 했다. 그는 주크주의 경제 프로모션 부서에 있는, 크립토밸리 관련 프로젝트의 주요 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은 3D 프린팅 시대니까 주크에서 3D 프린팅을 하자’처럼 말하지 않아요. 우리는 세금이 낮고, 수준 높은 인재를 지원할 수 있고, 열려 있고 전향적이며 자유로운 분위기가 있어요. 엄격하지 않고, 넓게 열려 있어요. 그래서 어느 비즈니스 업계에서 갑자기 우리를 찾아내는 거죠. ‘아, 여기가 좋겠군’ 이러면서요. 주크에는 지금 블록체인 말고도 다섯 개의 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되어 있어요.”

주크가 산업 클러스터가 된 이유는 역으로 이 지역의 덜 유명한 입지와도 관련이 있었다. 주크는 지리적으로 취리히와 취리히 공항을 공유한다. 스위스 항공의 허브 공항이라 주요 대륙으로 두루 갈 수 있는 취리히 공항을 함께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주크의 모든 것이 취리히보다 싸다. 법인세부터 주택 임대료까지 말이다.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스위스 수준의 높은 치안과 다양한 사회보장 시설을 취리히보다 저렴한 비용에 이용할 수 있다. 굳이 한국으로 비유하면 동인천 같은 곳에서 첨단 IT 산업 클러스터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주크 정부가 한 일은 하나뿐이다. 빠르고 전향적인 결정이다.

“세계에서 정부를 향한 결제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받아주는 곳이 몇 곳이나 있겠습니까?” 채드윅은 주크가 왜 좋은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주크는 작으니까 전화하면 돼요. 미팅하자, 커피 마시자, 이렇게 말하며 이야기가 됩니다. 어차피 주크는 작은 마을이에요. 여기에 크립토밸리 관련인 2500명이 들어올 수는 없어요. 작으니 모두 가깝고, 잘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건 주크의 과거와도 연관이 있다. “주크는 스위스에서 가장 가난한 편이었어요. 그래서 비즈니스에 아주 친화적인 곳이 되었죠.” 주크는 낮은 법인세로 글로벌 기업을 끌어들였다. 동시에 전향적인 자세로 신규 사업도 끌어들이고 있다. 제한된 상황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곳만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주크는 작고 사람이 없는 환경을 자신만의 경쟁력으로 만들어냈다. 버리는 컨테이너 비닐을 가방으로 만드는 프라이탁처럼.

암호화폐에 대한 열광적인 투기가 일어난 지 6개월 정도 지났다. 그동안 정부는 암호화폐 계좌 개설을 금지시켰다. 새로운 기술이나 변화가 찾아올 때 규제를 할지 말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하기에는 너무 크고 모호한 주제다. 다만 확실한 게 있다. 새로운 게 더 좋다면 새로운 문물은 어떻게든 규제를 초월한다. 1722년 크리스마스에 영국은 거의 모든 면직물 사용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국내 섬유 산업을 구제하기 위한 규제였다. 사람들은 멀쩡한 인도산 면이 있는데도 한여름까지 양털 속옷을 입어야 했다. 이런 현상은 오래갈 수 없다. 영국인들은 국내산 면직물 생산을 위해 혁명적인 기계를 만들어냈다. 그게 산업혁명이다. 사람들의 편리를 넘어서는 규제가 오래가기는 힘들다는 것을 증명하는 여러 역사적 사례가 있다.

지금도 블록체인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지난 8월 초에는 포르쉐 디지털의 전문가들이 한국에 와서 세미나를 열었다. 블록체인 기술을 자동차에 접목하기 위해서였다. 블록체인 기술의 본질은 어떤 것이 기록되는 장부를 탈중앙화한다는 것이며, 암호화폐는 블록체인 기술의 한 용례에 불과하다. 광풍과 규제가 지나고 정치적 말싸움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세상은 차츰차츰 변한다. 세상이 바뀌면서 기회 역시 거센 물살 속의 보물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주크는 기회를 잡았을까? 아니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이때가 아니었다면 주크가 이렇게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어쩌면 블록체인 기술의 최대 수혜자는 투자자도 기술의 창시자도 아닌 주크라는 공간 자체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주크는 잃은 게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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