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여행

최초의 강남을 관통하던 간선도로, 노량진로와 영등포로.

노량진 본동

서울 최초의 강남은 지금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가 아니었다. 조선 시대의 수도 한양을 계승한 식민지 시대 조선의 중심 도시 경성이 처음으로 한강을 넘어 행정구역을 확장한 것은, 1936년에 오늘날의 흑석동, 상도동, 노량진동, 대방동, 신길동, 영등포동, 당산동, 문래동 등을 흡수하면서부터였다.

물론 오늘날 여의도 섬은 한강 남쪽에 가깝게 붙어 있었고, 여의도는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부른 한양 외곽 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니 서울은 이미 한양 시절부터 한강 북쪽과 남쪽을 포괄하는 도시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 한강 치수 사업을 하기 전까지 여의도는 쉼 없이 형태가 바뀌는 모래톱에 지나지 않았고, 도시 또는 마을이라 불릴 만큼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여의도는 행정구역상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이지만 그 밖의 영등포구와는 구분되고, 또 흔히 강남이라 불리는 ‘강남 3구’와도 구분되는 독자적인 지역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1975년에 서울 강북 남쪽 끝인 남산에 세운 남산서울타워, 1985년에 여의도 섬 동남부에 세운 63빌딩, 2016년에 강남 3구의 동쪽 송파구에 세운 롯데월드타워를, 서울의 중심이 강북에서 여의도를 거쳐 오늘날의 강남으로 옮겨왔음을 보여주는 도시 화석으로 여긴다.

 

 

구 노량진 수산시장

63빌딩에서 동남쪽으로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와 노량진동과 대방동이 바라보인다. 조선 시대에 사대문을 중심으로 자리했던 한양은, 식민지 시대에 용산이라는 신도시를 포함하면서 한강에 다다랐다. 용산에서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 즉 오늘날의 한강대교를 통해 옛 경성-서울 시민들의 인기 피서지였던 노들섬 해수욕장을 지나면 나타나는 첫 강남 땅이 노량진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지하철 9호선 노들역을 중심으로 한 동작구 본동 일대의 노량진이 최초의 강남이라 할 수 있다.

노들역 북쪽에 자리한 노량진 배수지는 제1정수장 또는 인천수도라 불린 정수장이었다. 이곳에서 한강 물을 정화해 인천의 조계지까지 보내던 상수도 파이프가 매설된 것이 지난달에 소개한 수도길이고, 노량진 배수지를 인천수도라 부른 이유도 이것이다. 서울 강북에서 출발한 도로와 철도가 강남 땅에 상륙하는 지점이자 ‘대서울’ 메갈로폴리스가 시작되는 수도길의 출발 지점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63빌딩을 세운 데에서, 서울의 핵심적인 발전 축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노량진에서 서쪽으로 대방동, 신길동을 지나면 1936년 경성에 편입되기 전부터 이미 공업지대로서의 성장이 전망되던 옛 시흥군 영등포읍이 나타난다. 옛 시흥군은 서쪽으로 오늘날의 안산시에서 동쪽으로 오늘날의 강남구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행정단위였다. 처음에는 시흥행궁이 자리한 오늘날의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사거리 일대가 시흥군의 중심지였으나 1930년대에는 시흥군청이 옮겨온 영등포읍이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이 1936년에 경성의 일부가 되면서 경성이 한강 북쪽과 남쪽에 걸치게 되어 오늘날의 서울로 이어진다. 손정목 선생의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와 함께 서울 답사의 지침이 되는 서울시립대학교 염복규 선생의 책 제목대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이었다.

이리하여 용산에서부터 한강철교, 한강인도교를 통해 이어지는 노량진과, 경기도 서남쪽의 큰 행정구역이었던 시흥군의 중심지로 기능하던 영등포라는 두 거점이 한강 남쪽에서 부상하자 경기도에서 1931년부터 한강인도교와 영등포 사이를 잇는 도로를 건설했다. 오늘날의 노량진로, 영등포로와 대체로 겹치는 이 도로가 최초의 강남 간선도로였다. 63빌딩은 이 강남 간선도로의 노량진로 구간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번대방정의 도시 구획 평면도

오늘날의 노량진로, 영등포로를 따라 발달한 지역은 주로 공업지대로 기능했으며, 노량진 본동의 동쪽 흑석동과 남쪽 상도동은 이 공업지대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을 위한 주거지역으로 구상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강남은 동쪽으로 흑석동, 상도동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안양천을 자연 경계로 하는 영등포에 이르는 거대한 공업 벨트였다. 나아가 이 지역은 경성과 인천을 잇는 대경성 메갈로폴리스 공업 벨트 동남부에 해당했으며, 군부대와 군수 공장이 밀집한 부평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중공업 거점이었다. 이 공업 벨트의 핵심이 노량진-영등포 구간이었고 이 구간을 관통하는 길이 노량진로, 영등포로였다. 오늘날에도 이 구간에서는 식민지 시대, 20세기 후기, 21세기 초기의 시층(時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최초의 강남 간선도로 동쪽 끝에 해당하는 노량진 본동의 산등성에서 서북쪽으로 멀리 바라보면 여의도와 용산, 그리고 두 지역을 잇는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넘쳐난 물에 쓸려 사망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강 수사자 조혼비’가 세워져 있는 한강대교 남단 교차로에서 노량진 배수지와 사육신묘를 통과해 서쪽으로 가면 노량진 수산시장이 나타난다. 1927년에 서울역 서쪽에서 시작된 수산 시장이 1971년에 경부선·경인선 철길을 따라 첫 강남 노량진으로 옮겨왔다. 서울역 근처의 수산 시장과 가까운 염천교에 자리했던 청과물 시장도 1975년에 지금의 용산전자상가 자리로 이전했으니 사대문 안에 있던 농수산물 시장이 모두 철길을 따라 식민지 경성 시절 신도시인 용산과 노량진으로 이전한 것이다.

용산청과물시장은 1985년부터 서울 동남부 외곽의 가락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나 노량진수산시장은 그 위치가 크게 바뀌지 않고 구시장 서쪽에 신시장이 개설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언론 보도되었듯이 구시장 건물 철거를 둘러싸고 사건, 사고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 구시장 건물 곳곳에 태극기가 빼곡히 그려져 있는데, 대서울 메갈로폴리스를 답사하다 보면 이렇게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 지점에 태극기가 놓여 있는 것을 자주 본다. 갈등에서 밀리는 측이 ‘이 태극기에 손댈 것이냐’라는 심정으로 태극기를 최후의 보루로 삼은 것으로 추측한다. 태극기가 가득 그려진 건물 너머로 보이는 63빌딩은 여의도가 강북과 첫 강남을 이어주는 중간 지점이었음을 상기시킨다.

노량진수산시장과 노량진역을 통과해 다시 서쪽으로 가면 노량진로와 영등포로가 만나는 대방역이 나타난다. 육군, 해군, 공군, 미군 부대, 정보 부대 등 수많은 군부대가 자리했거나 지금도 자리하고 있는 대방역 남쪽 구역은 현재는 동작구 대방동과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나뉘어 있지만 식민지 시대에는 번대방정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도시 구획이 정비된 강남 신도시였다. 번대방정 중간의 언덕바지에는 법덕온천이라는 온천장이 있어서 한강 북쪽 사람들이 열차나 택시 등을 타고 찾아오는 신혼여행지이기도 했다. 번대방정의 군부대와 법덕온천처럼 군부대와 온천장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계급과 무관하게 모든 부하들에게 온천에서 탕치(湯治)를 하게 한 것이 유명하다. 또 조선 시대에 개발한 온양온천도 근현대 들어 일본군 용산육군병원의 온양분원, 미군과 한국군의 109육군병원 및 국립요양원 등으로 이용되었다.

 

 

신길동 대신시장

이처럼 한때 번대방정으로 묶여 있던 여의대방로 동쪽과 서쪽은 현재 동작구 대방동과 영등포구 신길동으로 나뉘어 있다. 최근 나는 신길동을 집중적으로 답사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신길동이 (1) 구한말-식민지 시기 초기에 철길과 영등포로를 따라 개발된 구역, (2)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 계획적으로 개발된 구역, (3) 해방 후 귀국민, 월남민, 이촌향도민이 거주한 구역, (4) (3)의 일부를 재개발해서 고층 아파트 단지를 세운 구역 등 성격이 서로 다른 여러 시기의 공간이 시층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시층이 존재하는 신길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20세기 중반 서울의 상업 거점’이다. 건축가 황두진 선생은 <가장 도시적인 삶>에서 현대 한국 초기의 야심 찬 도시 프로젝트였던 상가 아파트에 주목했다. 이런 상가 아파트는 신길동에서도 적잖이 확인되는데 특히 신길동 북쪽의 대신시장과 남쪽의 영진시장은 독특한 평면 형태가 인상적이다.

 

 

영등포로

한편 영진시장 옥상에서는 하늘을 향해 튀어나온 철근이 많이 보이고, 영등포로와 영등포로62길이 만나는 지점의 한 건물 외벽에도 철근이 징그러울 정도로 많이 튀어나와 있다. 이렇게 건물 바깥으로 튀어나와 있는 철근은 고도 성장기를 맞이한 국가의 도시에서 언제든 돈을 벌면 건물을 확장할 수 있도록 남겨둔 것으로, 화제작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서도 설명되고 있듯이 전 세계의 개발도상국에서 널리 비슷한 양상이 확인된다. 은행에서 대출 가능한 정도의 신용은 없고, 다른 물건을 사두면 인플레이션 때문에 물건 가치가 떨어지니, 벽돌을 사두었다가 돈이 모일 때마다 철근에 맞춰서 건물을 증축하는 것이 합리적인 경제 행위였던 시절의 유산이다. 한국에서는 20세기 중기의 고도 성장기에 지은 건물에서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건물은 그 지역이 한때 상공업으로 번성한 곳이었음을 증명하는 도시 화석이다.

영등포로는 이 철근 건물 부근에서 두 개의 삼거리와 만나는데, 두 삼거리는 각기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신길삼거리에는 식민지 시대의 2층 상가 건물이 한두 채 남아 있고 그 뒤로 식민지 시대의 골목길과 20세기 후기의 빌라촌, 그리고 21세기 초의 고층 빌딩이 삼문화광장을 이루고 있다. 다음으로 신길삼거리 서북쪽의 이름 없는 삼거리에서는 영등포로62길이 서쪽으로 갈라져 나가는데, 조선 시대 중·하층 서민의 신앙 거점이던 방학곳지 부군당과 식민지 시기의 일식 가옥이 이 길 옆에 자리하고 있어서 영등포로62길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길 끝에는 소화기린맥주-오비맥주공장 시절의 건물이 영등포문화원으로 기능을 바꾸어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이 맥주 회사와 함께 조선-한국 맥주의 양대 축을 이루던 조선맥주-크라운맥주 공장은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간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공장 부지에 지은 영등포푸르지오 아파트 근처에는 여전히 ‘크라운사거리’라는 이름의 버스 승차장이 설치되어 있다.

 

 

크라운사거리

영등포로62길로 빠지지 않고 영등포로를 따라 조금 더 북쪽으로 향하면 신길역이 나온다. 대서울 메갈로폴리스의 3대 간선인 경부선·경인선, 수도길, 경인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이 교통의 요지에서는, 1978년에 세운 ‘영등포 출신 반공순국용사 위령비’, 그리고 2018년에 세운 국기 게양대에 걸려 펄럭이는 새마을운동 깃발이 보인다. ‘박정희 시절’은 이렇듯 여전히 대서울의 거점에 뚜렷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오늘날 서울의 형태를 만들어낸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서 시작된 이번 달 ‘대서울의 길’은 반공과 새마을운동이 여전히 현대 한국의 깊은 곳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끝낸다.

  • Kakao Talk
  • 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