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시스 G90, 럭셔리 2.0

브랜드 2.0시대를 열어가는 제네시스가 G90을 공개했다.

 

GENESIS G90 3.8
엔진 V6 람다 3.8 GDi 최고 출력 315마력/6000rpm 최대 토크 40.5kg·m/5000rpm
변속기 자동 8단 구동 방식 2WD/AWD 크기 5205×1915×1495mm

“무에서 유로의 정신이 우리에게는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이 되겠지만 도전이 있어야 변화가 있고 발전이 있습니다.”

2015년 11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무대에 오른 이는 현대차그룹(HMG) 정의선 수석 부회장이었다. 그날 HMG는 제네시스 브랜드의 출범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제네시스는 HMG가 10여 년을 고민해온 별도의 고급 차 브랜드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십 년을 매달렸는데도 아직 럭셔리 문턱을 넘지 못한 브랜드가 수두룩했다.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덤벼들지 않느니만 못한 분야였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우는 게 먼저다. 이미 내용물로 가득 찬 그릇에는 무엇을 얹든 무의미하게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무에서 유로의 정신’, 현대자동차 그룹 차기 수장의 한마디는 그래서 더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고급 브랜드라는 밥상이 완전히 빈 채인 건 아니었다. 번듯하게 성장해 제네시스 브랜드 출범의 도화선이 된 후륜구동 세단 제네시스가 있었고, 수년 전부터 고급 대형 세단 시장에서 입지를 탄탄히 다져둔 에쿠스도 완전 변경을 앞둔 시점이었다. 두 모델은 새로 시작하는 제네시스 브랜드 안에서 각각 G80와 EQ900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완전 변경 모델인 EQ900의 경우 출시 전 이미 1만 대 이상 사전 계약이 이뤄졌고 이듬해인 2016년 한 해 동안 2만3300여 대가 판매되며 국내 대형 고급 세단 시장을 평정했다. 맏형이 중심을 잡자 동생들도 힘을 냈다. 2016년 중반 연식 변경과 함께 개명한 G80는 그해 국내에서 4만2754대, 이듬해 역시 4만 대 가까운 판매량을 보이며 순항했다. 2017년 선보인 스포츠 세단 G70의 경우 최근 자동차 전문지 <모터 트렌드> 미국판이 선정한 ‘올해의 차’에 오르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전 세계가 인정하는 럭셔리 브랜드로 거듭나려면 제품부터 브랜드 정체성까지 채우고 보강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서비스로서의 이동성 시대로 빠르게 전환해가는 자동차 산업의 동향도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이었다. 국내외에서 얻은 명성은 작은 결실에 지나지 않았다. 제네시스에 필요한 건 진정한 럭셔리 브랜드로 발돋움할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미래의 청사진은 일찌감치 그려진 채였다.

2017년 공개한 GV80 콘셉트는 SUV 라인업 강화의 의지였다. 2018년 뉴욕 모터쇼에서 발표한 에센시아 콘셉트는 새로운 제네시스 디자인의 미래상이었다. 제네시스는 독립한 고급 브랜드지만 디자인만큼은 모(母) 브랜드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채였다. G90는 바로 그 시점에 등장했다.

SUV 모델의 추가와 G80의 완전 변경 등 제품 포트폴리오 전반의 업그레이드가 임박한 시점, 제네시스만의 스타일을 바로 세워야 하는 시점, 말하자면 제네시스가 브랜드 2.0시대를 열어가야 하는 그 시점에. 3년 전 출시한 EQ900의 부분 변경 모델이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풀 체인지에 버금간다. 무엇보다 브랜드의 새로운 패밀리 룩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뜻깊다.

제네시스의 새로운 얼굴은 한층 웅장해진 크레스트 그릴과 쿼드 램프가 중심을 잡는다. 그릴의 경우 좌우 너비는 물론 위아래 폭까지 크게 확대했다. 단지 크기만 키운 건 아니다. 유럽 럭셔리 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메시 타입 그릴은 빗금과 빗금 사이 간격이 조밀하고 표면에 은근한 볼륨을 가미해 입체감이 도드라진다.

그릴을 둘러싼 금속 질감의 테두리에도 정교한 디테일이 숨어 있다. 좌우 측면에서 범퍼 하단까지 파고드는 부분은 굵직하지만 보닛과 만나는 윗부분은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얇다. 이를 통해 차와 마주한 사람들의 시선을 무게감이 느껴지는 아래쪽으로 유도하는 효과를 끌어냈다.

쿼드 램프는 GV80와 에센시아 콘셉트를 통해 제시된 아이디어를 실체화한 것이다. 두툼한 LED 라이팅을 중심으로 위아래 배치된 두 가닥의 가는 풀 LED 헤드라이트는 향후 선보일 신세대 모델에도 어김없이 적용할 새로운 시그너처 디자인 요소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앞 펜더 가니시에 더해진 사이드 리피터다. 이 요소는 쿼드 램프의 LED 주간 주행등과 동일 선상에 위치해 시각적으로 차체 길이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G90 차체에는 이 같은 수평적 캐릭터 라인이 적지 않다. 수평적 구조는 차가 길어 보이게 할 뿐 아니라 안정되고 품위 있어 보이게 한다. 수평적 캐릭터 라인은 완만한 곡률이나 높낮이 변화로 우아하거나 역동적인 분위기도 연출할 수 있다. 차기 제네시스 모델들의 다채로운 분위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단지 웅장하고 의젓한 분위기만 갖춘 건 아니다. 옆모습과 뒷모습에서는 뜻밖의 날렵함도 묻어난다. 큼직한 테일 램프가 길고 갸름하게 바뀌면서 살짝 뒤끝을 접어놓은 트렁크 리드의 형상이 도드라져 보이고, 덩달아 지붕에서 트렁크 뒤끝까지 쿠페처럼 매끈하게 이어지는 라인까지 함께 살아난 분위기다.

흥미로운 점은 G90의 기본 골격은 이전 EQ900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브랜드를 상징하는 시그너처 디자인, 요소요소의 섬세한 조정과 변화로 완전히 새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셈이다. 무엇이 됐건 G90는 전 세계 어느 도로에서 만나더라도 제네시스임을 알 수 있는 인상을 갖게 됐다. 브랜드의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첫 모델로 더할 나위 없다.

실내는 겉모습에 비하면 변화 폭이 크지 않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차의 실내 공간처럼 느껴진다는 점에서 변화의 맥락은 다르지 않다. 크게는 송풍구, 공조 장치와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의 스위치 모양을 바꾸고 최상급 소재를 사용했다. 이탈리아 ‘다이나미카’에서 공급받은 고급 스웨이드 소재로 뒷좌석 목 베개를 제작하고, 가공 처리를 최소화한 프라임 나파 가죽 시트에 또 다른 시그너처 디자인 요소인 G 매트릭스 패턴을 가미하는 소재 등 곳곳에 들인 정성도 예사롭지 않다.

12.3인치 디스플레이의 인포테인먼트 UI에는 제네시스 브랜드 컬러를 적용했다. 최상급이거나 완전히 새로운 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는 점, 승객 또는 사용자가 만지고 접하는 모든 부분을 세심하게 디자인했다는 점 역시 인상적이다. 근대건축의 거장 미스 반데어로에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이는 럭셔리 무대에서도 다르지 않다. 고객은 섬세하고 완성도 높은 디테일에서 럭셔리의 가치와 수준을 가늠한다. G90 인테리어는 럭셔리의 높은 문턱을 수월하게 넘어섰다.

눈여겨볼 부분은 또 있다. 대시보드와 도어 트림 상단의 프라임 나파 가죽을 마감한 리얼 스티치와 파이핑은 철저히 수작업 공정을 거친 것이다. 아홉 가지 익스테리어 컬러와 일곱 가지 인테리어 컬러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두가 기존 대량생산 체제에서는 구현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물론 소비자가 그런 생산 이면의 사정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만 파워트레인과 트림 구성, 기타 옵션 사양까지 고려하면 약 2만 가지의 G90가 만들어질 수 있음은 고급 소비재 고객이라면 충분히 흥미롭게 생각할 만한 일이다.

이번에 시승한 G90 3.8 프레스티지는 무르익은 주행 품질을 보여줬다. 특히 2000년대 중반에 선보여 10여 년 동안 담금질해온 람다 V6 엔진은 절정의 부드러움을 자랑한다. 보들보들하고 차분한 회전, 점진적으로 끌어올려 꾸준하게 나오는 파워 등 대형 고급 세단의 심장으로 더할 나위 없는 모습이다.

거친 기색 하나 없이 매끈하게 기어를 바꾸는 8단 자동변속기, 한계 회전수에 다다랐을 때 오히려 차분하고 고른 음색을 내는 엔진 사운드도 G90 3.8의 나긋나긋한 주행에 큰 몫을 차지한다. 도로 위를 구르는 느낌 역시 인상적이다. 부드럽고 그윽해 그야말로 평화롭다.

19인치 타이어와 서스펜션은 노면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전하지만 불편한 충격은 거의 없다. 표면이 거친 도로에서는 차체가 살짝 견고해지는 느낌이 있지만 움직임은 대체로 여유롭고 풍성하다. 소음을 다스리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당장 창문만 내려봐도 알 수 있다. 차창 밖 도로의 ‘현실 소음’을 효과적으로 걸러낸 고요하고 아늑한 공간의 특별함을.

한국의 럭셔리 세단이기에 특별한 면모도 적지 않다. 중립 주차를 가능하게 하는 기어박스의 버튼, 지도 데이터에 기반해 고속 코너링 속도를 조절하고 터널 진입 전에 창문을 단속하는 기능 등은 한국 실정에 맞춰 한국에서 개발해 농익은 한국형 편의의 진수다.

“제네시스가 한국을, 서울을 대표하는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하는 게 우선 목표입니다. 에르메스 로고 아래 ‘PARIS’가 쓰여 있듯 제네시스 레터링 아래 ‘SEOUL’을 쓰는 날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예요.”

제네시스 강남 전시장에서 공식 출시에 앞서 열린 G90 프리뷰 행사에서 제네시스 디자인 총괄 이상엽 전무가 한 말이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진부한 전략이라고? 그리 쉽게 폄하할 일이 아니다. 서울을 대표한다는 건 서울의 소비자에게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서울의 럭셔리 고객은 세상 어떤 대도시 소비자보다 깐깐하고 뛰어난 심미안을 지니고 있다. 좋은 물건, 값어치 있는 상품이라면 누구보다 잘 알아채는 소비자다.

G90도 어설프게 호소하거나 현혹하려 들지 않는다. 섬세한 디테일은 기본일 뿐 으스대지 않으며 고급스러운 감각이 우러날지언정 과대 포장하는 일은 없다. 다만 스스로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자동차임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요란하지 않지만 분명하게 전달할 뿐이다.

‘제네시스 서울’은 제네시스 브랜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다. 거기에는 이미 성공한 서울의 럭셔리 고객뿐 아니라 성공을 향해 달리는 젊은 럭셔리 고객, 나아가서는 전 세계의 새로운 럭셔리 고객까지 포함하고 있다. 브랜드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플래그십 모델, 제네시스 G90는 방향키를 제대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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