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으면, 없을 자유

BMW R 1200 GS를 타고 유럽 5개국을 거쳐 뜨거운 축제의 현장에 도착했다.

“택시 왔습니다.” 호텔 정문과는 정반대 방향인 후문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후문 밖은 곧바로 수로였고, 그곳으로 커다란 보트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렇다, 여긴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네치아다. 영어식으로는 베니스라 부른다. 사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무척 아름다운 곳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도시 전체가 바다 위에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 위에 110여 개의 섬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가까이서 보면 그 모습이 진풍경이다. 유럽 소도시 골목처럼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어지럽게 연결되며 길을 이룬다.
수상 택시가 좁은 골목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더니 어느덧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주요 수로에 올랐다. 배들이 가는 길은 자유롭다. 중앙선이나 유도 선이 없다. 그러니 큰 배, 작은 배 할 것 없이 뒤섞인다. 모터보트와 곤돌라(사람이 노를 젓는 힘으로 가는 베네치아의 명물 보트)가 좌우 어깨를 스치듯 역방향으로 지나간다. 바다와 보트, 그리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어우러진 모습. 보트에 탄 관광객들은 스마트폰을 번쩍 들고 이 모습을 담으려고 열심이다.

이곳의 주요 관광지인 산마르코 대성당에 들렀다. 하지만 입구부터 이어진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성당은 포기하고 대신 산마르코 광장 구석에 자리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에 들렀다. 300년 전 모습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 곳. 광장을 한가롭게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셨다. 보통 패키지여행으로 베네치아를 관광하면 시내가 아니라 시외에서 숙박을 한다고 한다. 지리적 특성으로 자동차나 버스가 시내로 드나들기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모터사이클로 유럽을 달리는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시내 호텔에 인접한 좁은 골목골목에 모터사이클을 세우고 아름다운 관광 도시를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가르다 호수의 바람

정오가 됐을 때 우리는 베네치아를 뒤로하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가르다호를 향해 달렸다. 뜨거운 햇볕 아래 고속도로를 신나게 누볐다. 울창한 숲을 지나자 갑자기 커다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르다호는 밀라노와 베네치아 사이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호수다. 호수를 돌아서 목적지로 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일행은 카페리에 모터사이클을 싣고 호수를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아다멜로 브렌타 자연공원(Parco Naturale Adamello Brenta)에 들러 환상적인 바위산을 구경했다.

마치 하늘에서 바위가 우르르 쏟아져 내려 커다란 산과 협곡을 이룬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장엄했다. 산 정산을 코앞에 둔 마지막 코너. R 1200 GS 랠리를 세웠다. 그 압도적인 풍경에 기가 꺾였다. 나와 GS 랠리는 여기서는 아주 작고 힘이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뛰어난 오프로드 바이크라도 이런 험난한 지형에서는 쉽게 앞으로 가지 못한다. 그러니 길이 없으면 나에게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느끼고 누린 모든 자유가 ‘자연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원 입구의 카페까지 빠르게 달리면 15분 정도 걸릴 듯했다. 빗줄기보다 빠르게 산을 내려가겠다는 생각으로 앞머리를 돌렸다. 급한 헤어핀 코너(U턴 모양)가 연달아 등장했다. 하나라도 맘대로 건너뛸 수 없었다. 모든 과정을 집중해서 하나씩 공략해나갔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노면을 흠뻑 적셨다.

상황이 바뀌었다. 노면과 타이어 접지력에 변화가 생겼다. 코너로 빠르게 진입할 때 GS 랠리의 뒷바퀴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가벼운 경고였다. 바이크의 요청에 따라 미끄러운 노면에 맞춰 코너에서 라이딩 자세를 확실하게 바꿨다(린 아웃). 그러자 방금 전까지 라이더를 위협하던 요소가 또 다른 재미로 변했다. 우리는 저속 코너에서 리듬을 맞추며 마치 춤추듯 함께 달렸다. 비가 폭우로 바뀌기 전에 카페에 도착한 건 나뿐이었다. 일행 모두가 산을 내려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두 비옷으로 갈아입고 소나기를 제대로 맞았다.

스텔비오 패스의 경계

그날 숙소는 스위스 산타마리아 발 머스터 마을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장거리 주행으로 모두가 피곤한 상태였다. 원래 일정은 고속도로를 경유해 경로를 단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속도로를 타면 경로가 달라져 다음 날 스텔비오 패스에서 일부 코스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하이라이트인데, 힘들어도 보르미오로 넘어가시죠.” 그룹을 이끄는 로드마스터가 고속도로로 향하던 일행에게 무전을 보냈다.

스텔비오 패스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스위스와 맞닿은 산길이다. 라이더들의 성지다. 최고 3900m 높이의 오르틀레스(Ortles)-체베달레(Cevedale) 산괴에서 흘러내린 돌과 빙하로 울창한 숲과 계곡을 이룬다. 이곳에 닿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스위스령인 움브라일(Umbrail), 이탈리아령인 보르미오(Bormio)와 트라포이(Trafoi)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텔비오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풍경을 이룬다. 우리 일행은 먼저 보르미오를 올라 움브라일로 내려가고, 다음 날 움브라일을 역으로 거슬러 트라이포이로 내려가는 코스로 달렸다.

부슬비가 내리는 보르미오는 운치가 있었다. 폭이 넓고 정비가 잘된 도로가 완만한 산 지형을 따라 끝없이 펼쳐졌다. 두 눈으로 한 번에 보지 못할 만큼 커다란 능선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곳을 두 바퀴로 달린다. 누군가 이 장면을 높이서 찍는다면 영화의 한 장면으로 써도 부족함이 없겠다. 비와 안개 때문에 정상에서 서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움브라일로 내려갈 때는 아까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마치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살처럼 넓은 회전각의 코너가 리듬을 만든다. 평온한 감각. 그렇다고 긴장을 늦출 순 없다. 도로에는 가드레일이 없기에 코너를 벗어나면 곧바로 대자연과 마주하게 된다. 상황에 따라서 그게 절벽이거나 혹은 양들이 가득한 목장일 수도 있다.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을 맞았다. 드디어 그 유명한 스텔비오 패스 정상을 간다. 내 기억에 해외 자동차 잡지에서 스텔비오 패스의 모습을 본 건 17년 전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였다. 살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 드디어 내가 간다. 마을 입구에서 주유를 마치고 움브라일을 거슬러 올랐다. 어제와 달리 날씨가 화창했다. 동화책에 나올 만큼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 안구를 정화시켰다.

스텔비오 패스 정상에 도착했다. 잡지에서나 보던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진짜로 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곳이었구나.’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장엄했다. 높이 2758m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경이로운 대자연과 인간의 도전 정신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커다란 바위산이 마치 흘러내리듯 산자락까지 뻗어나간다. 그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인간이 만든 좁은 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 구간은 48개의 헤어핀 코너로도 유명하다.

정상 휴게소 앞이 북적였다. 길가를 따라 모터사이클 수십 대가 정차했다. 다양한 슈퍼카와 클래식카가 그 옆으로 지나쳤다. 자전거 라이더들에게도 이곳은 대단한 도전이다. 트라이포이 입구에서 48개 헤어핀 코너를 지나 정상까지 약 25km다. 그 고갯길을 자전거로 오른다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정상을 공유하지만 과정이나 목표가 전혀 달랐다. 그 좁은 산길을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두 바퀴 축제의 열기

우리 일행은 여정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독일 바이에른주 남부의 작은 마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이었다. 지도에서 보면 특이점이 없는 시골 마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매해 7월의 어느 날 ‘모토라드 데이즈’가 개최된다. 전 세계에서 온 BMW 모터사이클 팬들이 한자리에 모여 축제를 벌인다. 올해로 18번째를 맞이하는 행사다. 약 4만 명의 팬들이 축제에 참여했다고 한다. 도심에서 열리는 모터쇼처럼 딱딱한 구성이 아니다. ‘축제’라는 설명처럼 맥주와 사람, 모터사이클 문화가 뒤엉켜서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낸다.

행사를 큰 덩어리로 나눠보면 제품 판매 전시 부스(모터사이클 제품과 라이딩 기어 그리고 액세서리)를 중심으로 스턴트 쇼와 각종 체험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BMW 모토라드 클래식과 커스텀도 대단한 볼거리다. 현대식 제품을 과거의 헤리티지로 재해석한 모델은 언제나 인기다. 잘 만들어진 커스텀 바이크를 앞에 두고 모두가 침을 흘린다.

커다란 원통의 안쪽 벽을 모터사이클로 달리는 ‘죽음의 벽’ 스턴트 쇼는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프리스타일 스턴트 쇼도 매년 더 과감하게 발전한다. 앞바퀴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리고 한 손으로 모터사이클을 조종하거나, 제자리에서 빠르게 회전하다 관성을 이용해 점프한 후 다시 180도 회전하는 등 박진감 넘치는 기술을 선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관람객의 큰 호응을 얻어낸 건 모터크로스 쇼였다. 점프대로 도약해 모터사이클과 함께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그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공중에서 회전하거나 아슬아슬한 포즈를 취하는 모습에 관객들은 열광한다. 아침부터 시작한 행사는 밤까지 이어졌다. ‘두 바퀴’라는 주제 아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축제를 즐겼다.

멀티퍼퍼스의 기준, BMW R 1200 GS
타면 탈수록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BMW R 1200 GS는 멀티퍼퍼스 장르의 기준이 분명하다. 온·오프로드를 가리지 않는 민첩한 주행 성능과 장거리 투어의 편의성 등 모든 것을 두루 갖췄다. 커다란 덩치는 시내 주행에 약간 부담스럽다. 하지만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루기가 쉽다. 언제 어디서나 라이더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수평대향 2기통 1170cc 엔진은 최대 9000rpm까지 회전하며 125마력을 분출한다. 뿜어져 나오는 토크감이 좋다. 스로틀을 강하게 열면 짜릿한 가속력으로 가슴이 설렌다. 노면을 따라 세심하게 반응하는 서스펜션도 라이딩의 만족감을 충족시킨다. 3066만원.

부끄러운 말이지만 그 뜨거운 축제를 가장 즐기지 못한 건 한국 팀. 아니, 정확히는 나였다. 속된 말로 ‘놀아본 놈이 잘 논다’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한국에는 두 바퀴로 통일되는 이런 규모의 축제가 흔하지 않다. 그래서 이런 축제를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런 문화가 있다는 게 부럽다.

끝이 오지 않을 것 같던 5박 6일의 투어는 그렇게 끝났다. 일정의 마지막 날 아침, 독일 무르나우 지방의 한 호텔에서 일어나 새벽같이 뮌헨으로 출발했다. 텅 빈 아우토반에서 신나게 속도를 올리다 보니 70km 거리인 목적지에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모터사이클 렌털 숍 앞에서 1674km를 무사히 함께 달린 GS 랠리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유럽을 두 바퀴로 여행하는 일은 누구에서나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구석구석 숨겨진 유럽의 좋은 장소를 많이 가본 편이다. 그런데도 이번처럼 유럽을 제대로 느낀 적이 드물다. 유명한 관광지가 전부가 아니다. 장소와 장소를 잇는 모든 길을 따라 아름답고 멋진 풍경이 존재한다. 그랬다. 이곳에서 진짜 숨겨진 보물을 찾았다. 바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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