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달리다

BMW R 1200 GS를 타고 5일 동안 유럽 5개국을 여행했다.

그로스글로크너

스텔비오 패스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숨이 멎을 만큼 장엄했다. 이곳은 모터사이클 혹은 자동차의 성지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스텔비오 국립공원의 고갯길이다. 높이 2758m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경이로운 대자연과 인간의 도전 정신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커다란 바위산이 마치 흘러내리듯 산자락까지 뻗어나간다. 그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인간이 만든 좁은 도로가 구불구불 이어진다. 이 구간은 48개의 헤어핀 코너(180도 회전하는 코너)로도 유명하다.

이곳에 오겠다고 결심한 건 17년 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자동차 잡지에서 스텔비오 패스의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는 소개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오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요? 생각이란 건 참 신기해요.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는 이뤄져요. 왜인지 알아요? 생각에는 물리적인 힘이 있거든요.” 함께한 일행 중 누군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 내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여기에 온 것도 돌아보면 기적 같은 일이다. 17년 전에는 그저 상상에 불과했고 10년 전에는 계획으로만 그쳤다. 사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결국 현실이 됐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모터사이클이었다.

#1 결실_ 여행이라는 관점에서는 모터사이클보다 매력적인 이동 수단도 드물다. 특히 유럽에서 두 바퀴와 함께 하는 투어는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할 경험이다. 고속도로를 따라 유명 여행지만 관통하는 관광 상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을 오롯이 즐긴다. 여행 가이드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시골길을 따라 다닌다. 그러다 보면 숨겨진 보물 같은 그림 경치를 계속해서 감상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투어는 도전이라기보다는 결실이었다. 지난 10년간 꾸준히 투자하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터사이클 운전면허를 따고, 라이딩 기술을 배워서, 틈틈이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여러 곳을 투어하며 경험을 쌓았다. 이런 모든 과정이 뒷받침됐다.  

물론 기회는 우연찮게 찾아왔다. 한 여행사가 BMW 모터라드를 이용한 투어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같은 프로그램이 올해로 3회째다. 곧바로 2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장장 6박 8일의 일정. 독일 뮌헨에서 시작해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를 지나 다시 오스트리아, 독일로 유럽 중심부를 시계 방향으로 작게 도는 코스였다. 주행 거리는 약 1600km. 생각만으로도 모험적이다. 물론 여행의 최종 목적지도 있었다. 산 넘고 물 건너, 독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열리는 ‘2018 BMW 모터라드 데이즈’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2 짐_ 출발 전까지 며칠에 걸쳐 짐을 쌌다. ‘테트리스’처럼 짐을 쪼개서 맞추는 기술이 필요했다. 현장에서는 모터사이클에 달린 두 개의 사이드 케이스와 톱 케이스에 모든 짐을 싣고 움직여야 했으니까. 라이딩 기어와 헬멧, 여분의 옷과 각종 전자 장비 등 생각보다 짐이 많았다. 줄이고 또 줄였다. 투어의 특성상 매일 다른 호텔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도 포인트다.

#3 R1200 GS 랠리_ 뮌헨 BMW 모터라드에서 공식 대여 프로그램(BTS)을 통해 모터사이클을 빌렸다. 이 기간에 공식 지점에서 렌트하려면 최소 1년 전에는 예약해야 한다. 모터사이클 대여 프로그램은 예상보다 잘 구축되어 있었다. 가격은 모델마다 차이가 있지만 평일 24시간, 350km 이하 주행에 120~226유로.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간 700km 이하 주행에는 297~510유로다. 여기에 하루 기준 사이드백은 7유로, 톱 케이스는 5유로 정도다. 계산기를 때려보면 꽤 부담되는 금액이지만, 대중교통으로 같은 거리를 다닌다고 가정할 때 훨씬 이익이다. 물론 뒷자리에 누군가를 태우고 여행한다면 비용적으로 훨씬 합리적이다.

함께 간 10여 명이 한 번에 렌트를 하다 보니 모터사이클 기종이 무작위로 배정됐다. 하지만 운 좋게도 가장 타고 싶었던 R 1200 GS 랠리와 파트너가 됐다. 2018년형에 적산 거리 2360km로 꽤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몇 달 전 아프리카 모로코 사막에서 300여 km를 함께 달리며 신뢰를 두텁게 쌓은 모델. 유럽 여행의 파트너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

#4 장거리 팀_ 일행은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였다. 장거리 팀은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국도로 최대한 많이 움직였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지 않고 또 다른 경치를 찾아 바삐 달렸다. 단거리 팀은 가끔 고속도로를 타며 최단 경로로 시간을 벌었다. 그렇게 번 시간으로 관광지에 좀 더 오래 머무는 성격이었다. 여행의 목적이나 운전자의 성격에 따라 원하는 팀에 붙으면 됐다. 나는 투어 내내 장거리 팀을 선택했다. 몸이 좀 힘들더라도 멋진 풍경을 최대한 눈에 담고 싶었으니까.    

완벽한 투어 파트너, BMW R 1200 GS 랠리
멀티퍼퍼스 장르의 기준을 GS 시리즈가 제시한다면 랠리는 좀 더 스포티한 감각을 이끈다. 전자 제어 기반의 네 가지 주행 모드를 이용해 시내나 투어, 오프로드 등 주행 상황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타면 탈수록 라이딩에 자신감을 주는 게 GS 랠리의 장점이다. 좌우로 돌출된 박서 엔진은 회전 질감이 독특하다. 최고 출력은 125마력. 이 엔진은 저회전에서는 묵직한 토크감으로 믿음직스럽고, 고속에서는 기분 좋게 쭉쭉 뻗어나가는 회전력을 제공한다. 20L 연료 탱크를 꽉 채우면 어떤 상황에서도 300km 이상을 거뜬하게 달린다. 차체가 육중함에도 코너링이 즐겁다. 크고 날렵한 외모와 달리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라이딩 감성이 녹아 있다. 균형 잡힌 유연한 섀시가 라이딩의 즐거움을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이렇게 안정적이고 힘차며 가슴 설레게 하는 바이크는 흔치 않다. 3100만원.

#5 사람들_ 첫날은 모터사이클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 주행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았다. 280km를 달렸다. GS 랠리를 타고 뮌헨 시내를 빠져나오며 서서히 몸을 풀었다. 시내에서 30분을 달려 좁은 시골 마을로 접어들었다. 동화 속에 나올 법한 곳이었다. 독일 전통식 벽돌 가옥이 질서 없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다. 시계를 보지 않아도 허기가 느껴지는 게 점심시간이다. 이번 투어는 모두 로드마스터(대열의 가장 앞에 서는 길 안내자)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다고 식당이나 경로가 꼭 정해진 건 아니었다. 날씨와 컨디션을 보고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경로를 바꾸기도 했다. 일행은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치킨 커리로 통일하시죠!” 독일어로 쓰인 메뉴판을 한참 보다가 모두가 웃으며 흔쾌히 메뉴를 통일했다. 일정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팀원이 한자리에서 모여서 밥을 먹었다. 서로 인사를 나눴다. 컨설턴트, 요식업 전문 사업가, 의사, 기자, 의료 기기 전문가 등 다양한 성격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모터사이클이라는 주제가 없다면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조합. 초등학생 딸과 함께 온 아버지, 부부 라이더도 있었다. 동기와 이유도 각양각색이었다. 누군가는 이번 투어를 위해 1년을 준비했고, 누군가는 사업 10주년을 기념하는 선물의 의미로 참가했다. 그 사이에 배우도 있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과 <고지전>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류승수 씨였다. “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우리가 만난 건 대단한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말처럼 우연이거나, 의미 없이 흘러가는 건 없었다. 20년간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그가 느끼고 경험한 것도 이런 것이라고 했다.    

발히제 호수

#6 발히제 호수_ 점심을 먹고 나서 북쪽을 향해 또 달렸다. 유럽의 아름다운 시골길이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 초원을 가로질러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가면 꼭꼭 숨겨진 아름다운 호수 옆으로 길이 이어졌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게 아니라 풍경 속에 녹아든 것 같았다. 그림책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입이 딱 벌어지는 새로운 풍경이 나를 반겼다.

일행은 오스트리아 발히제 호수에 잠깐 멈췄다. 에메랄드빛 호수 주변이 나무가 빼곡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멀리 강가를 따라 마을과 카페가 듬성듬성 자리했다. 아이들은 즐겁게 수영을 하고, 오리들은 한가롭게 산책을 했다. 보는 순간 ‘여기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원이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날 저녁 첼암제 호수로에 위치한 제빌라 프레이버그 호텔에서 묵었다. 첼암제 호수에 바로 붙은 호텔이라 제법 운치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떨어지는 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어떤 부분이 좋아서 모터사이클을 타세요?” 류승수 씨에게 물었다. 그는 고요한 호수가 빨간 노을로 물드는 모습을 조용히 사진기에 담고 있었다. “같은 질문을 스스로 여러 번 해봤어요. 20년을 바이크를 탔으니까요. 그리고 내린 결론은 ‘길’ 때문이에요. 아름다운 길, 좋은 길을 찾아다니고 싶어서 모터사이클을 타는 거 같아요. 나는 모터사이클을 기계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여행의 한 부분으로 느껴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경험과 고민을 통해 도달한 결론 같았다. 우리가 먼 유럽까지 와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달리는 본질적인 이유도 비슷했다.

#7 그로스글로크너_ 다음 날 일행은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최고봉 그로스글로크너를 향해 두 바퀴를 달렸다. 호텔에서 약 35km 떨어진 곳이었다. 울창한 숲을 지나 어느 순간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생긴 요금소에 도착했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명한 장소였다. 호에타우에른 국립공원의 모터사이클 하루 입장료는 26유로다. 비싸다고 투덜댈 필요 없다. 그로스글로크너를 마주하며 해발 2500m까지 이어진 길을 달릴 때의 감동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니까. 

“자유롭게 구경하고 에델바이스 산장으로 오세요!” 로드마스터가 자유 시간을 줬다. 그런데 누구도 로드를 추월해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았다. 모두가 도로 옆으로 펼쳐지는 알프스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봉우리가 뾰족한 거대한 산들이 모여서 구름까지 닿았다. 마치 서로가 키로 경쟁하듯이. 산꼭대기에 보이는 만년설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이곳은 유럽을 여행한다면 꼭 와볼 만하다. 잘츠부르크나 베니스 같은 유명 관광지에서 접근이 어려운 곳이지만 해발 3000m가 넘는 고봉과 유럽에서 가장 긴 폭포인 크리믈러 등 알프스의 속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좁고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에델바이스 산장이 있는 정상의 휴게소까지 달렸다. 울퉁불퉁한 도로와 가벼운 비포장도로가 섞여 있었다. GS 랠리가 기다렸다는 듯 실력을 뽐냈다. 라이더가 확실하게 조작하면 아주 확실하게 반응하는 모터사이클이었다. 스로틀을 경쾌하게 돌리며 코너를 기분 좋게 돌아나갔다. 엔진이 만드는 툴툴거리는 소리와 기분 좋게 떨리는 차체의 감각이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때마침 블루투스로 연결된 헬멧 오디오에서 핫하우스 플라워스의 ‘I Can See Clearly Now’가 흘러나왔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런 멋진 순간은 인생에 다시 오지 않으리라.

정상을 코앞에 둔 채 앞바퀴를 활짝 들고 신나게 윌리를 했다. 찰칵! 먼저 도착한 일행이 그 모습을 찍었다. “와, 멋지던데요? 뭐가 그렇게 신났어요?” 정상에 도착해 기념사진을 찍는데 누군가가 물었다. “지금 신나지 않으면 언제 신나겠어요. 유럽 곳곳에서 많은 멋진 풍경을 봤지만 이렇게 멋진 곳도 드물 거예요.”  

그로스글로크너를 뒤로하면서, 언젠가 이곳에 다시 오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래, 생각에는 물리적인 힘이 있으니까, 언젠가는 다시 오겠지.’ 눈에 모든 부분을 담지 못했지만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이탈리아 베니스로 이동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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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취재 협조 BMW 모토라드 / 투어파크(문의 051-704-9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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