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저스티스 리그-<상>

NBA는 정치적인 행동에 징계를 내리던 곳이었다. 요즘은 NBA 스타와 감독이 사회적으로 가장 시급한 사안에 목소리를 낸다. 어떻게 프로농구가 미국에서 가장 깬 스포츠 리그가 됐을까?

“억압의 상징입니다.” 1996년 3월 어느 오후에 마흐무드 압둘라우프가 말했다. “사실을 논박할 순 없잖아요.” 그는 덴버 너기츠의 가드이자 당시 막 개종한 이슬람교도였다. 그는 덴버의 옛 맥니콜스 경기장에서 아침 훈련을 마친 뒤 미국 국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압둘라우프는 부드러운 말투로, 종교적 신념에 반하기 때문에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에는 서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 시즌 경기 대부분에서 압둘라우프는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침묵으로 항의했다. 라커 룸을 기웃거리거나 바닥에서 스트레칭을 하거나 사이드라인에 앉아 있었다.

억압의 상징이라는 대답 때문에 압둘라우프 자신이 억압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전제적 성향의 NBA총재 데이비드 스턴은 이 뉴스 이후 압둘라우프에게 출장 정지와 경기당 3만1707달러의 벌금을 내렸다. 압둘라우프는 재빨리 굴복해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서 있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제안은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그는 곧 터키 농구 리그로 쫓겨가야 했다. NBA의 입장은 확고했다. 프로농구는 기업의 스폰서나 시청률에 의존해 선수에게 연봉을 주고 구단주에게 돈을 벌어준다. 분열을 일으키는 정치적 선언은 설 자리가 없다.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한쪽 무릎을 꿇은 콜린 캐퍼닉은 2016년 이후로 NFL팀과 계약을 맺지 못했다.

20년 뒤인 2016년 8월 NFL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은 ‘흑인을 억압하는 나라’의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한쪽 무릎을 꿇기로 결정했다. 의무라고 못 박지는 않았지만 NFL은 웬만하면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서 있기를 권한다. 리그 징계는 없었지만 캐퍼닉의 행동에는 낯익은 반응이 따라왔다. 감독과 구단 운영진이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선배 선수이자 전직 라인배커인 레이 루이스는 ‘정치적인 행동은 개인적인 상황에서만 실행에 옮기라’고 조언했다. 팬들은 트위터에 모욕적인 언사를 올렸다. 2016 시즌 말미에 팀으로부터 방출 경고를 받은 캐퍼닉은 결국 계약을 해지했다. 이 기사를 쓰는 시점까지 그는 어떤 NFL 팀과도 계약을 맺지 않았다.

캐퍼닉의 선언은 NBA를 움직였다. 작년 시즌 대비 훈련이 시작될 때 리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선수 몇몇이 재빨리 의사를 밝혔다. “우리에게는 의견을 밝히고 고수할 권리가 있고, 캐퍼닉은 가장 평화로운 방식으로 행동에 옮겼습니다”라고 무려 르브론 제임스가 말했다. 그의 의견은 리그 전체에서 고루 지지를 받았다. 샌안토니오 스퍼스 감독 그레그 포포비치는 팀 미팅에서 캐퍼닉을 언급했다. “(팀원에게) ‘우리가 국기를 향해 취할 입장을 밝힙니다. 모두 다 큰 어른이니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라고 포포비치가 최근 내게 말했다.

2014년, 에릭 가너의 추도식에서 르브론 제임스는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었다.

“시대가 바뀌었어요.” 어느 오후 르브론 제임스가 설명했다. 이제는 잊힌 압둘라우프의 항의가 벌어진 곳 고속도로 건너편에 있는, 덴버 펩시 센터 원정팀 클럽하우스에서였다. “운동선수도 운동경기 바깥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제임스가 변화에 앞장선 가운데, 리그의 유명 선수들이 조금씩 활동의 전방으로 나섰다. 2012년 제임스와 마이애미 히트 동료들은 후디 차림에 머리를 숙이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진을 SNS에 올렸다. 한 달 전 플로리다에서 자경단의 총에 살해당한 트레이본 마틴을 상징하는 움직임이었다. 2014년에 선수들은 “숨을 쉴 수 없어요(I can’tbreathe)”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뉴욕에서 열린 에릭 가너의 추도식에 참석했다. 에릭 가너는 경찰관에게 목이 졸려 숨진 흑인 청년이다. 뉴욕 닉스 카멜로 앤서니는 볼티모어에서 경찰서에 구류 중이었던 프레디 그레이가 사망하자 현장에 가서 거리 시위에 동참했다. 힐러리 클린턴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르브론 제임스는 ESPY 시상식에서 선수들에게 당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라고 촉구했다. 그때 포포비치는 이미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캐퍼닉의 항의가 시작되고 몇 주 동안 더 많은 NBA 선수와 감독이 의견을 밝혔다. NBA 사무국은 벌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견책조차 없었다. 제임스와 이야기를 나눌 당시에는 며칠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목소리가 가세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제임스에게 책임감을 느끼느냐고 묻자 그는 모델이 되려는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마음을 드러내 말하면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에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말을 안 하는 게 잘못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동참을 촉구하거나 용기를 주려고 이러는 게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한 행동입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알고 있고 열정을 품고 있다면 목소리를 낼 겁니다.”

제임스에 맞먹는 스타인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스테픈 커리도 마찬가지였다. 커리에게 매년 몇백만 달러를 주는 언더아머의 최고경영자 케빈 플랭크는 지난 2월 트럼프를 미국의 ‘자산(asset)’이라 표현했다. 커리는 의견을 밝혔다. “자산(asset)에서 e와 t를 빼면, 즉 멍청이(ass)라면 말이 되죠.” 플랭크는 신문에 전면 광고를 내고 자신의 발언에 ‘말하려는 의도가 정확하게 담기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많은 사람이 그 광고가 커리의 의견에 대한 답이라고 믿었다.

스테픈 커리는 도널드 트럼프에게 비판적인 의견을 냈다. 해명은 스폰서인 언더아머가 했다.

‘내 탓이오’라는 메시지의 위력은 놀라웠다. 지금까지 공공연한 정치적 선언은 선수 자신은 물론 리그의 평판에 악영향을 미칠 거라고 여겨졌다. 특히 커리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 특정 인물을 폄하한다면.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평판 관리는 언더 아머의 몫이었고 커리의 솔직함은 존중받았다. 처음으로 NBA 선수들이 의견을 내고 행동으로 옮겨도 징계를 받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샬러츠빌의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항의할 때도 그랬다. 대부분의 선수는 드레이크 대 켄드릭 라마의 대결 구도보다 더 논란의 여지가 될 의견은 공식적으로 내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감이 필요한 사안에서 점차 많은 이들이 정치적으로 행동했다. “팬들이 우리를 우러러보잖아요.” 24세에 워싱턴 위저즈의 스타로 떠오른 브래들리 빌이 설명했다. “그래서 의무감을 느낍니다.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 목소리를 내서 되갚아야죠. 나라를 위해 맞다고 믿는 행동을 취하는 겁니다. 운동선수로서 누리는 막대한 발언의 기회를 최선을 다해 활용해야죠.”

제임스와 다른 선수들의 개별 행동은 한데 모여서 일종의 운동처럼 어우러졌다. 이유를 생각해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트위터와 스냅챗 등을 통해 이제 유명 인사도 의견을 쉽게 낼 수 있다. 선출 공직자와 매체는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 틈에 유명인이 영향력을 발휘할 기회가 생겼다. 1억 달러를 넘어가는 대규모 계약도 도움이 된다. 덕분에 선수들은 재정적인 위기를 무시하고 원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현재의 권력 구조가 선수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목 선수들은 종종 현 NBA 총재 애덤 실버에게 자신도 NBA에서 뛰고 싶다고 말한다. 지난 9월 실버와 선수 노조 위원장 미첼 로버츠는 선수들이 입장을 취하는 걸 응원했다. 편지로 “중요한 사안이 사회는 물론 여러분에게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여러분에게는 변화를 일궈낼 진짜 힘이 있어요.” 승인까지 받았으니 선수와 감독의 의지를 헤아리기도 어렵지 않았다. 브래들리 빌은 주저 없이 말했다. “우리가 미국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1960년대까지는 스포츠가 사회·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무하마드 알리는 처음으로 전국적 규모의 발언 기회를 통해 분노를 표출했다. 물론 중계자 하워드 코젤이 부추기기도 했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단거리 선수 존 카를로스와 토미 스미스는 메달을 딴 후 시상대에 올라 주먹을 쥔 손을 치켜들었다. 조지 포먼은 미국 국기를 흔들었다. 당시 UCLA 농구 선수 빌 왓슨은 윌셔 대로의 한가운데에 앉아 베트남전쟁을 규탄했다. 멕시코 올림픽에서의 항의 운동을 기록한 책 <승리 아닌 투쟁>을 쓴 에이미 배스도 말했다. “스포츠가 미국에 가장 어려운 대화를 할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알리는 스스로를 양심적 반대자이자 육군 징병 거부자라고 알렸다. 그 때문에 그는 반전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3년의 출전 정지 끝에 알리는 1970년 링으로 복귀했다. 알리는 베트남 폭격과 징집 폐지를 주장하고 미국의 외교 정책 번복을 촉구하기 위해 권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날의 알리는 영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어도 나라의 절반이 알리를 사회질서 전복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는 그저 입을 좀 닥쳐야 하는 검둥이 권투 선수였다.

활동가는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다. 하지만 특히 흑인 운동선수는 스포츠로 얻은 명성을 대의에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쉽게 답을 내지 못한다. 침묵을 지키며 연봉을 받고 백인 세계의 존경을 얻어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는 흑인도 있다. O.J. 심슨은 샌프란시스코의 우범지대 포트레로 힐에서 자랐다. 그는 알리가 베트남전쟁 징집 거부를 선언한 1년 후 대학 미식축구 MVP인 하이즈먼 트로피의 주인공이 되었다. 심슨은 위상을 활용해 정치적인 의제를 밀어붙이는 대신 백인의 세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나는 흑인이 아니야. O.J.지”라고 그가 친구에게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몇십 년에 걸쳐 운동화 계약금과 연봉이 엄청나게 올랐다. 잘못하면 스폰서에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선수들의 행동을 억제했다. NBA에서 12년 동안 뛴 제임스 워디는 회상했다. “제가 현역이던 시절엔 공개적으로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입을 열었어요. 그저 후환이 두려웠습니다. 1980년대의 선수들은 20만~30만 달러밖에 벌지 못했어요. 팀에 밉보이면 따돌림을 당합니다. 닥치고 있지 않으면 노예 농장에서 쫓겨나는 기분이랄까요? 이렇게 말하긴 싫지만 당시엔 그랬습니다.”

최고의 농구 선수였던 마이클 조던이 이런 태도의 화신이었다. 1990년대에 조던의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하비 갠트와 제시 헬름스가 격돌했다. 헬름스는 보수 강경파였고 갠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그는 MIT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샬롯 시장을 역임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흑인 공동체는 조던의 참여를 권유했다. 선거운동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지지라도 해달라고. 조던은 거부했다. “공화당 지지자도 조던을 삽니다”라고 조던이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이 말이 그의 좌우명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2008년 존 매케인의 대통령 선거를 운영하던 공화당 자문이자 정치 해설가인 스티븐 슈미트가 말했다. “조던의 정치적인 시각을 알 순 없죠. 하지만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던도 인종 평등에 공헌했다. 흑인 운동선수에서 성공적인 사업가로 거듭났고 사상 최대로 부유한 운동선수가 되었다. 조던의 연봉과 코트 밖에서 벌어들인 몇억 달러를 합치면 농구팀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에서 함께 뛴 워디가 조던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조던은 ‘나는 권력자이자 천재 사업자인 만큼 다른 길을 보여줄게’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선수들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인지는 모르겠어요.” 조던이 행동하지 않으면 어떤 선수가 기꺼이 나설까? 조던이 프로 선수의 모델인데. 누구나 조던이 되고 싶어 했으니까. 1996년의 압둘라우프, 아니면 2010년 애리조나의 가혹한 이민법에 항의하려 스페인어가 쓰인 옷을 입은 피닉스 선즈 선수 같은 소수만이 조던 모델이 아닌 다른 길을 갔다.

2014년 어느 아침 애덤 실버는 어떤 스포츠 리그에서도 전례가 없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뉴욕 힐튼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주재했다. 그는 그해 겨울 데이비드 스턴의 후임으로 NBA 총재에 취임했다. 곧 위기가 닥쳤다. 리그의 고참 구단주가 위기의 발단이었다. 30년 전 LA 클리퍼스를 매입한 도널드 스털링이 그의 여자 친구를 나무라는 테이프가 공개됐다. 알고 보니 그 흑인은 매직 존슨이었다. 스털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대놓고 친하게 지내는 그녀에게 화를 냈다. “잠을 자도 좋고 집에 데려와도 좋지만, 클리퍼스 경기에는 데려오지 말라고.” 테이프의 진위를 확인하고 실버는 주말 동안 선수, 구단주, 스폰서의 여론을 모았다. 대부분이 무난한 해결책을 권했다. 스털링에게 무기한 징계를 내리자는 정도의 의견이었다. 조용히 팀을 매각하라고 권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실버는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힐튼의 연단에 서서 스털링의 NBA 참여 종신 금지를 선언했다. 미국 스포츠 총재로서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이후 실버가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경우 클리퍼스와의 경기를 거부하려던 워리어스의 계획이 보도되었다. 다른 팀도 마찬가지로 반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리그 관계자나 기업체도 무책임하게 나서서 스털링을 두둔하지 않았다. 그를 보며 실버는 NBA의 변화를 알아챘다. “저희 집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영웅이었어요”라고 그는 이제야 말했다. “산업적인 후폭풍을 의식하지 못하고 (스털링을 종신 퇴출한) 그런 조치를 취한 게 아닙니다. NBA의 가치를 생각하니 대안이 없었어요.”

선수도 감독도 해방감을 느꼈다. 그해 12월, 경기 전에 몸을 풀 때나 벤치에 앉아 있을 때도 “숨을 쉴 수 없어요”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팀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압둘라우프의 항의처럼, 통일을 지향하는 NBA 규칙에 대한 노골적 위반이었다. 실버는 막연하게 NBA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고용 및 해고 권한을 가진 구단주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당시 몇 구단주가 징계를 강하게 원했지만 실버는 반대했다. “선수들이 입장을 취해줘서 굉장히 자랑스럽습니다”라는 게 실버의 의견이었다.

전임 총재 스턴 역시 확고한 자유주의자였다. 하지만 그가 1984년 NBA를 손아귀에 넣었을 때 리그는 몹시 굶주리고 있었다. 케이블 텔레비전 태동기에 CBS 협약 방송국 대부분은 심야 뉴스 이후에야 플레이오프 경기 녹화분을 방영했다. 스턴 덕에 NBA는 상상도 못 할 수준으로 번창했지만, 스턴은 한 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난리가 날 것 같은 상황에 안심할 수 없었다. “제가 NBA를 맡은 시기와는 매우 달랐습니다”라고 실버는 말했다.

우리 모두처럼 NBA 선수들도 이제 10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기세로 정보를 접한다. 워리어스의 스티브 커 감독도 말했다. “이제 전화기만 꺼내면 총격 사건 현장을 바로 볼 수 있어요. 매 분마다 업데이트되는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활약이 미미한 선수의 연봉조차 넉넉해진 덕분에 이제 누구도 후환의 두려움 없이 의견을 표할 수 있다. NBA 평균 연봉은 조던의 신인 시즌에 32만5000달러(물가를 감안하면 76만 달러)였던 것이 이제 850만 달러로 뛰었다. 워디도 자신의 현역 시절을 회고했다. “나이키의 성질을 건드릴까 봐 모두 걱정하던 게 기억납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역전됐죠. 언더 아머는 스테픈 커리와 그의 가치를 거스르지 못합니다. 요즘은 슈퍼스타가 어느 기업보다도 더 가치가 크니까요.

후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팀이 있다면 거기는 바로 커리의 워리어스일 것이다. 일단 연고지가 미국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베이 에어리어다. 안심할 만큼 친민주당 성향인 실리콘밸리가 주 시장이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유명 테크 기업은 도널드 트럼프 후원금의 60배에 달하는 금액을 힐러리 클린턴에게 기부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NBA 팀과 마찬가지로 워리어스 선수단은 확고한 좌파 성향을 보인다. 커가 말했다. “정치적인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강경 보수인 선수를 거의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워리어스의 대표 소유주의자 벤처 자본가 조 레이콥은 리그의 다른 백인 부자처럼 은밀히 트럼프를 지지했다. “제 신념을 모두 공유할 수 없는 구단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라고 커는 말한다.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요. 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모호한 구석도 분명히 있어요. 워리어스의 대표로서 농구에 대해 매일 이야기하니까요. 저 또한 구단의 얼굴 가운데 한 명입니다.”

실버는 동등한 동업자라 여기는 선수를 안심시키려 의식적으로 애쓴다. 무엇보다 선수들이 걱정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실버는 말했다. “저의 직함은 총재이지 정치 운동가는 아닙니다. 저도 알죠. 선을 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렇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넘었을지도 모르고, 설사 그랬더라도 당시에는 모를 수 있어요. 하지만 한편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습니다. 스포츠 리그이든 소비재 기업이든 이런 시대에는 확고한 입장을 취해야 해요. 고객이 그걸 원합니다. 팬도 원하고요.”

2016년 여름 실버는 또 한번 입장을 취했다. WNBA도 관장하는 NBA 직원 몇이 뉴욕 게이 프라이드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자비를 들여 양 리그를 대표하는 꽃수레를 만들고 총재에게 탑승을 요청했다. “저는 사안을 다소 편협하게 생각했습니다.” 실버는 밝혔다. “내부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적인 결정이지 NBA 차원의 결정은 아니라고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설명이다. 실버의 참가는 그대로 정치적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저는 리그의 가치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야 인정했다. “관용을 포함한 가치 말입니다.”

꽃수레가 5번가로 나갈 때 하필 휴가 기간에 맨해튼에 온 그레그 포포비치가 그 장면을 봤다. “그냥 서 있었는데 행렬이 다가왔습니다. 깜짝 놀랐죠. 애덤이 저기 있네! 꽃수레를 타고 있어! 저는 꽃수레에 올라 애덤을 안았습니다. 돌아보니 애덤을 보았을 때 저도 반쯤 무의식적으로 분명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NBA의 일부인 저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그리고 모든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Kakao Talk
  • 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