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힙합의 미래가 아니다

미국 힙합 신에서는 ‘혐오’를 발음하는 것이 더 이상 쿨하지 않다.

힙합을 좋아하고 아끼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세월이 지났다. 나에게 힙합이란 기성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혁신적인 예술인 동시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철학이자 삶의 방식이다. 또 늘 영감과 동기를 부여하는 음악이며 동시대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인식의 틀이다. 내게 있어서 힙합이란 ‘진실함, 자신, 긍정적 기운, 늘 위로 향하는 방향성, 더 나아지려는 노력, 야망과 포부, 내 방식대로 생각하기, 리스펙트’ 등의 단어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면 나와 일말의 교집합이 없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여전히 많은 이가 힙합을 비판하거나 불편해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나 같은 사람들의 영원한 숙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왜 힙합은 욕설과 거친 표현을 좋아하는지, 왜 래퍼들은 자랑과 잘난 척을 하는지, 왜 랩으로 누군가를 공격하는지, 제일 유명하다는 힙합 음악에 여성 혐오 메시지는 왜 들어 있는지에 대해 나는 늘 설명해야 했다. “대체 이런 걸 왜 좋아하는 거야?”라는 질문에 나는 이미 익숙하다.

힙합의 여성 혐오에 대한 비판은 사실 최근의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적어도 1980년대부터 이런 비판이 나왔다. 문득 몇 개월 전에 읽은 글이 생각난다. 여성 칼럼니스트 키아나 콘더스는 <매스 어필>(massappeal.com)에 기고한 ‘힙합의 여성 혐오 문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힙합 팬인 동시에 여성으로서 나는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랩 가사를 종종 뻔뻔하게 따라 부르곤 한다. 캄론의 ‘Suck It Or Not’까지는 참고 들어줄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미넴의 ‘Kim’이나 쿨 지 랩의 ‘Hey Mister Mister’ 같은 노래를 즐겨 듣는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을 비인격적으로 다루는 가사가 나올 때 나는 플레이 정지 버튼을 누르곤 한다. 이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는 여성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힙합을 계속 사랑하기 위해 내가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했던 것이 있다. 래퍼를 그의 음악과 분리해 생각하는 것, 가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뜻이나 은유가 있다고 애써 믿는 것이다. 모욕적인 가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힙합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테니까, 그건 나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예술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예술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할 많은 요소 가운데 ‘혐오’는 예외여야 한다. 힙합은 혐오를 배제하고 진보해야 한다.

힙합 팬인 동시에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서, 나는 그녀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 또 도의적 책임감 역시 느낀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남성으로 태어난 덕분에 나는 그녀가 오랫동안 겪고 있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 힙합의 여성 혐오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완전한 오해도 아니고 무지의 소산도 아니다. 적절하고 일리 있다. 힙합이 그동안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와 약자를 공격하는 데에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온 경향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예술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예술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할 많은 요소 가운데 ‘혐오’는 예외여야 한다. 힙합은 혐오를 배제하고 진보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제이지의 새 앨범 <4:44>는 주목할 만하다. 특히 동명의 노래 ‘4:44’가 그렇다. 제이지는 이 노래에서 과거에 그가 행한 많은 것에 대해 사과한다. 언뜻 아내 비욘세를 향한 사적인 사과에 불과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 노래는 힙합 역사상 가장 존재감이 큰 한 래퍼가 힙합을 대표해 세상에 하는 사과다. 아니, 더 나아가 남성 우월주의를 오랫동안 품어온 힙합이 직접 세상에 하는 사과라고 볼 수 있다. “내 아이가 태어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됐어.” 이제 ‘Big Pimpin’’의 제이지는 더 이상 없다. “여자들과 잔 후 바로 떠나지. 난 걔네가 필요 없으니까”라고 말하던 제이지는 죽었다.

<4:44>는 큰 반향을 불러왔다. 제이지가 자신이 겪어온 삶의 여정과 흑인의 역사에 관해 마치 선생님처럼 이야기하는 이 앨범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잇따랐다. 물론 그중에는 악담도 있다. 대표적으로 50센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앨범은 마치 안경을 쓰고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은 후에 들어야 할 것 같아. 난 이걸 ‘아이비리그 음악’이나 ‘골프 코스 음악’이라고 부르겠어.” 하지만 켄드릭 라마를 비롯한 수많은 래퍼가 이 앨범을 들은 후 제이지를 ‘완벽한 선생님(master teacher)’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람들이 이 앨범을 통해 여성 혐오에 관한 제이지 개인의 진전, 더 나아가 힙합의 진전을 논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미국 저널리스트 클레이 케인이 CNN(cnn.com)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다. “힙합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발표한 이 앨범은 매우 혁명적이다. 제이지는 이 앨범에서 자신의 삶이 여성에 의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다. (중략) 남성은, 특히 힙합 문화에서 흑인 남성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기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사과’는 곧 나약함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제이지는 이 앨범에서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에 구애받지 않고 있다.”

제이지가 ‘큰형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젊은 래퍼들 역시 힙합을 바꾸어가는 중이다. 로직의 싱글곡 ‘1-800-273-8255’는 최근 빌보드 싱글 차트 3위까지 올랐다. ‘1-800-273-8255’는 미국의 ‘자살 방지 핫라인’이다. 로직은 이 노래에서 자살 충동을 극복하고 삶에 다시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의 퍼포먼스다. 이 공연에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살아난 사람 50여 명이 무대 위에서 로직과 함께했다. 그들의 티셔츠에는 “넌 혼자가 아니야”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노래 후반부에 등장하는 연설이다. 로직은 이 공연에서 음원에는 없는 연설을 했다. “주류 매체가 외면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신 건강, 불안, 자살, 우울증 그리고 인종차별, 성차별, 가정 폭력, 성폭력 같은 것에 대해 말이죠. 저는 여러분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든 무슬림이든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저에겐 아무 상관없어요. 저는 여러분의 평등한 권리를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평등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 노래에는 여성 혐오뿐만 아니라 어떠한 혐오도 없다. 그럼으로써 모든 혐오에 반대한다. 나는 지금 어느 무명 래퍼의 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빌보드 싱글 차트 3위에 올랐고, 유튜브 조회 수 억대를 넘긴 노래에 관해 말하고 있다. 솔직히 이 공연 영상을 보고 조금 울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남자다.

릴 야티의 데뷔 앨범 도 놓쳐선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이 앨범의 아트워크를 언급해야만 한다. 이 앨범 커버에는 키스하는 게이 커플, 백반증을 앓는 여성, 백색증을 앓는 남성, 그리고 다양한 인종·민족의 사람이 담겨 있다. 모두 소수자와 약자다. 릴 야티는 현재 가장 각광받는 래퍼 중 한 명이지만 동시에 올드 힙합 팬에게는 공공의 적이기도 하다. 특히 투팍과 비기의 노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그의 말이 공분을 샀다. 힙합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릴 야티는 힙합의 다른 전통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표현의 자유를 혐오에 이용해온 전통 말이다.

얼마 전 스윙스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래 있는 걸로 계속 가려고 하는 건 힙합의 반대예요. 그래서 ‘꼰대’라는 말이 랩 가사에 자꾸 등장하는 거예요. ‘이건 꼰대 짓이야. 이게 무슨 힙합이야?’ 같은.” 돌이켜보면 힙합은 늘 가장 먼저 시대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해왔다. 늘 새로운 것을 가장 먼저 흡수해 흐름을 선도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힙합은 젊은이의 음악으로 불렸다. 지금 힙합은 혐오를 대하는 시대의 변화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그렇게 힙합은 앞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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