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의 정신

정현은 지금 이겼지만 또 질 것이다. 그래서 끝내 이길 것이다.

고해성사부터 하고 시작해야겠다. 내가 그동안 정현을 좀 우습게 봤다. 이제부터 이어지는 글은 그와 관련한 참회록이다.

ATP 투어 대회 중계를 즐겨 본다. 굵직한 경기라면 케이블방송뿐 아니라 곳곳을 뒤져서라도 보는 편이다. 지난해에는 그중에서도 정현의 경기를 즐겨 봤다. 세계 랭킹이 100위권에서 80위권으로, 다시 50위권으로 진입하는 성장 과정을 흐뭇하게 지켜봤다.

정현은 좋은 선수였다. 테니스 선수로 나쁘지 않은 체격(188cm, 83kg)에 발이 빠르고 스트로크가 안정돼 있었다. 네트 앞으로 치고 나가 공격하기보다는 베이스라인 근처에서 상대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유형, 이른바 ‘베이스라이너’에게 요구되는 조건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는 듯 보였다.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점이라면, 이 글을 쓰는 내가 이 젊은 유망주를 두고 ‘더 큰 성공을 기대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라고 함부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후하게 쳐도 일본의 간판스타 니시코리 게이(2018년 1월 현재 세계 27위)의 벽을 넘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렇게 지레짐작했다.

2014년 US 오픈 준우승자이며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니시코리가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비결은 크게 두 가지라고 판단한다. 강력한 서비스 리턴과 정확한 스트로크. 니시코리는 일단 시속 200km가 넘는 톱 랭커들의 서브를 날카롭고 통렬하게 되받아친다. 공격적인 테니스를 구사하는 이른바 ‘서브 앤드 발리’ 유형의 선수들은 이 1989년생 일본 선수의 강력한 리턴에 좀처럼 네트 쪽으로 달려나가지 못한다. 어설프게 넘겨놓고 무리하게 달려들었다가는 니시코리의 날카로운 패싱샷에 당하게 마련이니까.

니시코리는 이어 빠르고 정확한 스트로크로 게임을 유리하게 이끌어간다. 니시코리는 백핸드와 포핸드 모두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굳이 꼽으라면 백핸드 스트로크가 더 강력하다고 평가되지만 포핸드도 그 못지않다. 특유의 리턴으로 상대의 서브를 무력화시킨다. 게임을 자신에게 유리한 스트로크 대결로 이끌어나간다. 니시코리가 전가의 보도처럼 구사하는 승리의 전략이다.

‘그처럼 장점이 뚜렷한 니시코리에 비해 정현은 그다지 내세울 게 없어 보인다’는 게 지난해 내 판단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한심한 안목이다.

변명처럼 보이겠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정현의 스트로크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두 손으로 치는 백핸드는 세상 누구와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정확하고 힘찼지만 포핸드는 그에 비하면 꽤 허술했다. 여기에 서브의 위력이 대수롭지 않았고 발리나 드롭샷 같은 잔기술 또한 세계 수준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던 지난해 6월, 그런 분석이 옳은지 그른지 판가름해줄 무대가 마련됐다. 프랑스 오픈에서 정현과 니시코리의 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롤랑가로스의 붉은 벽돌 가루 코트(흔히 ‘앙투카 코트’라고 불리는)에서 정현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경기 내용을 보여줬다. 비록 패했지만 자신보다 랭킹이 훨씬 높은(당시 정현은 60위권이었다) 니시코리를 5세트까지 몰아붙였다. 특히 3세트는 내용 면에서 테니스의 진수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멋들어졌다. 가장 흡족했던 것은 백핸드 스트로크에서 정현이 아주 살짝이나마 니시코리에 앞섰다는 점이다. 양 선수 모두의 강점으로 평가되는 부분(백핸드)만 놓고 봤을 때, 정현은 분명 니시코리에 한발 앞서나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니시코리와의 일전은 앞서 열거했던 정현의 단점들이 고스란히 노출된 경기이기도 했다. 백핸드 위너(포인트를 얻게 만들어준 샷)는 통쾌했고 풍성했지만 포핸드 쪽은 턱없이 부족했다. 서브도 마뜩잖기는 마찬가지. 속도가 느린 데다 코스마저 효과적이지 못해서 자신의 서브 게임에서도 상대가 어렵지 않게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만들었다. 여기에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았다. 3세트를 포함해 막판에 분전을 거듭해 승리 문턱까지 이르기도 했지만 비 때문에 연기되는 해프닝이 겹치며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결국 정현은 니시코리에게 세트 스코어 2 대 3으로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한때 니시코리가 라켓을 내던질 만큼 몰아붙이기는 했지만 끝내 패배. 거기까지인가… 싶었다.

이후 넥스트 제너레이션 파이널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한계가 제법 뚜렷하다’는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어린 선수들끼리 벌이는 대회 아니던가. 그리고 올해 첫 메이저 대회인 호주 오픈이 문을 열었다.

멜버른의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정현은 전혀 다른 선수가 돼 있었다. 먼저 포핸드가 강력해졌다. 지난해 니시코리와 다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정확해졌고 위력도 좋아졌다. 위너를 팡팡 터트릴 만큼은 아니었어도 적어도 포핸드로 칠 공을 무리하게 백핸드로 쳐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지난해에는 이런 플레이가 적지 않았다). 서브도 어느 정도는 좋아졌다.

무엇보다 호주 오픈에서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정현의 강점 두 가지가 총천연색으로 빛을 발했다. 바로 정신력과 체력이었다.

당시 세계 랭킹 4위인 강호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와의 32강전은 그 체력과 정신력으로 일궈낸 놀라운 성과였다. 이 경기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정현이 자신의 서브 게임에도 상대에게 브레이크 기회를 내준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을. 그러나 정현은 그때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듀스를 만들어냈고 끝내 게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경기가 만들어낸 숫자를 살펴보면 내용이 어땠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기록상 정현은 퍼스트 서브 성공률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항목에서 즈베레프에게 뒤진다. 서브 속도에서 즈베레프가 200km대인 것에 비해 정현은 180km대에 머물러 있다. 그런 위력을 바탕으로 상대가 서브 에이스를 21개 따낸 데 비해 정현은 5개에 그쳤다. 심지어 경기에 이겼음에도 위너포인트 숫자에서 정현(44개)은 즈베레프(57개)에 크게 뒤진다. 그처럼 모든 면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정현은 끝내 승리를 차지했다. 질 듯 질 듯하면서도 끝내 이겨낸 것이다.

바둑이든 PC 게임이든 평소 승부를 즐겨 하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고 꾸역꾸역 약점을 노리는 스타일이 얼마나 피곤한지. 그런 상대에게 한 판 이겨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호주 오픈에서 정현은 바로 그런 유형의 선수였다. 아무리 구석에 공을 떨어뜨려놓아도 후다닥 달려가서 걷어내는 빠른 발과 정확한 스트로크, 아무리 좌우로 뛰어다니게 만들어도 숨결 한 번 거칠어지지 않는 강인한 체력, 아무리 위기가 닥쳐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 즈베레프는 그런 상대에게 그만 질려버렸는지 마지막 세트에서는 아예 0 대 6이라는 치욕적인 스코어로 세트와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이어 벌어진, 한때 세계 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와의 16강전은 이번 호주 오픈의 백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 이 경기에서는 7 대 6, 7 대 5, 7 대 6이라는 게임 스코어가 말해주듯 체력과 정신력, 정확한 스트로크라는 정현의 세 가지 강점이 가장 빛났다. 아무리 조코비치가 부상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베이스라이너의 교과서로 꼽히는 선수를 그렇게 완벽하게 제압하기란 그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정현 또한 이 경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았는데, 정현 자신뿐 아니라 수많은 팬들 역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로저 페더러가 남긴 한마디가 이 경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설명한다.

“조코비치를 그렇게 괴롭힐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세계의 벽은 높고 넓다. 적어도 테니스에서만큼은 그렇다. 서양인에 비해 팔다리가 짧고 체력이 뒤지기에 동양인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법하다. 그런 세계에서 정현이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한다(이제야 정신을 좀 차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년 사이에 포핸드와 서브가 그처럼 좋아졌다는 사실은 아직도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정현은 지난해 인터뷰에서 “나는 패배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고 고백했는데,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이번에 알았다. 천하무적의 백핸드에 포핸드와 서브가 보강되고 체력과 정신력을 더욱 키워나간다면 톱 10 안에 들기는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

올해 남아 있는 메이저 대회, 그리고 ATP 투어 대회에서 정현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할 것이다. 팬들의 눈길이 더 많아지고 또렷해진 만큼 패배는 전보다 훨씬 더 아플 것이다. 나는 그 패배를 통해 정현이 더욱 발전하기를 바란다. 브레이크 포인트를 내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호주 오픈의 그 모습 그대로라면 그렇게 하고도 거스름이 남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형택의 세계 랭킹 기록을 깼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금 언론의 칭찬이 한낱 호들갑이었다는 사실도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증명될 것이다.

지금 정현은, 즈베레프가 정현에게 패한 뒤 한 말 그대로 ‘쉽게 이길 선수가 많지 않는 선수’이며 페더러가 한 말 그대로 ‘세계 톱 10의 자격이 있는 선수’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그가 부디 지금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디 앞으로 닥쳐올 패배에 무릎 꿇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한층 더 성장하는 선수가 되길 바란다. 그렇게만 한다면, 한때 마이클 창이 이룩했던 메이저 대회 우승의 위업을 노란 피부의 정현(살짝 검은 쪽이기는 하다)이 다시금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 벽조차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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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 유준
사진©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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