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맥켈란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가 문을 열었다.

도토리를 하나 받았다. 도토리는 맥켈란에서 보내온 초대장이었다. 지난 5월 24일 도토리 하나를 손에 쥐고 스코틀랜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인 5월 25일은 스코틀랜드 북동부 스페이사이드에 위치한 싱글 몰트위스키 브랜드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가 첫선을 보이는 날이었다. 흔히들 위스키는 맥아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절반만 맞는 말이다. 위스키는 도토리에서 만들어진다. 땅바닥에 떨어진 도토리가 자라면 참나무가 된다. 위스키는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에서 오랜 숙성 기간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수년의 숙성 기간 동안 참나무 오크통과 안에 담긴 위스키 원액 사이에서 매일같이 형언할 수 없는 화학작용이 일어난다. 그렇게 참나무의 성질이 깊고 깊이 스며들면서 위스키의 성격이 결정된다. 참나무 오크통은 단순히 위스키를 장기 보관하는 저장 장치가 아니다. 어쩌면 오크통이 곧 위스키다. 그래서 위스키는 도토리에서 만들어진다. 맥켈란이 도토리 초대장을 보내온 이유다.

맥켈란의 라인업 중 가장 대중적인 제품으로는 맥켈란 12년산이 있다. 글자 그대로 오크통에서 12년 동안 숙성됐다는 뜻이다. 사실 위스키가 도토리에서 비롯된다 걸 기억한다면 맥켈란 12년산의 진짜 수령은 최소한 112년이다. 도토리가 맥켈란을 숙성시킬 만한 오크통을 만들 수 있는 아름드리 참나무로 자라나려면 적어도 100년이 걸린다. 맥켈란은 스페인에서 자라는 유러피언 참나무로 만든 오크통만을 사용한다. 유러피언 참나무는 유달리 더디게 자란다. 위스키용 오크통으로 쓸 만한 참나무로 자라는 데 15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대신 숙성 과정에서 더 깊은 향과 색을 자아낸다. 맥켈란의 맛과 향과 색이 더 깊고 더 강하고 더 진한 건 그래서다. 한 병의 맥켈란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하고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를 관통하는 시간 여행을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지금 당장 도토리를 땅에 심어도 200년쯤 뒤에야 한 병의 위스키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맥켈란 같은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브랜드는 과거로도 미래로도 멀리 보는 데 익숙하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산업은 수백 년 전에 시작됐고 수백 년 동안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 앞에서 겸손하다는 말이다. 당대의 그 어떤 인간도 지금 땅에 떨어진 도토리로 만들어진 위스키를 맛볼 수 없다. 맥켈란 같은 위스키 메이커에게는 지금 당장보다 200년 전의 역사와 200년 뒤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

2018년 5월 25일은 맥켈란이 새로운 도토리를 심은 날로 스카치위스키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200년 만에 새로운 증류소를 만들어 선보인 날이기 때문이다. 맥켈란는 1824년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라는 유서 깊은 증류소에서 출발했다. 3층 석조 건물인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는 지난 200년 동안 맥켈란의 상징이었다. 맥켈란 병의 라벨에도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가 새겨져 있다.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는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 바로 옆 보리밭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총건설비만 2000억원이 넘게 들어간 대역사였다. 새로운 증류소가 증설되면서 맥켈란의 연간 생산량은 수치상으로는 30% 가까이 늘어나게 됐다. 그렇지만 맥켈란이 새로운 증류소를 세운 근본 목적은 당장의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오늘의 생산량을 늘려 잡기 위한 것이 아니다. 성공한 위스키 브랜드는 예외 없이 시간 앞에서 스스로를 낮출 줄 안다. 200년 역사의 맥켈란은 200년 뒤를 준비하며 새로운 증류소를 지었다. 앞으로 자라나 맥켈란을 떠받치는 거대한 참나무 기둥이 될 증류소다.

5월 25일 저녁에 열린 맥켈란 뉴 증류소 오프닝 파티는 외형적으로는 새로운 증류소를 선보이는 행사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위스키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맥켈란의 철학과 태도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오프닝 파티는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 벽면에 레이저 빔을 쏴서 맥켈란의 200년 역사를 보여주는 미디어 아트로 시작됐다. 1824년 이후 맥켈란과 스코틀랜드와 위스키 산업을 관통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는 수많은 풍상을 거치면서 지난 200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신비로운 엘프가 등불을 들고 등장했다. 모두가 요정을 따라 더 깊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길이 120m, 높이 18m의 인공 잔디 동산이 줄지어 있었다. 맥켈란의 새로운 도토리였다. 맥켈란은 마치 200년 뒤 모습까지 보여주려는 듯 오색찬연한 미래적 조명으로 새 증류소를 밝혀놓고 있었다. 그렇지만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는 결코 높거나 화려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영국의 유명 건축 사무소 러저스 스터크 하버 파트너스는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를 마치 스코틀랜드 자연의 일부처럼 낮고 편안하게 설계했다. 바로 옆 이스터 엘키스 하우스를 압도하거나 경쟁하려 들지도 않았다. 과거 200년 브랜드 역사에 대해 맥켈란이 지닌 존경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1만4000m2에 달하는 낮은 지붕은 모두 잔디로 덮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인공 구조물이란 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맥켈란이 스스로를 스코틀랜드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증류소 내부로 걸어 들어갔을 때 지붕이 모두 나무로 돼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참나무 가지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서 지붕인 된 듯했다. 맥켈란이 도토리를 초대장으로 보내면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더 깊이 읽혔다. 증류소 입구부터 맥켈란의 역사가 새롭게 재배열돼 있었다. 지난 200년 동안 맥켈란이 생산해온 진귀한 싱글 몰트위스키들이 천장 꼭대기까지 황홀하게 전시돼 있었다. 그중에는 한 모금이 수백만원 값어치를 하는 귀한 맥켈란도 있었다. 새로운 증류소는 단순한 생산 시설이 아니라 맥켈란의 박물관이고 왕궁이었다.

나선형 계산을 돌아 2층 중앙 홀로 올라섰다. 증류소의 메인 바였다. 언제든 원하는 맥켈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날 파티에서는 진귀한 맥켈란을 풍족하게 선보였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맥켈란 M블랙을 무한 서빙했다. 스코틀랜드에 오기 전부터 맥켈란을 선호했다. 맥켈란의 200년 역사와 200년 미래를 관통하면서 마시는 맥켈란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한 모금 마실 때마다 시간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와 온몸으로 퍼지는 기분이었다. 스코틀랜드 싱글 몰트위스키의 진미가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위스키는 도토리에서 비롯돼 맥아로 만들어지고 시간으로 완성된다. 인간의 기대 수명은 길어봐야 100년이다. 그 누구도 영원히 살 수 없다. 매일 허덕이며 우물쭈물 살다가 이럴 줄 알게 되는 게 덧없는 인생이다. 인생은 너무 덧없이 흘러가기에 문득문득 슬픔을 이기기 어려울 때가 있다. 맥켈란은 그런 삶에 작은 위안이 돼준다. 수백 년의 시간을 한 모금씩 넘기며 잠시나마 영원을 맛본다. 시간이 몸속 구석구석으로 퍼질 때마다 조금씩 취해가고 결국 슬픔을 잊고 잠들게 되는 것이다.

싱글 몰트위스키를 만드는 공정은 200년 전 증류소나 200년 후 증류소나 동일하다. 맥아를 매시 턴이라는 거대한 수조 안에서 뜨거운 물과 함께 불려 맥아즙을 만들고, 여기에 이스트를 넣어 워시라고 하는 액체로 만든다. 증류기로 워시를 기화시켜 스피리트라는 위스키 원액을 얻어낸다. 증류기의 키 높이에 따라 위스키의 맛과 향이 달라진다. 맥켈란은 짧아서 특유의 깊은 맛이 난다. 그리고 오크통 숙성 단계다. 맥켈란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셰리 와인을 보관했던 셰리 오크통을 쓴다. 맥켈란의 차별화된 색과 풍미는 상당 부분 여기서 기인한다.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는 이런 동일한 공정을 좀 더 현대적으로 구성해놓았다. 위스키 증류소의 핵심 생산 설비라고 할 수 있는 매시 턴과 증류기를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질서 있게 배치해놓았다.

사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위스키 투어가 중요한 관광 상품이 된 지 오래다. 맥켈란뿐만 아니라 주요 위스키 브랜드는 모두 증류소 투어 코스를 유료로 판매하고 있다. 2017년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를 둘러본 방문객의 숫자는 2016년에 비해 15%나 증가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산업은 위스키 판매뿐만이 아니라 위스키에 홀린 위스키 성지 순례객들로부터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뜻이다. 맥켈란의 새로운 증류소는 단순한 생산 설비를 넘어 이런 성지 순례객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다. 맥켈란 증류소의 생산 설비가 이토록 현대적이고 미래적으로 구성된 까닭이다. 맥켈란 증류소와 비교해보면 주변의 증류소들은 아직도 200년 전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증류소를 둘러보고 나면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도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쯤 되면 맥켈란의 도토리가 장차 얼마나 커다란 참나무로 자라날지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맥켈란은 뿌리 깊은 나무였다.

맥켈란은 뉴 증류소 한쪽에 지난 3년 반 동안의 공사 과정을 사진으로 전시해놓았다. 매그넘 사진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기초공사를 하는 모습부터 나무 지붕을 올리는 모습까지 증류소가 완성되어가는 순간순간이 전부 기록돼 있었다. 이 공간이 과거의 시간 속에서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맥켈란이 지닌 시간과 역사에 대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브랜드들이 지닌 내공이 느껴졌다. 오크와 맥아만 있으면 위스키는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위스키에 시간의 맛이 깃들이게 하는 건 그에 걸맞은 태도를 지니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스코틀랜드를 찾은건 무려 23년 만이었다. 23년 전 맥켈란의 증류소에서 오크통에 담겨졌을 위스키를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견디며 조금씩 숙성돼갔을 세월을 기억했다. 때때로 천사를 만나 그녀들의 몫을 나눠줬을 달콤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서로 나이 먹고 숙성돼서 그렇게 우린 스코틀랜드에서 다시 만났다. 맥켈란을 삼켰다. 인생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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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사진Edrington Korea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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