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반의 민족

우리는 백반을 벗어날 수 없다.

일제강점기 쇼와 시대인 1940년에 총독부 관영 신문인 <매일신보>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용서 못 할 白飯 階級(백반 계급)’. 분기탱천한 이 기사는 전시 총동원 상태에서 물자 절약을 위해 쌀 배급을 줄이고 혼식을 권장하는 와중에 어떤 부자들은 하얀 쌀밥을 먹고 있다,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뭐 이런 내용이었다. ‘백반 계급’이란 신조어가 눈길을 끈다. 이런 일은 전후에도 그대로 반복되어 1950년전쟁이 나기 전)에는 백반과 낮술을 팔면 구속되거나 구류 2주에 처한다는 엄포성 기사가 신문에 연일 실렸다. 실제로 구류를 살고 치도곤을 당하는 이들의 기사도 나왔다. 

나는 약간 소름이 끼쳤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백반에 낮술이기 때문이다. 아니, 백반이란 흰 쌀밥인데 그걸 안주로 어떻게 소주를 마시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해드려야겠다. 당대에 백반은 흰 쌀밥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조촐하고 서민적이며 소소한 데다가 가정식 반찬을 몇 개 늘어놓고 소주나 막걸리를 마시는 걸 뜻했다. 밥이야 뭐 그게 쌀밥인지, 콩이 섞였는지, 아니면 아침 일찍 작은 공기에 담아 온장고에 넣어둔 바람에 딱딱하게 굳고 쉰 냄새를 풍기는지 그다지 중요한 일이 못 된다. 그저 반찬 몇 가지에 술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저 백반의 수도인 서울에 공짜 반찬(그것도 리필이 되는)만을 놓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집이 당최 몇 곳이나 되느냐는 말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이 아주 흔해서 점심상에 소주나 막걸리가 한 병 놓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을지로나 종로 바닥의 붐비는 밥집이 아니면 일상적인 식당 풍경이었다. 물론 붐비는 에이급 동네의 밥집도 한 시가 넘어가면 얼마든지 ‘백반 한 상’을 안주로 술을 먹을 수 있었다. 심지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이것도 백반을 기본으로 하므로 김치찌개백반, 된장찌개백반으로 부른다)를 시키면 훌륭한 안주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었다. 건더기와 국물을 떠먹어도 좋고, 백반의 핵심인 밥을 국물에 말면 아주 훌륭한 안주로 변모하곤 했던 것이다. 설사 그 반찬이 재활용인 줄 알아도 ‘그런가 보다’ 하는, 나처럼 무딘 사람이 많았고, 한반도 단일민족의 의지와 단군 할아버지라는 한 조상을 섬기는 마당에 재활용 반찬으로 그까짓 침이 좀 섞인들 어떤가 하는 게 그 시절의 보편적 정서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백반이란 뭔가. 하얀 밥이란 뜻인가. 누구는 반찬이 많은(百) 밥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꽤 설득력이 있다. 전라도 쪽의 밥상을 한번 보라. 반찬을 놓을 자리가 모자라 겹쳐 쌓기의 신공이 흔하지 않은가. 어쨌든 백반은 쌀밥과 몇 가지 반찬과 국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우리네 집 음식이며, 그것이 가정식이라는 이미지를 입고 시중의 밥집에서 흔하게 파는 음식이 되었다. 이건 남북이 따로 없어서 옥류관이나 북한의 여러 식당에서도 밥상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순댓국이 들어가면 순댓국 밥상, 된장찌개가 올라가면 된장찌개 밥상. 백반 문화는 유구하여 우리 민족 음식의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밥과 반찬, 국으로 이루어진 이 기본적인 상은 스테이크와 빵과 커리와 파스타와 베트남 국수가 실제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한식의 표준적인 이미지를 구성하고 있다. 나 같은 올드한 세대는 백반으로 말미암아 살아왔으며, 앞으로 백반을 먹으며 죽을 것이다. 내가 먹어치운 백반은 집에서 먹은 진짜 가정식을 포함하여 계산하면 하루 세 끼 × 365일 × 53년
= 58,035! 물론 여기에서 짜장면과 설렁탕과 불고기와 라면 같은 것은 빼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음식조차도 짜장면은 짜장밥으로 변신시켜 백반화했으며, 회까지도 회백반이란 장르를 탄생시켰고, 설렁탕과 불고기도 각각 뒤에 ‘~백반’이라고 붙여 부르는 걸 서슴지 않았다. 냉면에는 밥을 말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백반에 대한 이 어마무시한 집념의 식사법은 대대손손 이어질 가능성이 큰데, 아이들이 아무리 피자와 파스타, 햄버거를 먹는들 학교에서는 급식으로 여전히 ‘백반’(물론 이런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식욕을 떨어뜨리고 거부감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아이 구려!)을 먹기 때문이다. 백반은 박근혜와 이명박 두 수형자도 매일 먹으며(주말에는 특식으로 국수나 빵 같은 분식이 나올지도) 60만 대군과 패키지 해외 관광객의 하루 한 끼니와 양식을 주로 만드는 한국의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의 요리사들도 별수 없이 백반을 먹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최고의 백반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스르르 알루미늄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주머니가 주섬주섬 반찬 그릇을 채우고, 더러는 달걀말이와 군용 소시지를 넣은 달걀부침과 작은 생선구이 한 토막을 얹은 제대로 된 백반을 먹고 싶어 한다. 이건 요상하게도 나이가 들면 그런 경향이 더 강해져서 결국 우리는 백반의 굴레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난 채로 삶을 마치게 된다고 믿어지곤 한다. 아, 물론 당신은 그 백반상이 지긋지긋해서 아침은 빵에 버터를 바른 후 시리얼을 우유에 말고, 저녁은 비프스튜를 먹고 싶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아서일 것이다. 단언컨대 우리는 백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청담동에서 제일 장사가 잘되는 집은 무슨 오리고기 훈제 파테나 도쿄 쓰키지 시장 공수 스시집이 아니라 청담골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집 발레파킹 직원이 마이바흐에 벤츠, 벤틀리를 청담동에서 제일 많이 핸들링한다면 믿지 않으시겠지? 게다가 아이들이 백반을 싫어한다고? 야밤에 그 식당 안을 들여다보면 SM과 JYP의 아이돌 또래가 단체 미팅하는 것 같은 광경을 볼 수 있다. 아, YG는 홍대 앞 삼거리 식당에서 삼겹살 백반을 먹느라 이곳에 안 온다. 

  • Kakao Talk
  • Kakao Story

Credit

에디터
박찬일(로칸다 몽로 셰프)
일러스트불밝힌 작업실
출처
37590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