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차이니스 바

바이주 칵테일이 유행하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중국 요리가 느끼하게 느껴지는 순간 고량주를 한두 잔 곁들이기 적당하다. 주당들은 그 이상도 즐길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40도를 웃도는 알코올 도수와 코를 찌르는 향에 거푸 마시기 어렵다. 하물며 독주를 즐기고 발효취에 익숙한 우리가 이러한데 서양 사람들은 오죽할까. 중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외국인 열에 아홉은 고량주에 대한 나쁜 기억을 안고 있다. 그들은 고량주를 ‘파이어 워터(fire water)’라고 부르며, 급기야는 발 냄새, 썩은 과일 냄새가 난다고 인식한다. 그런데 최근 뉴욕, 런던, 홍콩을 중심으로 고량주가 새로운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다. 이들 도시에 소재한 유수의 바들이 고량주를 칵테일의 기주(基酒)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 이름하여 바이주 칵테일(Baijiu Cocktail)이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고량주는 수수로 빚은 발효주를 증류한 것으로 이름의 ‘고량(高粱)’이 수수에 해당한다. 그중 색이 투명한 것에 한자 ‘백주(白酒)’를 붙여 ‘바이주’라고 부르는데, 바에서 칵테일의 기주로 쓰는 고량주가 대부분 투명하기 때문에 고량주보다 바이주로 통한다.

바이주 칵테일, 중국 요리

2015년 뉴욕 한복판에 바이주 칵테일 바 루모스(Lumos)가 문을 열자 <뉴요커> <뉴욕타임스> <NBC 뉴스> 등은 이 사실을 앞다퉈 기사로 다뤘다. 현재 내로라하는 특급 호텔들이 바이주 칵테일을 메뉴에 올리고 포틀랜드에는 바이주를 생산하는 증류소가 생기기도 했다. 한편 런던에서는 중국 춘절에 ‘바이주 칵테일 주간(Baijiu Cocktail Week)’ 행사가 열린다. 이 기간 동안 런던에 위치한 10여 곳의 바에서 바이주를 기주로 한 독창적인 칵테일을 맛볼 수 있다. 홍콩과 베이징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이 유행이 태동한 곳이 베이징이며,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문을 연 캐피털 스피리츠(Capital Spirits)가 그 시초가 됐다. 중국 생활을 거듭하며 서서히 바이주의 매력에 눈을 뜬 그들은 같은 처지의 이방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바를 차렸다. 사실 바이주는 잔으로 팔고, 칵테일은 기존 레시피대로 진이나 보드카를 활용하여 내놓는 등 더 안전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바이주 칵테일을 고집한 이유는 바이주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사실 다른 음료를 섞어 희석해도 바이주 특유의 향은 남는다. 외국인들이 이 잔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배경에는 우마미가 있을 터. 감칠맛을 의미하는 일본어 ‘우마미’가 라멘의 유행으로 미국과 유럽 전역에 통용되면서 서양 사람들이 바이주의 발효취를 일종의 감칠맛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마오타이에 대한 태도다. 예전에는 술에서 장맛이 난다고 외면했던 마오타이의 현재 테이스팅 노트는 ‘꽃, 일본 된장, 은행, 덖은 쌀’이다.

이러한 낯선 흐름에 바이주 회사들도 호응하고 나섰다. 자국의 젊은 층과 외국인들의 취향을 고려해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던 도수를 낮추고 향에도 현대적 느낌을 가미하려고 노력한다. 대표적인 예가 HKB, 즉 홍콩 바이주(Hong-Kong Baijiu)다. HKB는 43도로 바이주의 평균 도수인 52도보다 훨씬 낮다. 수수와 함께 밀, 옥수수, 멥쌀, 찹쌀 등을 재료로 하여 좀 더 복합적인 향을 추구하며 마지막 여과 작업에 공을 들인다. 그 결과 한결 더 섬세하고 현대적인 향을 구축한 HKB는 칵테일 기주로서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혔다. 도수가 아닌 향으로 구분해 개발한 바이조(Byejoe)가 대표적이다. 바이조 레드가 오로지 붉은 수수만 넣어 바이주의 원조에 가까운 제품이라면 바이조 드레곤은 용과, 리치, 고추로 향을 더하는 한편 그만큼 도수를 낮췄다. 한편 타이완의 대표 바이주인 금문고량주는 28도부터 58도까지 도수를 다양화하여 변화하는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도 유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우선 ‘차이니스 바’라는 생소한 단어의 조합이 심심찮게 들린다. 차이니스 레스토랑과 몰트 바는 익숙해도 ‘차이니스’와 ‘바’가 접목될 줄 몰랐다는 게 중론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인스타그램에 ‘차이니스 바’를 검색하니 156개의 게시물이 걸리는데 게시물 간의 시간 간격이 갈수록 좁아진다. 차이니스 바를 태그한 게시물이 최근 급속도로 늘었다는 이야기다. 그중 가장 앞선 게시물은 2015년 9월에 올라온, 차이니스 라운지 ‘모던눌랑’에 대한 것이다. 흡사 브런치 카페를 연싱시키는 모던눌랑에도 바이주 칵테일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형태는 바보다는 레스토랑에 가깝다. 그다음으로 검색되는 게시물이자 가장 많이 검색하는 게시물은 ‘명성관’을 가리킨다. 한때 상수동에 있었던 명성이발관 자리에 2016년 11월 들어선 차이니스 바 명성관은 유흥가를 이룬 상수동에서 가장 긴 줄이 서는 곳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전 세계 다이닝 신의 화두로 등극한 쓰촨요리와 바이주 칵테일을 선보이는 만큼 대표가 미식 트렌드에 굉장히 밝은 사람일 줄 알았으나 그 반대다. 명성관 고건 대표는 이 둘을 선택한 게 우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15년간 레스토랑과 바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가게를 차리게 됐어요. 상수동 토박이라 이곳이 영순위였는데 일대에 이미 웬만한 가게가 다 들어와 있었어요. 그중 의외로 없는 게 중식이어서 이것을 택했죠.” 그의 말처럼 시작은 오히려 단순했다. “이왕 할 거 좀 더 재미있는 중식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에 샌프란시스코의 중식점 ‘미션 차이니스 푸드’의 셰프 대니 보윈의 음식을 먹고 산초를 기본 향신료로 한 쓰촨요리에 흥미를 느꼈던 게 생각났죠. 그때부터 대림동을 찾아 여러 가지 쓰촨요리를 맛보며 거기에 다양한 주종을 곁들이면 저 같은 애주가들이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친한 중식 셰프를 찾아가 요리를 배웠죠.”

차이니스 하이볼이 소홍주 특유의 쌉쌀하면서도 짜고 단 간장 맛이 나서 흥미롭다면, 화이트 피즈는 바이주의 찌르는 듯한 열대 과일 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풀어냈다.

그렇다면 중국 술 칵테일은 어떻게 고안해냈을까. “중국 술 칵테일은 일본에 사는 친구로부터 처음 들었어요. 그 친구 말이 일본에서는 소홍주를 칵테일로 즐겨 마신다는 거예요. 발효주인 소홍주는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강해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조리할 때만 쓰지, 음용하지는 않거든요. 호기심에 소홍주를 가지고 기존 레시피대로 여러 칵테일을 만들어봤어요. 그러다 하이볼로 제법 잘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고 ‘차이니스 하이볼’을 메뉴에 올렸어요.” 차이니스 하이볼을 향한 반응이 생각보다 크자 고 대표는 중국 술 칵테일을 늘릴 필요성을 느꼈다. 현재 명성관의 중국 술 칵테일은 총 다섯 가지. 여기서 갑자기 바이주 칵테일이 아닌 중국 술 칵테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소홍주가 바이주도, 고량주도 아닌 황주(黃酒)에 속하기 때문이다. 차이니스 하이볼이 소홍주 특유의 쌉쌀하면서도 짜고 단 간장 맛이 나서 흥미롭다면, 연태고량주를 기주로 한 화이트 피즈는 바이주의 찌르는 듯한 열대 과일 향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풀어냈다. 리치를 으깨 넣은 게 신의 한 수로 느껴져 이를 고안해낸 배경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리치 통조림이 있길래 재미 삼아 해봤어요.”

명성관이 상수동에 어울릴 법한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한남동에 위치한 레드문은 보다 더 업스케일에 가깝다. 간판 대신 붉은 달을 단 레드문은 스피크이지 바를 표방한다. 국내 최초의 스피크이지 몰트 바가 위치한 한남동에 스피크이지 차이니스 바가 생겼다는 사실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붉은 달을 좌표 삼아 골목에 들어서면 빨간 문이 등장한다. 그 문을 열고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예상치 못한 넓은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참치마라(參知麻辣)’라고 쓴 빨간색 네온사인이 홍콩의 유명 바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근사한 분위기는 아직까진 생소한 개념인 차이니스 바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중식의 패러다임을 깨고 타파스처럼 음식을 소량으로 내놓는 것도 흥미롭다. 그런데 레드문도 명성관처럼 우연한 기회에 차이니스 바를 선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통 몰트 바를 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찾아보니 이미 포화 상태더라고요. 다른 종목을 찾던 중 동업자 가운데 한 친구가 홍콩에서 쓰촨 음식점을 하려다가 불발됐다며 서울에서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주변에서 훠궈나 마라탕을 즐기는 사람이 점점 늘기도 하고, 한국 사람들이 워낙 강하고 자극적인 맛을 좋아하잖아요.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죠.” 안휘수 대표의 설명이다. 레드문은 위스키, 와인, 맥주, 고량주 등 다양한 주종을 구비했지만 대부분 고량주를 찾는다. 바에 앉아 시뻘건 쓰촨요리에 고량주를 곁들이는 모습이 자못 이색적이다. 안 대표는 앞으로 고량주 종류를 늘리고 바이주 칵테일을 개발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중식 셰프의 위상을 높인 이연복 셰프는 이러한 일련의 변화에 반색을 표한다. “요리의 양을 줄이는 건 예전부터 중식이 꼭 추구해야 할 변화라고 여겼어요. 연인 등 적은 수의 사람이 왔을 경우 요리를 여러 개 먹고 싶어도 각각의 양이 많으니 그럴 수 없잖아요. 양을 줄이면 그만큼 여유롭게 앉아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어 좋은 것 같아요.” 이 셰프는 양을 줄이되 술과 어울리는 요리 위주로 내는 진진의 왕육성 셰프가 이러한 흐름이 태동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다면 이 셰프가 운영하는 중식 주점 건일배도 중식의 새로운 장을 여는 데 다릿돌 역할을 했을 터. 이 셰프는 특히 바이주 칵테일의 등장을 반겼다. “홍콩 출장을 갔다가 이과두주에 엘더플라워 리큐어를 첨가한 칵테일을 한번 마셔봤어요. 이과두주는 도수와 향이 강해 넘기기 힘든 술인데 너무 부드럽게 넘어가서 깜짝 놀랐어요. 이 정도면 바이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겠다 싶었죠.”

그가 바이주 칵테일을 반기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저렴한 술이 고급 술을 이기는 진기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이주 가격은 브랜드에 따라 열 배 이상 차이 나요. 하지만 저는 실제로 품질의 차는 크지 않다고 생각해요. 칵테일을 만들 때 어떤 부재료를 넣느냐에 따라 연태고량주가 수정방을 이길지도 모르죠. 무척 흥미로울 거예요.” 이 셰프는 차이니스 바의 지속 가능성에도 희망을 거는 눈치였다. 중식당은 술보다 음식에서 오는 매출이 더 큰 편이다. 그만큼 많은 인력을 요구한다. 만약 음식보다 음료 매출이 높다면 적은 인력으로도 운영이 가능하다. 이 셰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젊은 창업 희망자에게 차이니스 바가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주가 입장에서도 하루의 고단함을 달랠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가 생긴다니 환영이고. 맛깔스러운 중국요리에 바이주 칵테일 한잔,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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