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 잡

국제 신발 박람회 ‘미캄(MICAM)’은 밀라노가 최고의 패션 도시라는 증거다.

이른 아침 호텔 앞에 장벽처럼 키가 큰 버스가 도착했다. 박람회장까지 30분 정도는 가야 한다고 새처럼 가는 목소리가 이탈리아 억양으로 말했다. 버스 안에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홍콩, 프랑스, 독일 등에서 모인 저널리스트들이 빈틈없이 앉았다. 내 옆자리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미국인이 다가오더니 아직 엉덩이가 자리에 채 밀착되기도 전에 자기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라고 속사포로 말했다. 그러곤 바로 함께 셀카를 찍자고 하더니 사진을 자기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되느냐고 물었다. 캘리포니아 출신의 친근함이란. 아까 그 이탈리아인보다 목소리가 세 배는 높은 미스 캘리는 미캄에 몇 번 가봤다고 했다. 그러더니 굽 있는 부츠를 신은 내 발을 스윽 보곤 운동화를 신지 않았다며 오늘 하루 종일 발 아파서 고생하겠다고 걱정 같은 저주를 던졌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업체도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각오해야 한다면서.

미캄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매년 두 번씩 개최되는 국제 신발 박람회다. 지난 9월 17일부터 나흘간 열린 것이 84회째였으니 미캄이 탄생한 지 벌써 40년이 넘었다. 패션 박람회가 아니라 신발 박람회다. 범위를 좁혀 한 가지 품목으로만 구성한 박람회를 40년이 넘도록 운영해오고 있다. 미스 캘리가 경고한 대로 박람회 규모는 정말 어마어마했다. 박람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운동화 생각이 났다. 면적이 무려 6만5000m², 2만 평이다. 이 넓은 공간을 1441개 브랜드가 꽉 채우고 있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면 개미가 된 기분이다. 방이 수백 개 있는 개미집에서 길을 잃은 일개미. 심지어 84회의 방문객은 9만 명이나 됐고 그중 60%는 해외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만으로 이탈리아는 많은 걸 입증한다. 그들이 가죽을 다루는 데 탁월하다는 것, 그들에게 패션은 아주 성공적인 비즈니스라는 것, 대규모 행사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그들의 능력이 훌륭하다는 것.

도착하자마자 참석한 개회 행사에는 이탈리아 총리 파올로 젠틸로니도 참석했다. 로마에서 총리가 직접 찾아올 정도면 이미 국가 모범 사례다. 이번 미캄은 처음으로 밀라노 여성 컬렉션 바로 직전에 열렸다. 분야가 같고 규모가 큰 행사를 연달아 배치하면 더 많은 사람이 모인다. 개회식에서 만난 이탈리아 제화 협회의 비즈니스 서비스 부서장 마테오 스카르파로는 “미캄은 쭉 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한 시기에 국제 신발 박람회와 밀라노 패션 위크를 한데 모으는 일은 기관의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프로젝트였습니다. 밀라노를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상징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죠. 결과는 성공적이고 우리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야심 찬 목소리였다.

행사 일정 내내 매일 열리는 패션쇼를 보러 가기 전, 개회사가 열린 1관 럭셔리 존을 둘러봤다. 미캄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럭셔리 영역의 확장이다. 중소 브랜드로 구성됐던 박람회에 이제는 토즈, 조르지오 아르마니, 에르메네질도 제냐, 구찌, 프라다, 살바토레 페라가모, 돌체&가바나, 펜디 같은 빅 브랜드가 참가한다. 상업적으로 이미 정점을 찍은 럭셔리 브랜드들이 참가하면 주최자가 마케팅을 하기 좋아진다. ‘프라다, 구찌, 제냐도 참가하는 미캄’이라고 홍보 문구를 쓸 수 있다. 럭셔리 존에는 주로 전통적인 슈메이커 브랜드가 입점되어 있었다. 남자들의 신발장을 점령한 슬립온 스니커즈와 캐주얼한 요소를 더한 포멀 구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클래식 가죽 구두를 고집하는 브랜드들. 1관 한편에는 바버숍과 슈샤이닝 공간을 마련해 원하는 누구든 무료로 서비스를 누렸다.

매일 같은 시간, 7관에서 열리는 신발 트렌드 패션쇼에서는 미캄이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능력에 제법 감탄했다. 이 쇼는 유행 경향을 보여주는 건 당연하고 런웨이 형태로 구성해 신발과 어울리는 전체적인 스타일링까지 참고할 수 있다. 모델들이 신는 신발은 매일 바뀌었는데, 쇼가 끝난 뒤 이 신발에 대한 정보도 제공해 관람자가 눈여겨본 신발이 있다면 직접 부스로 찾아가 관계자를 만나는 것도 가능했다. 바로 이런 디테일이 놀라운 거다. 주최자가 흔히 놓치는 부분. 어떻게 해야 참가자가 보다 더 실질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느껴졌다. 패션쇼가 끝나면 신발 트렌드와 관련된 여러 세미나가 열렸다. 참가 업체와 방문객에게 많은 정보와 실질적 도움을 주려는 미캄의 배려다.

미캄은 신진 브랜드 육성에도 힘을 싣는다. 럭셔리 브랜드 존과 나란히 붙은 공간에 신진 디자이너 구역을 배치해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유도했다. 주목할 만한 브랜드로 꼽힌 6개 브랜드 중에는 한국 디자이너 윤대규의 지미벡도 있었다. 지미벡은 2월에 있었던 83회 미캄에서 컨템퍼러리 존에 입점했고 이번에는 미캄의 권유로 신진 디자이너 구역에 입점했다. 이번이 두 번째 참가였던 윤대규 디자이너는 단 두 시즌만으로도 미캄의 성장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파리 트라노이 페어와 뉴욕 화이트 페어에도 참가했는데 신진 브랜드가 그렇듯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긴 어려웠다. 국제적으로는 트라노이 페어와 화이트 페어가 더 유명한 패션 박람회지만, 신발 브랜드로 성과를 내는 데에는 미캄이 가장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 지미벡의 샌들은 첫날 런웨이 쇼에도 소개됐는데, 그날 그 쇼를 보고 방문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얼빠지고 복잡하고 발이 불타는 첫째 날이 지나고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최대한 많은 브랜드를 둘러봤다. 직접 보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규모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이렇게까지 브랜드가 많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분명 많은 거래가 이루어지는 걸 목격했고, 박람회 자체의 실적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통계가 말해주지만, 그건 숫자 이야기다. 숫자를 걷어내고 속을 들여다보니 빈틈이 보였다. 1441개 브랜드 중 절반은 신발을 제대로 만드는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브랜드들이었다.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 구성력에 놀라고, 신발 산업을 육성하려는 노력에 감탄했지만 이건 분명 안타까운 부분이다.

버윅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버윅은 스페인에 본사를 둔 정통 클래식 브랜드다. 특히 로퍼를 잘 만들기로 유명하고, 버윅 코리아는 한국인의 발 모양에 맞게 본사와 따로 협의한 스페셜 디자인을 생산할 만큼 열정적이다. 벌써 다섯 번째 미캄을 방문한 버윅 코리아의 이홍선 과장은 미캄이 규모를 확장할수록 브랜드 리스트업에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버윅을 비롯한 전통적인 슈메이커 브랜드는 모두 4관에 모여 있었습니다. 브랜드와 바이어 모두 편했죠. 그런데 브랜드가 우후죽순 늘어나면서 중구난방이 되었어요. 같은 성격의 브랜드들이 1관, 3관, 4관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습니다. 성격이 같은데 말이에요. 정립이 필요합니다. 규모를 따지면 정말 큰 행사지만, 무작정 브랜드 수를 늘리는 게 과연 협회와 업체 모두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에요. 신발을 제대로 잘 만드는 브랜드를 선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 제화 협회와 이탈리아 패션 협회는 지금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밀라노를 가장 높은 곳에 오르게 할 시스템. 미캄과 밀라노 패션 위크 일정을 맞물리게 배치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탈리아 제화 협회 회장 안나리타 필로티는 미캄이 신발의 범주를 넘어 국제적인 패션 행사로 자리 잡고, 관계자들의 패션 캘린더에 자연스럽게 미캄의 일정이 포함되는 때를 노린다. 단상에 선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었다. “밀라노를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패션 도시로 만들 겁니다. ‘메이드 인 이탈리아’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시스템을 구축하기 전 미캄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퀄리티 컨트롤이다.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인지도도 높은 미캄이 국제적 패션 행사로서 명성을 높이려면 참여 업체를 선별하는 기준을 재정립해야 한다. 규모와 내실이 모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면, 그때 안나리타 필로티의 확신은 현실이 될 것이다.


미캄에 참여하려면, 많고 많은 브랜드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부스 디자인도 제법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6만5000m²를 빼곡히 채운 1441개 브랜드 중 독특한 부스 디자인으로 단박에 호기심을 자극한 몇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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