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건너 바젤 구경

올해 바젤월드는 진짜 좀 달랐다.

“3월 21일 히드로-바젤 항공편 BA756이 결항된다는 점을 알리게 되어 매우 유감입니다.” 출장 가는 날 새벽 2시 45분에 문자가 왔다. 놀라지 않았다. 바젤도 스위스도 항공의 불운도 익숙했다. 인천-베이징-빈-바젤 경로 티켓 중 베이징-빈 항공편이 결항되어 인천-베이징-스톡홀름-뮌헨-바젤 루트로 간 적도 있다. 바젤로 못 간다면 취리히로 입국해 육로로 가면 된다. 차가 막혀도 한 시간 반이면 간다. 일찍 공항에 도착해 담당 직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취리히행 티켓으로 바꿨다. 취리히에서 기차를 타고 바젤 역에 도착하자 밤 11시였다. 여섯 번째 바젤이었다.

바젤은 라인강 가에 위치한 스위스의 주요 도시다. 라인강 남단에는 구시가지가, 북단에는 공항과 가까운 신시가지가 있다. 주산업은 제약과 예술. 테라플루를 만드는 노바티스 본사가 여기에 있다. 지금쯤 열리는 아트바젤도 바젤을 대표하는 행사다. 하나 더, 라인강 북쪽의 박람회장에서 세계 최고의 시계 박람회인 바젤월드가 열린다. 1917년 처음 시작했으니 올해 101년이 됐다. 처음에는 스위스 무역박람회였던지라 보험 회사와 치즈도 나왔다고 한다. 지금은 세계 유수의 시계 브랜드만 나온다.

<에스콰이어> 독자라면 몇 달 전의 ‘SIHH 토크’를 읽은 적이 있을 거다. SIHH와 바젤월드의 가장 큰 차이는 규모다. SIHH는 리치몬트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고가 브랜드가 모이는 비공개 박람회다. 바젤월드에는 스와치그룹과 롤렉스, 파텍필립, 쇼파드, 브라이틀링 등 업계의 거인이 다 모인다. 거기 더해 카시오 등의 일본 브랜드나 온갖 패션 브랜드의 시계 부문, 직원이 5명도 안 될 것 같은 독립 브랜드 등 온갖 시계 브랜드가 참여한다. 시계 공구 브랜드와 시계 제작 전용 책상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시계를 만들고 파는 것에 관련된 모든 브랜드가 1년에 한 번 바젤에 모였었다. 올해는 싹 빠졌다. “바젤월드 측에서 임대료를 너무 비싸게 받는대요. 새로 지은 바젤월드 박람회장 건물이 유명 건축가가 지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서 참가비를 엄청나게 올렸대요. 그래서 공구나 관련 기계 브랜드가 모두 불참한 거고요.” 한국에서 바젤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는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소문이 돌았다. 솔깃했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바젤월드 없어진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비슷한 이야기를 자꾸 듣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시계업계가 불황이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점점 임대료를 올려요. 에르메스랑 율리스 나르당도 제네바 SIHH로 갔잖아요. 괜히 부스 만들 필요도 없는 무브먼트 브랜드나 박람회장에 들어오고. 그래서 내후년쯤 바젤 말고 딴 데서 할 수도 있다던데.” 시계업계 경력 수십 년째인 모 회사 임원의 말이었다. 다 눈에 보이는 사실이었다. 에르메스는 없다. 대신 본 적도 없는 스와치그룹의 무브먼트 제작 자회사 ETA가 1관 2층에 부스를 차렸다. 참석 브랜드 수 자체도 줄었다. 전에는 1관 3층까지 브랜드가 꽉 차 있었다. 올해는 2층까지만 브랜드관이 있었다. 3층은 열지도 않았다.

박람회장이 시계업계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스위스 시계업계를 비롯한 모든 서유럽의 사치품업계는 중국의 자본화에 너무 의지했다. 중국 본토 사람(시계업계는 중국 시장과 홍콩 시장을 명확히 구분한다)이 사치품에 눈을 뜬 건 스위스에는 금맥이 터진 것과 다름없었다. 온갖 고가 시계 브랜드에서 중국 한정판을 냈다. 2010년 초의 이야기다. 그러다 중국에서 고가 선물 금지 조항을 만들자 모든 게 허물어졌다. 나도 느꼈다. 중국인이 많이 오다가 지금은 별로 오지 않으니까.

스위스의 시계 산업 잡지 <유로파 스타>는 칼럼에서 이 상황을 강하게 비판했다. 제목부터 ‘바젤 때리기’였다. 기사 이미지로는 2페이지 스프레드로 1404년 작 회화 ‘바젤에서의 죽음의 춤’을 실었다. 칼럼 내용은 더했다. 임대료가 비싸고 주최 측이 보수적이며 오만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긴 박람회장을 둘러싼 물가는 늘 엄청나게 비쌌다. 500ml 콜라가 1만원이 넘었다.

“한번 보자. 건물에서는 크랙이 보인다.” 백인들이 화나면 가차 없었다. “폭발적인 가격의 택시는 이제 우버와 경쟁한다. 터무니없는 가격의 호텔? 에어비앤비가 있다. 보통보다 세 배 비싼 밥이 가치가 없다면? 트립어드바이저를 쓰면 된다. 비싸고 관습적인 부스? 바깥의 콘셉트 스토어가 낫겠다. (중략) 바젤월드는 끝났다고 한다. 명백한 멸종 위기, 완전히 구식이다.” 이 칼럼을 쓴 세르지 밀라르는 뜨내기가 아니다. <유로파 스타>는 1930년부터 바젤월드에 부스를 차렸는데 세르지가 <유로파 스타>의 4대손이다. 이 정도 되는 사람이 이렇게 화를 낸다면 박람회장 주최 측과 참가 브랜드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시계는 어땠느냐고? 사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바젤월드의 모든 시계는 박람회 기간 내내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알려졌다. 나도 매일 <에스콰이어> 인스타그램 계정에 그날 본 시계 브랜드의 가장 인상적인 시계를 포스팅했다.

하지만 여러 브랜드를 모아서 봤을 때의 경향성은 말하고 넘어가도 될 것 같다. 시계업계는 불황을 맞았지만 덕분에 시계의 상품성이 올라가고 다양성이 넓어졌다. 거의 모든 브랜드가 가격을 그대로 두면서 무브먼트 부품을 고급화했다. 요 몇 년간의 경향인 큰 시계와 달리 작은 남자 시계처럼 매니악한 시계도 많이 나왔다. 작은 레트로 분위기 시계를 찾아서 오래된 시계만 보던 애호가들의 마음을 읽었는지(나도 그중 하나였다) 복각판 시계도 다양한 브랜드에서 선보였다. 시계 시장은 별로라지만 역설적으로 시계를 사려면 지금 사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다. 쓸모없는 복잡한 시계 기능은 빠지고 다이얼 색 등 진짜 소비자에게 필요한 선택권이 늘었으니까.

바젤월드 박람회장 1층에는 서유럽에서 가장 맛없는 일본 라면 식당이 있다. 다른 곳을 모르니까 사람들은 거기서 인스턴트 국물로 만든 4만원짜리 일본 라면을 먹는다. 나도 갈 때마다 먹었다. 다른 곳을 모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올해는 그 식당에 가지 않았다. 5분만 걸어 나가면 괜찮은 식당이 있다는 걸 검색해서 알게 되었다. 정보 기술과 스마트폰은 모든 업계를 예전과 다른 곳으로 만들어놓았고, 그건 아주 보수적인 고가 시계를 보여주는 아주 보수적인 박람회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내년 바젤월드쯤 되면 <유로파 스타> 편집진의 화가 좀 풀리려나. 그때 가봐야 알 것 같다.

  • Kakao Talk
  • Kakao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