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 가는 이엘

속내를 드러낼수록 더 매력 있는 이엘.

티셔츠, 핑크 양말, 모자 모두 에디터 소장품. 쇼츠 자라.

첫 컷 시작할 때 갑자기 흥겹게 춤추는 모습을 보고 역시 흥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모든 촬영의 첫 컷은 미칠 듯이 어색한데, 때마침 감사하게도 좋은 음악이 흘러나와서 저 나름대로 긴장을 푸는 방법이었어요.(웃음)

긴장은 전혀 느껴지지 않고 촬영에 쑥 몰입하는 걸로 보였는데.(웃음)

만약 클로즈업부터 시작했다면 얼굴과 상반신만 신경 쓰면 되는데, 첫 컷이 전신 촬영이라고 해서 더 긴장했어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숨길 곳이 없이 집중해야 하니까요.

화면 속 이엘은 감성이 풍부하고 다정한데 감정의 기복은 크지 않아 보였어요.

자존심이 세서 창피한 게 싫으니까 겉으로 티를 못 내는 거예요. 나이를 먹을수록 더 창피하잖아요. 10년 넘게 곁에서 본 친구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징징거리는 제 모습을 알죠. 그리고 제가 얼마나 긍정적인 사람인지도.

아이보리 코듀로이 셔츠 브룩스 브라더스. 목걸이, 귀걸이 모두 베르사체.

이름을 알릴수록 좋은 일만 따라오는 건 아닐 텐데요.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타고난 호기심과 애정은 여전한가요?

네. 항상 밖에서 동경하면서 지켜보기만 하던 분들 곁에 앉아서 함께 맥주 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상대방에게 내가 누구인지 계속 알려야 하는 게 아니라 제 작품을 잘 봤다고 먼저 말씀해주시는 분들도 생겼어요. 다양한 사람들과 새로운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 거라서 불안함도 줄었어요. 흥미로운 때가 찾아온 것 같아요.

해가 바뀌고 한 살 늘어난 나이는 어때요?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보통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그 나이에 맞는 옷차림과 행동 같은 것에 스스로 가두게 될까 봐 되도록 신경 쓰지 않으려고요. 며칠 전에도 한참 어린 친구들처럼 옷을 입은 것 같아 창피해서 집에 후딱 들어와버린 적이 있거든요.(웃음) 늘 가던 동네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대본을 읽었는데 너무 민망했어요. 집에 와서는 ‘날씨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뿐이지, 나이는 상관없어. 난 추워서 들어온 거야’라고 혼자 생각했죠.

이해해요. 본인이 뭘 입든 누군가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이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란 어렵죠.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우면 더 좋은 일이잖아요. 특히 우리나라는 여자들의 나이를 조금 더 까다로운 잣대로 판단하니까 스스로 정신적으로 강해질 필요가 있어요. SNS에서 명절에 나이, 결혼 언급하면 어떻게 대응하라는 유머가 유행하는 것처럼 ‘어쩌라고’ 마인드를 가져야죠.

‘벌써 OO살이 되었는데 앞으로 어쩌나’라고 미리 제약을 걸지도 말고요.

맞아요. 그 시기에 혼자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있고,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요. 모두가 성공을 향해서 경주마처럼 달려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각자의 삶의 방식이 다르고, 자기 자리에서 즐겁고 행복한 방법을 찾는 거죠. 당장 월세 내고 공과금 낼 것 내고 그러면서 가끔 먹고 싶은 것 먹고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고,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타인이 이룬 성공, 화려한 삶이 너무 쉽게 눈에 들어오니까요.

네. 솔직히 쉽지 않아요. SNS부터 끊어야 되는데. 다들 100% 현실이 아닌 걸 알아요. 저만 해도 고양이 망고, 탱고 사진 한 장 찍으려면 집 안이 어질러져 있어도 앵글에 들어오는 부분만 깨끗하게 치우거든요. 스케줄이 이어져서 한동안 여행도 못 가는데 SNS 위치 태그만 봐도 누가 어디에 갔는지 알게 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우울해지는 어리석은 짓을 아직도 해요. 일부일 뿐인 현실을 전부라고 믿어버리는 저를 보는 게 무척 싫죠.

그렇다면 SNS만으로 알 수 없는, 요즘 이엘의 머릿속은 무슨 생각으로 차 있나요?

채식요. 제가 동물 복지, 동물권 생각을 많이 하는 것에 비해 활동을 열심히 하진 못했어요. 새해 들어서 앞으로는 필요한 곳에 조금 더 제 목소리를 내볼까 생각했어요. 마음이 이러한데 육식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싶었죠. 지금은 해산물과 유제품까지는 먹지만 달걀을 먹지 않는 정도예요. 회식, 뒤풀이처럼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너무 유난스럽게 굴면 오히려 채식주의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길까 봐 일단 지금은 최대한 탄력적으로 실천하는 중이에요.

로브 이미스.

아이보리 코듀로이 셔츠 브룩스 브라더스. 데님 바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신발 유니페어. 벨트 푸시버튼. 목걸이, 귀걸이 모두 베르사체.

가장 최근작인 <최고의 이혼>의 ‘유영’은 이엘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일상 속으로 들어온, 주위에 있을 법한 친구 같은 캐릭터였어요.

유영을 생각하면 굉장히 극단적으로 마음이 양분되는데요, 스스로 몰랐던 제 모습을 찾은 것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원래 그대로의 나인 것 같기도 하고, 쭉 그런 기분이 들어요. 지금도 가끔 드라마를 다시 보면 어떤 장면이 연기였는지 혹은 아니었는지 제 눈에는 다 파악이 되거든요. 요새는 찬찬히 혼자 복기해보고 있어요.

오답 노트 만들 듯 복습을 하는 거네요.

정말 끝까지 잘 마무리해서 보내준 느낌 반, 저 장면에서 감정을 잘 살렸더라면 더 큰 응원을 받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 반이죠. 하지만 참 좋은 캐릭터를 만났던 것만은 사실이에요. 쓴소리 많이 듣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제일 커요. ‘이엘, 너 참 잘했다’며 혼자 만족하는 성격은 아니라서요.(웃음)

마키 요코가 연기한 일본 원작 속 역할보다 조금 더 정감 가는 여자였어요. 그녀가 선택한 결말에 찬성할 수 있어요?

주인공 네 명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행복을 찾은 사람들이잖아요. 저는 그냥 각자 행복한 사람을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차태현 선배님이 연기한 석무도 사실 잔소리하면서 챙겨야 할 대상이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죠. 휘루는 볼로냐로 떠나고, 정현은 다른 여자 만나서 행복해지고, 유영이도 싱글맘이 되어도 씩씩하게 잘 살아가는 상상은 해봤어요.

신뢰 회복을 위해 시시콜콜 보고하는 장현에게 “그렇게 다 보고하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때, 그 어떤 기대도 감정도 없는 공허한 ‘무’의 얼굴이었죠.

감독님과 작가님께서 마음 상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후반으로 갈수록 저는 유영이에게 조금 화가 나 있는 상태였어요. 현실의 나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컸던 거예요. 장현이 정말 싫고, 병원에 달려와서 흙 묻은 손으로 반지를 내밀 때도 “나 당신 사랑 안 해”라는 대사를 하면서 아무 감정 없는 표정으로 눈물이 뚝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건 제 머릿속 계산으로 하는 연기고, 감정이 전혀 없으니까 눈물도 나지 않고 어렵게 그 컷을 마쳤어요. 그의 대사가 너무 이기적으로 들렸거든요.

유영을 연기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얻고 싶은 반응은 무엇이었나요?

초반에는 ‘어쩜 저렇게 답답할 정도로 참고 사나’라는 반응을 얻으려 했어요. 냉랭하고 담담해 보이면서 동시에 복잡하게 오가는 감정의 기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오히려 마키 요코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보여준 강단 있는 모습이 더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녀가 부잣집 부부인 오노 마치코 커플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똑 부러지게 질책하는 모습, 그 느낌을 저도 연기하고 싶었어요.

극 중에서 유영의 마음이 변화를 맞이한 결정적 이유는 결국 엄마와 화해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이를 먹어갈수록 여자들한테 엄마라는 존재가 뭔지, 대체 왜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눈물이 나는지.(웃음) 현실에서 다정한 모녀 사이도 있겠지만 보통 바쁘게 자기 삶을 살다 보면 소홀해지기 쉽죠. 네 남녀의 관계를 그려나가는 드라마에서 엄마와의 화해도 잘 얘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톱 데이즈 데이즈. 바지 바네사브루노 아떼.

“걸려면 니한테 걸어야 하는 기다”라는 극 중 엄마의 대사를 빌려온다면, 앞으로 이엘은 스스로에게 무엇을 걸 수 있을까요?
‘네가 한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네가 지는 것이다. 남 탓하지 말고 네가 한 선택은 모두 너의 것이다’라는 뜻으로 저는 받아들였어요. 타인에게 기대지 말고 네 힘으로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너한테 걸라는 거죠.

그런 의미로 본다면 걱정 없이 자신한테 잘 걸 수 있을 사람으로 보여요.

그렇지 않아요.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반려동물이든 가족, 친구, 주변 지인이든 누구를 돕고 마음을 쓰려면 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어야 하겠죠. 제가 먼저 단단해져야 해요.

지금의 이엘은 스스로 보기에 괜찮은 사람일까요?

아니요. 2018년의 이엘은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제가 보낸 37년의 인생 중 가장 감정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해 베스트 3 안에 들거든요. 2019년은 다시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한번 살아보려고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봤으니 다시 돌아와야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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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패션 에디터백 진희
어시스턴트신 민지
사진곽 기곤
헤어박 의환 by foret
메이크업안 미나 by foret
스타일링현 효진
출처
43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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