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러쉬의 음악은 현실이 된다

크러쉬는 덕후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재킷 꼼데가르송. 셔츠, 바지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촬영을 진행한 권지원 패션 에디터가 크러쉬는 선인장 같은 사람인 것 같다고 했어요.
서… 선인장요? 날카롭다? 왜요?

차분한 기운을 가진 사람 같아서라고 했나?
되게 좋은 비유네요. 저는 스투키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물을 주면서 관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살아가잖아요. 자생 능력이 좋고, 공기 정화도 하고.

편한 음악을 하고 싶다는 크러쉬의 음악처럼 편안한 식물이죠.
음악을 할 때 마냥 편하고 싶진 않아요. 음악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에 맞게 아예 랩만 하는 힙합이 될 수도 있어요. 음악은 당연히 실험적으로 계속해야 해요. 실험 정신이 있어야 작가 정신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고, 그래야 더 재미있죠.
(주섬주섬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크러쉬)

뭐 하시는 거예요?
적으려고요. 선인장이 어떻다고요?

차분한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요. 오늘 촬영을 하는데 이런저런 변수들이 있었잖아요. 크러쉬 입장에서는 귀찮고 짜증날 법한데 온화하고 흔들림이 없었다고. 선인장도 주변 환경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외부 요소에 흔들림이 없잖아요. 스트레스받을지언정 선인장처럼 올곧게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태도. 듬직하다는 거겠죠?
선인장을 보고 있으면 듬직해요? 저 되게 부산스러운데… 신기하다.

2018년은 어땠어요?
되게 행복했어요. 항상 결과론적인 세계관을 갖고 살다가 여러 일로 인해 내면의 행복에 대해서 많이 발견한 시기여서. 음악을 떠나 인생 전반에서, 앞으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깨달았거든요.

지난 12월이 데뷔 6주년이었고 이와 맞물려 기념할 일도 여럿 있잖아요. 2년 전 올림픽홀에서 단독 콘서트를 하고 싶다던 꿈을 이뤘고, 심지어 콘서트 티켓은 1분 만에 매진. 12월에는 첫 미주 투어도 해냈고요.
바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투어하면서 느낀 게 많아요. 미주 7개 도시를 2주 동안 하루 이틀 간격으로 움직였어요. 댈러스였나 시애틀에서 마지막 곡으로 ‘잊어버리지 마’를 부르는데 맨 앞에 있던 외국팬이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막 우시는 거예요. 어, 되게 감사하고 신기했어요.

음악을 하면서 또 신기했던 경험이 있어요?
항상 신기하죠. 원래는 작곡가가 꿈이었어요. ‘작곡을 잘해서 멋있는 프로듀서가 되어야지’가 시작이었고. 동경하는 프로듀서들, 백스트리트 보이스의 프로듀서 맥스 마틴이나, 흑인음악 쪽으로 오면 퀸시 존스는 기본적으로 어떻게 프로듀싱을 해야 잘하는지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을 보고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뮤지션에게 잘 맞는 옷을 입혀주는 것이 좋은 프로듀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제 옷을 만들지는 몰랐죠.

최근에야 프로듀서가 주목받았지, 크러쉬가 학생일 때는 프로듀서의 존재도 모를 때 아니었어요? 장래 희망으로 프로듀서보다 작곡가, 작곡가보다 가수가 인기였을 텐데.
제가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곡을 만들면 가사를 쓰고 멜로디를 짠 다음에 가이드를 해야 하거든요. 그나마 음정에 맞게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가이드 녹음을 하다 보니까 노래를 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만든 옷을 친구들에게 줬더니 잘 맞지 않고, 제 옷을 제일 잘 만들고요.

자신에게 어떤 옷을 입히고 싶어요?
편한 옷을 좋아해요. 지금도 추리닝을 입고 있고요. 음악도 마찬가지로 편한 음악을 만들려 해요. 내가 들었을 때 편하면 남들이 들었을 때도 편하다고 생각해서. 요즘 자극적인 노래가 많은데 그런 노래에 제가 좀 지쳤어요. 언제부턴가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2017년도 겨울 즈음이었나?

‘내 편이 돼줘’부터요?
네. 그 노래를 기점으로 친구에게 ‘이제는 나도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왜요?
나도 위로받고 싶어서.

블루종 크리스티안 다다. 밸러클라버 톱 나이키 MMW 컬렉션.

요즘 크러쉬를 위로하는 건 뭐예요?
강아지 두유요. 두유랑 산책을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 위로를 많이 받아요. 그 친구도 저랑 있을 때 제일 편해하는 것 같고, 저도 그 친구랑 있을 때 편해요. 얘는 말을 못하고, 거짓말도 안 하거든요, 절대. 소심하고 예민한데, 저랑 되게 비슷해요.

두유는 처음부터 예민했어요?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어요. 제가 이 친구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데려왔어요. 내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시기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혼자 사는데 마냥 외로워서. 그러다 내가 이 친구까지 돌보는 게 감당이 안 돼서 훈련소에 오랜 시간 맡겨두었는데 그때 성격이 많이 예민해지고 더 소심해졌어요. 지금도 마음이 불편한 게 빨리 가서 산책해야 하거든요. 혼자 너무 오래 있어서.

뮤즈를 찾아 떠난 프로그램에서는 촬영 내내 쳇 베이커의 전기를 읽더라고요.
음악, 예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가 바로 나오는 게 아니라 분명 그들만의 라이프스타일이 있고, 추구하는 방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것도 재미있고.

그래서 위인전 읽듯 뮤지션들을 공부하는 거예요? 언제부터요?
중학생,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요. 공부보다 궁금해서 하는 일이에요. 호기심이 많아서.

최근 ‘Lay Your Head On Me’를 작업한 프로듀서 페르난도 가리베이가 크러쉬는 미국 R&B에 대한 지식이 많은 뮤지션이라고, 백과사전 같다고 했어요. 레이디 가가, 휘트니 휴스턴, 브리트니 스피어스 프로듀싱을 했다는 그분이오.
아유, 과찬이에요. 너무 많은 뮤지션들이 있기 때문에 한참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우울한 음악을 들어도 중심을 잡게 됐다는 크러쉬의 말이, 지금은 단단해서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단단해지니 자신의 음악에 대한 만족감도 높아졌나요?
음악을 하면서 만족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점점 후회와 아쉬움을 떨쳐내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아요. 내 음악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는 지금도 궁금해요.

음악을 계속 만들고 있는데도 궁금해요?
이 정도면 히트 치겠지, 이런 예상을 하고 음악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이 제 음악을 들었을 때 제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다, 이런 것을 알아주는 데서 더 희열을 느껴요.

가죽 재킷 꼼데가르송. 셔츠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2014년에 발매한 첫 정규 앨범 <Crush On You>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상을 수상했어요. 수록곡 10곡을 모두 작사, 작곡했고 그중에 5곡은 편곡까지. 크러쉬 천재설이 돌았죠.
그때는 감흥이 별로 없었어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도 몰랐고, 열정이 너무 앞서갔던 시기라 더 잘하라는 뜻이구나 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큰 상을 받아서 음악 활동 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싶었어요.
음악가로서 부담은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을 혼자만 할 게 아니기 때문에 부담감과 긴장감은 항상 갖고 있어야죠.

음악을 시작할 때와 지금, 그 부담감을 채우는 것들이 다르겠고요.
예전에는 음반을 내면 항상 상위권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과 부담감이 있었어요. 언론이나 주변 사람들의 기대치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에서 좀 벗어났어요. 지금의 부담감은 내가 얼마만큼 오랜 시간 건강하게 음악을 할 수 있는가예요.

건강하게 음악을 한다는 건 어떤 거예요?
정말 건강요. 신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몸이 아프면 하고 싶어도 못 할 테니까.

간간이 SNS에서 보니 집에 악기가 꽤 많더라고요. 눈에 띄는 건 건반 악기 옆에 따로 세워둔 목이 긴 조명.
무드를 위해서요. 분위기.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감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감성이 없으면 영혼 없이 음악을 만드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어떤 형태의 음악을 만들려면 그 세계에 빠져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원두와 커피포트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왜 이 커피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서부터 먼저 생각을 하는 거죠.

음악에 대한 욕심이 엄청나구나.
그것도 음악하는 사람들에게는 숙명 같아요. 사랑을 하는 거와 비슷해서 어떨 때는 권태기가 올 때도 있고요. 그런데 욕심이라는 건 결국 자신을 깎아먹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서, 그걸 욕심이라고 생각 안 하고 애정, 사랑이라고 해요.

그 표현 좋네요. 욕심 대신 애정이라는 말.
욕심이 많으면 결과적으로 실망을 하게 되더라고요. 욕심을 내려놓는 방법이 제일 어렵고, 그래서 항상 잘하고 싶은 마음과 내려놔야 하는 마음 사이에서 저울질해요.

2018년은 저울질이 잘된 해고요?
네. 앞으로도 계속 잘될 거고요.

점퍼 스톤 아일랜드.

크러쉬에겐 1등 연주자들만 모아뒀다고 자부하는 크러쉬의 밴드 원더러스트가 있죠. 자신만의 밴드가 있어서 든든할 것 같아요.
실제로 1등만 모였어요. 제가 모은 게 아니고, 하고 싶은 음악을 하자고 자연스럽게 모인 거예요. 2년 전에 처음 만들고 밴드 브랜딩을 제가 했죠. 작은 목표는 밴드 라이브 음원을 LP로 제작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과거를 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과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 인터뷰를 봤어요.
이런 방식과 접근을 우리나라에서도 누군가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선배들한테 좋은 후배가 될 수 있고, 후배들한테도 좋은 귀감이 될 수 있으니까. 소울 스케이프라는 형과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잘하는 애들은 많은데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을 건강하게 보여줄 수 있도록 우리가 노력하자.’

크러쉬는 그걸 실천하는 중이고요.
실천해야죠, 이제.

음악을 만드는 일이 즐거워요?
음악을 하면서 즐겁다고 하는 사람은 다 거짓말이에요. 절대 즐겁지 않고, 음악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음악을 어떻게 즐겁게 해요? 수천 번, 수만 번 듣고 살을 깎는 기분으로 만든 노래가 도마 위에 올랐을 때 기분이 어떻겠어요. 요즘 많은 분들이 앨범의 타이틀곡만 듣는 것도 되게 안타까운데… 음악을 하는데 ‘행복하고 즐겁습니다’는 모순적인 이야기 같아요.

그런데 음악을 계속하는 건….
자기만족 아닐까요? 제가 왜 피아노 위에 조명을 설치해놨겠어요. 깜깜한 데서, 쨍한 불빛 아래서 보다, 그런 분위기에서 치는 게 좋잖아요. 그런 게 다 음악을 하게 하는 원동력이죠. 그리고 내 음악과 나를 응원해주는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크러쉬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많은 생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어요.

집업 스웨터 헬무트 랭. 오버올 엔지니어드 가먼츠.

어느 음악가는 판사, 변호사, 검사… ‘사’ 자가 들어가는 직업 중에 제일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리는 악사가 제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이건 꼭 적어주세요. 제 침대 머리맡에 체코의 존 레넌 벽화 사진이 있어요. 존 레넌의 ‘이매진’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되찾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잖아요. 그때 체코가 공산주의였는데,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벽에 존 레넌의 가사를 적고 그림을 그리면서 평화 시위를 했대요. 존 레넌이 타살된 후에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서 완성된 걸로 알고 있어요. 그게 저한테 되게 인상적이었어요. 어렸을 때는 엄청 멋진 음악가가 됐으면 좋겠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잘나가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직접 풍파를 맞고 여러 일들로 아파보기도 하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제일 무섭고 큰 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취미가 LP 듣기와 수집이라고 해서 영상 촬영을 위해 몇 가지 음반을 준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신경 써서 준비해 올 줄은 몰랐어요. 크러쉬의 지인들은 음악을 대하는 크러쉬의 태도가 진지해서 멋있는 친구라고 하던데, 어떤 의미인지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LP의 매력이 뭐예요?
소장 가치죠. LP는 절대 거짓말을 안 해요. 빌 에반스의 <Walts for Debby> 바이닐 초판을 340만원 주고 구입했어요. 1961년 6월 25일에 스튜디오가 아니라 뉴욕의 재즈 바 ‘빌리지 뱅가드’에서 녹음한 거예요. LP음반 뒷면에는 이렇게 앨범에 참여한 연주자, 스튜디오 이름, 앨범이 만들어진 연도가 다 적혀 있어요. 그 정성 덕분에 음악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죠. 아무리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다 해도 타임머신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발전하고 새로운 걸 만들기 위해 음악 덕질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 적 있어요. ‘음악 덕후’ 크러쉬는 여전히 덕후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네. 음악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요. 편식은 안 하려 하는데, 아직까지도 데스 메탈은 좀 힘들어요. 헤비메탈, ‘악’ 하는 거.

집에 가는 길에는 어떤 노래를 들을 거예요?
안 들을 거예요. 어떤 때는 도시와 자연의 ASMR이 더 좋아요. 더 음악 같아서.

이어폰 꽂고 음식 먹은 적 있어요?
옛날에 ‘자뻑’ 심할 때요.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노래도 안 나오는데 일부러. 그런데 이어폰 꽂고 먹으면 체해요. 밥 먹을 때는 <스카이 캐슬> 보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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