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시간들’을 기록한 라야, 이인규

'집의 시간들'은 아파트에서 살아온 도시인의 향수를 품은 다큐멘터리다.

<집의 시간들>은 재건축을 앞둔 둔촌주공아파트에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 구석구석을 보여주죠.

라야(이하 라) 저의 시작은 사진작가 김보리와 따로 또 같이 진행한 <가정방문> 프로젝트였습니다. 의뢰인의 집을 찾아가 인물 사진, 집 내부와 외관, 동네의 모습을 촬영했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한 지역을 꾸준히 기록하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를 만든 인규 씨가 떠올랐고 재건축으로 동네 분위기가 변하기 전 일상의 모습을 담고 싶다는 데 서로 뜻이 맞아서 <집의 시간들>까지 함께 제작하게 됐어요.

이인규(이하 이)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는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에 자리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사라지는 것에 앞서 이를 기록하고 기리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고, 지난 40년간 저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수만 명이 살았던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건축사, 주거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둔촌주공아파트가 다른 재개발 아파트와 차별되는 지점은 무엇일까요?

1990년대 이전에 지은 아파트는 그나마 녹지 비율이 높고, 아파트와 주차장 사이에 띠 형태로 겨우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면으로 넓게 펼쳐진 곳이 많았어요. 그중에서도 둔촌주공아파트는 규모 면으로나 녹지 비율로 보나 최고였고요. 원래 작은 동산 2개가 있는 부지에, 단지 뒤편으로는 생태 보전 지구까지 있어서 사방이 녹지였어요.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경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아파트 단지였고, 주민들도 그 매력 때문에 오래오래 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 가정방문> 책이 개인의 기억이라면 다큐멘터리는 공동의 기억으로 확장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흔히 집이라고 생각하는 실내 공간의 전용 면적 외에 바깥 공간의 풍요로움도 정말 중요해요. 둔촌주공아파트는 작게는 창문과 현관문을 열거나, 크게는 온 동네를 산책하는 방법으로 외부와 자유롭게 접속하며 살 수 있는 곳이었어요. 2016년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결국 사라지게 될 공간이지만 사라짐의 쓸쓸함보다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기를 담고 싶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가정방문’의 라야, ‘안녕, 둔촌주공아파트’의 이인규 씨가 함께 만든 다큐멘터리 ‘집의 시간들’. 10월 25일 개봉 예정이다.

둔촌주공아파트에 대한 소회를 털어놓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처럼 차례로 흐르는데요,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정확히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상의 주인공을 사람이 아닌 공간으로 설정해 그들의 목소리가 마치 공간의 목소리처럼 들리길 바랐어요. 엘리베이터 내 게시판 같은 곳에 “당신의 집을 기록합니다”라는 전단을 붙여서 인터뷰이를 모집했는데 신기하게도 오래 사셨던 분, 타지에서 이사 온 분, 비교적 짧은 기간 살았던 분 등 다양한 인물이 모였어요.

처음에는 둔촌주공아파트의 매력을 주로 들려주다 점점 낙후된 시설, 오랜 주민과의 유대감이 떨어지는 분위기 등 따뜻한 추억만 등장하지 않는 점이 신선했어요.

 ‘이곳이 없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마음은 비슷해도 그 배경은 조금씩 다를 것이라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집에 대한 애정과 재건축 문제는 대립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빨리 재건축됐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동시에 아쉬운 마음이 공존하지요. 집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그 사람의 삶과 이어지고 각자 삶의 태도도 엿볼 수 있어요.

처음으로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현재까지, 아파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지 궁금해요.

둔촌주공아파트에서 정말 좋은 환경을 누리고 살았기에 그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파트도 고향일 수 있다’고 말했지만, 우리나라의 모든 아파트가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느끼거든요. 단순히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이 지향하는 커뮤니티에 동화되어 살지 못한다면 결국 겉도는 느낌이 들고,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스스로 어떤 삶을 살길 원하는지 생각하는 것이 우선되어야겠죠. ‘어디에 살고 싶은지’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와 깊이 연관 지어 생각해야 하는 질문인 것 같아요.

점점 비어가는 아파트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합니다. 오래 마음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복도식 아파트에 살아본 경험이 없는데, 처음 촬영한 인규 씨 집은 복도식 아파트에서도 가장 끝 집이었어요. 외부와 집 사이에 복도라는 중간 공간이 있다는 점이 참 좋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집의 시간들> 상영회 겸 송별회를 그 집에서 열었는데, 가구도 다 옮겨졌고, 동네에 불 켜진 집도 적어서 정말 조용했어요. 처음 찾아왔을 때와 달랐죠. 기분이 정말 묘하면서도 슬프고, 이 공간과 제대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2016년 당시에는 주민들이 모두 살고 있었어요. 비어간다는 느낌보다 재건축을 앞두고 다들 뒤숭숭할 때였죠. 그보다 앞선 2015년 가을에 둔촌주공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동네인 고덕주공아파트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거기는 이미 주민 이주가 다 끝나가는 상황이어서 텅 비어버린 아파트를 거기서 먼저 봤어요.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동네에 불이 켜지지 않고 자동차가 돌아오지 않는 적막함을 보고 좀 충격을 받았어요. 그날 둔촌주공아파트에 돌아왔을 때 동네 안에 빼곡하게 들어찬 자동차, 밤 산책을 하던 사람들, 단지 가득 켜져 있던 색색의 불빛 등 모든 것이 감동적이었어요.

<집의 시간들>을 통해 관객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앞으로 또 새로운 고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저도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다큐멘터리를 편집하는 동안 저도 가족과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녔거든요. 좋아하는 집을 떠났거나, 떠날 예정이거나, 혹은 아직 못 만난 사람들 모두가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나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건물이 노후해서 재건축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재건축이 진행되는 진짜 이유는 돈의 논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사라져야만 한다는 것이 끝까지 참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재건축으로 사람들이 얻게 되는 금전적 이득도 물론 크겠지만, 잃어버리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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