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정재영은 앞만 보고 왔다. 할 수 있다면 끝까지 갈 생각이다.

드레스 셔츠 김서룡. 와이드 팬츠 문선. 안경 까르페디엠.

<검법남녀 시즌 2>가 오는 6월 3일 첫 방영될 예정이다. 첫 시즌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셈인데, 드라마는 시청자 피드백이 바로 오니까 재미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부담스럽기도 하다.(웃음) 간혹 재미없다는 평을 듣게 되는 상황에서도 계속 찍어야 되니까.

어쨌든 시즌 2로 이어진다는 건 그만큼 시즌 1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는 거니까 주연배우 입장에서는 기분 좋은 일 아닌가?

그런데 대박까진 아니었으니까.(웃음) 어쨌든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고, 반응이 아무리 좋아도 시즌제로 가기 어려운 작품이 있는데 감독님이 처음부터 반응에 따라 시즌제를 염두에 두고 기획한 작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 같다. 게다가 한국판 <CSI>라고 불릴 정도로 에피소드마다 사건을 풀어가는 완결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본 것 같기도 하고. 다 떠나서 반응이 안 좋았다면 꿈도 못 꿨겠지.(웃음)

<검법남녀> 팬들의 리뷰를 보니 ‘정재영 때문에 본다’는 말이 많더라.

아이고, 그냥 해주는 말이겠지.(웃음) 사실 <검법남녀>는 매회마다 주인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피해자나 피의자로 등장하는 분들? 어쩌면 그분들이 주연배우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 같다. <CSI>도 주인공들은 그냥 작품에 출근하는 직장인 같지 않나. 그러니까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이 신선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사건이 중요하다. 거기서 발생하는 리얼리티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는 사람이 지칠 수 있으니까.

시즌 1이 열린 결말로 끝났기 때문에 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끝난다는 아쉬움도 있었을 거 같고, 그만큼 시즌 2가 반가웠을 거 같은데.

사실 시즌 1을 진행하면서 시즌 2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캐릭터도 캐릭터지만 작품이 마련한 소재나 형식 자체를 끝내기가 아깝더라. 기본적으로 법의관을 주축으로 한 국내 드라마가 없기도 했고. 그런 걸 한 번 하고 끝내기는 좀 아깝다고 생각했지.

결말부에 다다라 본인이 연기하는 백범이라는 인물이 변화하고 있다는 인상도 느껴졌다. 그런 면에서 캐릭터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낼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지 않았을까?

캐릭터를 더 표현하는 건 없다. 시즌 1에서 캐릭터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시즌 2에서는 개인적인 서사는 최대한 배제하고 사건 위주로 진행할 예정이다.

 

슈트 브리오니. 흰색 티셔츠 코스.

그렇다면 시즌 2에서도 “질문이 틀렸어!”라는 대사를 듣게 될까?

여전히 까칠하니까 소리 질러대고, 뭐 그렇지.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나?(웃음) 갑자기 바뀌면 오히려 이상하지.

백범이라는 인물은 법의관으로서 신뢰가 가는 인물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직장에 그런 사람 있으면 참 피곤할 거다.(웃음) 그만큼 현실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껴지는 인물이긴 한데, 사실 실제로 그런 분들이 계실 거란 말이지.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분들을 대변해주고 싶기도 하다. 융통성이 중요하다면서 비리는 적당히 눈감아주고, 인맥이 중요하다고 하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많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백범처럼 원리,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고 쌀쌀맞아 보이긴 하지만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니까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을 거다. 결국 그건 정직한 거니까. 그런 사람들이 매력이 없을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사람들이 괜찮아 보인다.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는 시청자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가 되는 셈이니까,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해볼 여지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다 떠나서 일단 내가 약간 그런 사람이다. 내가 많은 사람과 잘 어울리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친구도 별로 없고. 그러다 보니 내가 백범 같은 캐릭터에 공감을 느끼는 거겠지.

그렇다고 말하기엔 주변의 배우나 관계자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배우로 꼽히는데.

아, 물론 백범만큼은 아니겠지. 그럼 큰일난다.(웃음) 드라마는 드라마니까, 더 많이 가는 거고.

 

실크 로브, 드레스 셔츠 모두 김서룡.

어쨌든 시즌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으니 <검법남녀>의 백범은 지금까지 맡았던 캐릭터 중에서 가장 긴 호흡으로 연기하는 인물이 되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기존에 맡았던 캐릭터와 다른 인상으로 다가오는 바가 있을까?

사실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맡은 인물에게 더 큰 애정을 갖게 되는 거 같다. 영화는 러닝타임이 길어봤자 두 시간 남짓인데 드라마는 러닝타임으로만 따져도 그보다 몇 배는 기니까. 결국 드라마에서는 영화보다 훨씬 긴 시간을 그 캐릭터로 살아가는 셈이다. 그만큼 촬영 회차도 많고 애정도 커질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최소한 밥을 먹어도 더 많이 먹고, 길을 걸어도 더 많이 걷고, 그 인물로서 하는 말과 행동도 많아지니까. 그런 면에서 최불암 선생님이 <수사반장>을 10년 넘게 하셨다니, 그 정도면 거의 그 인물로 사는 게 아니었을까 싶더라.

사실 정재영 씨가 2015년에 <어셈블리>로 처음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 의외라고 생각했다. 영화만 할 것 같은 배우처럼 느껴졌으니까. 실제로 주변에서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있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셨다는 분들이 있긴 했다. 내 입장에서는 ‘영화만 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살진 않았지만 영화 위주로 섭외가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고, 드라마가 들어와도 마음이 당기지 않아서 못했다.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고. 드라마를 해봤던 사람들이 힘들다, 정신없다, 대사 외울 시간도 없다, 이러면서 겁을 주니까 너무 힘들게 느껴졌고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드라마도 옛날만큼 정신없이 돌아가지 않아서. 물론 확실히 영화보다 빡세긴 하다. 촬영 분량 자체가 훨씬 많으니까. 그런데 컷을 한 번 더 갈 기회는 더 적고, 그만큼 배우가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게 많다.

국과수 법의관이라는 특수 전문직을 연기하기 위한 준비가 있었을 거 같다. 일반적인 의사와는 다른 거니까.

사실 의사 계통의 전문직 캐릭터 자체가 처음이긴 한데, 모든 직업이 그럴 수 있겠지만 부검이라는 일 자체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시신을 보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고, 그만큼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일을 하는 거라 생각하니까. 의대씩이나 갔는데 이걸 왜 하려고 하냐, 제정신이냐, 이런 얘기나 들을 거 같고.(웃음)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그런 면에서 존경스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욕먹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느꼈고.

우리나라에 법의관이 30명 정도밖에 없다고 들었다.

극한 직업이지. 1년에 부검을 많이 하면 700구까지도 한다고 하니까 하루에 2구씩 해야 하는 건데,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들지 않나. 그만큼 인원이 모자란 상황인데 하려는 사람은 없으니까.

혹시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말리는 사람은 없었나?

없었다. 내가 뭐 의대에 합격해놓고 배우가 되겠다고 했으면 모를까.(웃음)

그렇다면 배우가 되기로 한 결정을 스스로 의심해본 적은 없었나?

없었다. 오히려 늘 ‘어떻게 하면 연기를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목마름이 컸지 ‘이걸 계속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연기가 재미없다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 알게 된 거 같다고 느낀 적도 없으니까.

그만큼 배우로서의 길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건가?

그냥 좋았다. 어쩌면 남녀 관계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물어보지 않나. 왜 좋으냐고. 그래서 착하다는 둥 예쁘다는 둥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사실 이유는 없는 거다. 그냥 좋은 거지. 그러니까 견딜 수 있는 거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미래가 불확실하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 해도 무작정 하게 되는 거지. 그건 분야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연기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연기할 때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원래의 나와 다른 인물을 표현할 때 느껴지는 즐거움이랄까? 그런 걸 느꼈다. 그래서 안 하면 하고 싶어지고.

결과적으로 배우로서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의 자신을 되돌아보기보다는 계속 앞을 보며 나아가 여기까지 왔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런 셈이다. 그냥 앞으로 계속 이 일을 어떻게 할지 생각했지, 내가 과거에 어땠는지를 생각하는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던 거 같다.

어쩌면 그런 관점이 현실의 어려움에 치이지 않고 견뎌내도록 이끄는 동력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저 연기를 계속 못 할까 봐 걱정이었고, 지금도 걱정이지. 점점 나이 먹고, 신선함이 떨어지고, 그만큼 예전에는 하기 싫어서 하지 않았던 것을 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고. 물론 이것도 다 배부른 소리겠지만.(웃음)

계속 연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느껴지기도 하나?

항상 느낀다. 배우란 결국 대외적인 평가를 받아야 하는 직업이니까. 영화를 개봉했는데 관객이 많이 들지 않았다거나, 드라마 시청률이 낮다거나, 이런 건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어차피 그런 부분을 크게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그때마다 상황에 맞춰서 해나가는 수밖에 없지.

 

슈트, 셔츠 모두 김서룡. 플립플롭 코스.

올해 2월에 개봉한 <기묘한 가족>은 2015년에 개봉한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이후로 4년 만에 주연한 영화였다. 그사이에 드라마 세 편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정재영이라는 배우가 영화에서 너무 오랜만에 주연으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더라. 성에 차는 작품을 만나기 어려웠던 걸까?

‘이거 하고 싶다’고 느낀 작품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중간중간 드라마를 찍다 보면 반년 정도 훅 지나가게 되는데, 그사이에 제안받은 영화들을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는 없었던 거 같다.

그렇다면 <기묘한 가족>을 선택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일단 내가 신선하게 느끼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제 그런 취향도 좀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지만.(웃음) 그리고 내가 좀비물을 좋아한다. 좀비물 마니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안 본 작품이 없고. 한국에서 <부산행> 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또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겠다는 느낌? ‘좀비를 전혀 모르는 시골 사람들 앞에 진짜 좀비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 자체가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대중은 별로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나 보더라.(웃음) 솔직히 좀 어설픈 점도 있었고.

“법의관은 백정이며 장례업자이고, 수사관이며 외과의사이고, 죽은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는 편도 기차의 기관사이며 죽은 자와 대화를 하는 마법사다”라는 대사는 어떤 면에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설명과도 비슷하게 들린다. 배우 역시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존재니까.

그런데 배우를 법의관이라는 직업과 비교할 순 없을 거 같다. 사명감이라는 측면에서 너무 거리감이 있으니까. 의사도 그렇고, 판검사도 마찬가지고. 배우가 연기할 때 정의감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그저 다른 인물로 충실하게 보일 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좋아서 하는 거라 말할 수 있지만, 저런 직업을 가진 분들은 단지 좋아서 한다는 것 이상의 사명감이 깔려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 벌려고 의사가 된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돈이 좋다고 매일같이 환자를 돌보고 수술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다. 그럼 사기꾼이나 다름없지. 기본적으로 목숨이나 운명이 걸린 일을 하는 분들은 사명감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그 정도 사명감이 없어도 되니까, 그저 대중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면서 보람을 느끼는 서비스에 가까운 거지.

그렇다면 그런 사명감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할 때 배우로서 캐릭터의 영향을 받는 부분은 없을까?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뭔가 이 캐릭터처럼 좀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반대로 악역을 맡았을 때는 ‘이런 사람들에게도 나름의 이유라는 것이 있을 수 있구나’라는 합리화를 하기도 한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런 면에서 좋은 거 같다. 다양한 직업과 환경을 경험하게 되면서 삶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고 할까.

10년 전 <김씨표류기> 개봉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로 만났을 때 “외적인 게 본질을 해치면 안 된다.

그래서 흥행이 잘되거나 연기를 잘하는 것보다 나 자신이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본질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느냐가 중요한 거 같다”고 했던 게 기억난다. 어쩌면 배우로서의 본질이라는 게 다양한 삶을 바라보는 올바른 관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인간으로서의 본질인 셈이겠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 인기 많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인간이길 포기하면 안 된다는 뜻이랄까. 사실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나. 어쩌면 시대 자체가 그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고. 마치 영화에서 영혼을 팔라고 유혹하는 악마처럼. 배우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업이다. 그만큼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보람을 느끼는 직업일 수도 있다. 그걸 위해서 연기를 잘하고 싶어지는 거고.

결국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까?

배우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삶이 더 큰 거니까. 배우로서의 목표가 결코 첫 번째인 건 아니지.

어쩌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고민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이를 먹어갈수록 고민이 줄어드는 거 같다. 귀찮으니까 점점 대충 생각하게 되거든.(웃음) 더 물렁물렁해지는 거지. 원칙도 사라져가고.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 먹으면 보수적으로 변하는 거 같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귀찮으니까. 그런 게 제일 무서운 거다. 열정이 사라지니까. 사실 열정페이는 나쁜 거지만 열정은 결코 나쁜 게 아니지 않나. 젊은 시절에는 그런 열정으로 모든 걸 헤쳐나간 거 같은데 점점 현실에 만족하고 안주하면서 새로운 것을 시도하면 오히려 뭔가를 더 잃는 건 아닐지 걱정하게 되고. 그런 마음을 경계하고 자꾸 채찍질해야 하는데. 사실 법의관으로 살아가는 것도 열정이 있기 때문일 거다. 누가 대단한 인정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큰 명예를 주는 것도 아닌데 계속 그 일을 한다는 건.

새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이 망설여질 때도 있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연기해온 만큼 새로운 것에 도전할 기회 자체가 적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한다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사실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90세가 다 됐는데 연기하는 걸 보면 ‘정말 저 나이까지 하고 싶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웃음) 한편으로는 ‘정말 저 나이에도 열정이 남아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송해 선생님도 그렇고. 물론 계속 일이 들어오고 여건이 되니까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거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열정이 식지 않았으니까 하는 거겠지. 다 떠나서 힘들지 않을까? 내가 보기엔 힘들 거 같다. 결국 하고 싶은 열정이 있어야 가능한 거지.

한 분야에 오랫동안 자리해온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느낀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하다.

나는 그런 분들은 인정한다. 뭐든 간에 결국 그게 남는 거라 생각하고. 그런 말이 있지 않나,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결국 인생이란 마음먹기에 달린 거 같다. 젊을 때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40세 이후에 혹은 50세가 넘어서 빛을 보는 배우들도 있고, 심지어 30년 동안 순댓국집을 운영하다가 스타일이 좋아서 모델이 되신 할아버지도 있지 않나. 젊은 시절에 모델이 꿈이었다던데 늦게라도 꿈을 이룬 셈이다. 결국 삶이라는 게 하기 나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시간을 배우로서 혹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잘 살아갈까 생각하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거지.

나이가 들수록 열정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했는데 어쩌면 새로운 경험이 그런 열정을 살려주는 불씨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드라마라는 환경에 대한 경험이 배우 정재영에게는 새로운 불씨가 되진 않았을까?

맞다. 사실 드라마에 출연하고 그 안에서 적응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졌으니까. 결국 배우로서 나를 채찍질할 수 있는 경험이 된 거 같다. 세상을 좀 더 유연하게 보도록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다가 유튜브에 나올지 누가 알아.(웃음) 실제로 요즘 유튜브를 많이 보는데 그런 면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걸 받아들이게 된 거 같다.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배우도 폭넓게 그런 흐름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사실 예전에는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보단 많이 열렸지. 어떤 면에서는 타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젠 어디에 있건 배우로서 존재할 수만 있다면 되는 걸까?

그렇지. 어차피 내가 보기에는 연극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배우에게 요구하는 연기라는 것이 다르지 않으니까. 장르나 캐릭터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

 

청재킷 리바이스. 청바지 캘빈클라인 진. 더비 슈즈 유니페어.

얼마 전 EBS에서 <킬러들의 수다>를 방영하는 걸 우연히 봤다. <킬러들의 수다>가 2001년에 나왔으니까 벌써 18년 전 작품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연기를 해온 셈인데,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배우로 살아왔다는 것이 어떻게 느껴질까 새삼 궁금하다.

아우, 너무 다행이지. 하고 싶은 걸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이다. 전생에 좋은 일을 했나 싶을 정도로 고맙다는 말을 만 번 해도 부족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한계로 인해 못 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부분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거 같고. 그리고 스스로 잘한다고 생각하면 잘하는 배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못한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배우가 되는 건 아니니까. 결국 대중에게 평가받는 거지. 나 혼자 기가 막히게 해냈다고 생각해도 남들이 못했다고 하면 못한 거다. 물론 한 스물다섯 살까지는 자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그래선 안 된다.

기회가 된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90세가 다 돼서도 연기를 하고 싶나?

그렇지. 지금은 그런데 그때 가봐야 알 거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게 욕심일 텐데, 하고 싶은 것을 죽기 전까지 하고 싶다는 욕심만큼 큰 욕심도 없는 거 같다. 어쩌면 가장 행복한 삶일 거 같기도 하고. 물론 “저 사람 또 나와? 토할 거 같은데 계속 나오네” 이렇게 되면 안 되고.(웃음)

결국 연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걸까?

맞다. 그래서 욕심도 더 생기고. 더 좋은 작품 하고 싶고, 더 좋은 캐릭터가 되고 싶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남들은 ‘좋은 거 많이 했잖아’ 이러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못 해본 게 훨씬 많다. 연기가 더 늘 수 없다는 한계가 느껴져서 힘들기도 하지만 끝없이 욕심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고.

혹시 연기를 더 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아직도 갖고 있나?

뭔가 한 꺼풀이 더 벗겨져야 할 거 같다. 요즘 젊은 후배들은 우리 어릴 때보다 연기를 더 잘한다. 옛날에는 젊은 배우들이 어색하게 시작하는 게 보였는데 지금은 시작할 때부터 너무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실력이 상향 평준화됐다. 선배로서 그런 친구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느끼니까 나 역시 좀 더 진화하길 바라게 된다. 연기라는 것 자체가 시대에 따라 스타일이 변하기도 하고. 앞으로는 더 디테일하고 리얼한 연기를 해야 살아남을 거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낡은 배우로 느껴질 테니까. 사실 지금도 10년 전에, 30대 중반까지 쌓아온 것을 계속 써먹는 거라 생각하니까 종종 위기감이 느껴진다. 업그레이드를 하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니까.

결국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연기하고 싶다는 욕심과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매 순간 고민할 기회가 생겨야 언젠가 뭔가 탁 하고 이뤄질 거라 생각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거기서 정체되는 거니까. 물론 고민한다고 늘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해결되지 않아도 고민을 계속하는 건 의미가 있다. 고민하지 않으면 결국 정체되고, 그렇게 퇴보할 테니까. 그러니 계속해야 한다. 계속하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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