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뜨거운 설경구 1편

이보다 간절할 때가 없었고, 이렇게 갈망한 적이 없었다. 설경구는 지금 가장 뜨거운 순간을 지나고 있다.

셔츠 안데르센안데르센 by 아티지. 바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시계 브라이틀링.

지난 4월에 크랭크인한 영화 <생일> 촬영이 한창이라고 들었습니다.

뭐, 늘 하는 거니까. 그래도 요새는 표준 계약서 기준대로 정해진 시간만 촬영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어요. 물론 촬영하게 되면 확실히 술은 덜 먹죠.(웃음) 알아서들 연락하지 않으니까. 그러다 촬영이 끝나면 슬슬 술자리가 생겨요. 아무래도 우리 직업이 계획대로 살 수 있는 일은 못 되는 거 같아요. 

<생일>은 전도연 씨와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후 18년 만에 만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시상식을 비롯한 여타의 자리에서 볼 기회야 많았겠지만 오랜만에 촬영장에서 만나는 기분은 남다를 거 같아요.

좋더라고요. 전우로 만나니까. 사실 어제 ‘최민식, 한석규가 20년 만에 만난다’라는 캐스팅 관련 기사를 봤는데,  되게 반가웠어요. 역시나 옛 전우들이니까. 그래서 두 분한테 전화했어요. 너무 반가운 소식이라고.

요즘은 현장에서 선배라는 호칭을 쓸 일도 별로 없을 거 같습니다.

그런 지 꽤 됐어요. 스태프도 세대교체가 많이 됐고.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른들이 꾸준히 자리를 지켜줘야 현장이 안정감 있게 느껴진다고 생각하는데 어른들이 일찍 현장을 떠난 것 같아 좀 아쉬워요. 그분들의 노하우는 다시 배울 수 없으니까요.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밑에 있는 사람들이 배울 만한 부분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 선배들이 좀 오래갔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어서 머리가 하얗게 새도 카메라 잡고, 조명하고, 그런 현장이 멋있을 거 같아요.

어쩌면 배우로서 오래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만큼 현장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는 선배들이 보고 싶어지는 것 아닐까요?

어제 형님들한테 전화한 것도 그래서죠. 그분들이 선배로 앞에서 딱 버텨주는 게 제 입장에서는 든든하고 좋거든요. 반갑기도 하고요. 한편으론 그리움 같은 것도 있어요.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한국 영화가 다양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다양성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아쉽거든요. 한국 영화의 전반적인 톤도 바뀐 거 같고요. 영화 자체가 가벼워진 거 같다고 할까요? 영화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 느낌이에요.

예술적 성취보다는 잘 팔리는 상품에 대한 고민이 크게 앞서는 거 같긴 합니다. 

사실 다 돈 벌자고 하는 일이니 돈이 되는 쪽으로 움직이는 건 당연하겠죠. 돈을 벌어야 새로운 영화를 제작할 수도 있으니까 나쁜 일도 아니고요. 그런데 깊이 있는 영화도 돈을 벌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좀 더 다양한 영화를 볼 기회도 늘어날 테니까요. 물론 많은 투자를 끌어오는 것도, 후반 작업을 위한 기술도 중요하죠. 그런데 그런 영화에서 배우가 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예산이 적은 영화는 비빌 데도, 기댈 데도 없으니까 배우가 해줘야 할 몫이 많거든요. 배우들로 미장센이 채워지고, 그만큼 연기로 감동을 전하려는 고민도 커질 수밖에 없고. 예전에는 그런 영화가 좀 있었죠.

슈트, 니트 모두 에르메네질도 제냐 쿠튀르.

올해 촬영을 마친 <우상>과 촬영 중인 <생일>이 어쩌면 그런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렇죠. 배우들끼리 부딪쳐서 시너지를 내야 하는 영화니까. <우상>도 그렇고 <생일>도 그렇고. 예산이 적은 작품들이지만 배우들의 부딪침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읽히는 영화니까.

지난해에 개봉한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역시 배우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였어요. 물론 이 작품으로 ‘지천명 아이돌’이라 불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아마 작년에 제 생일 축하 광고가 강남역 광고판에 걸리면서 그런 말이 나왔을 거예요. 주로 아이돌 팬들이 광고하는 자리라며, 50세 지천명에 아이돌이 됐다고. 그런데 인간이 정말 간사한 게, 자꾸 듣다 보니 어느 순간 인정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처음에는 ‘나한테 왜 이래’ 이랬는데 이젠 뻔뻔하게 그러려니 해요. 익숙해지더라고요. 

다시 생각해도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을 거 같습니다 .

당혹스러웠죠.(웃음) 사람들이 자꾸 사진을 보내오는데 ‘대체 이게 뭐지?’ 싶고. 광고판도 생각보다 크더라고요. 되게 비싼 자리일 거 같고. 그래서 죄송했어요. 괜히 경제적인 부담을 안겨준 거 같아서요.

올해 생일에는 팬들이 상영관 한 관을 15일간 임대해서 ‘설경구관’으로 만들어줬다더군요. 올해에는 그 앞에 찾아가 인증샷도 찍었다고 들었고요.

사실 강남역 광고판은 실제로 보진 못했어요. 그때는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았거든요.(웃음) 이번에는 그때쯤 <박하사탕>이 재개봉해서 무대 인사차 해당 극장에 찾을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무대 인사 끝나고 잠깐 들러서 인증샷을 찍었죠. 직접 눈으로 보니 기분이 묘했어요. 상영관 입구와 주변이 제 사진으로 도배돼 있는데 너무 비현실적이었죠. 내게 어떻게 이런 일이웃음) 저 하나를 위해 여러 사람이 고생했을 거라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심지어 한 커피 전문점의 컵 홀더와 진동 벨 영상에도 제 생일을 축하하는 문구와 영상이 나오더라고요. 제게 올해 5월은 정말 환상적인 달이었죠.

이런 반응을 놀랍게 생각하는 주변인도 적지 않을 거 같습니다.

<박하사탕> 재개봉 때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날 상영관 400석이 꽉 찼대요. 예매가 시작하자마자 매진됐다는 거예요. 이창동 감독님이 분위기나 보자며 상영관에 들어갔다가 영화를 다 보고 나오셔서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저한테 오더니 깜짝 놀랐다고 하시는 거예요. 관객들 대부분이 젊은 여자라고. <불한당> 이후로 제 팬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긴 들었는데 누아르 영화니까 당연히 남자 팬들일 거라 생각했대요. 그러더니 저한테 “이것도 얼굴이라고, 대체 이게 어딜 봐서 잘생겼다고” 이러시고.(웃음) 그 후에 <버닝> VIP 시사회에 갔다가 홍경표 촬영감독님을 만났는데 이창동 감독님한테 그 얘기를 들었다고, 감독님이 정말 많이 놀란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팬덤이 배우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있을까요?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신경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연기에 전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닌 거 같아요. 어차피 제 팬분들도 제가 하는 걸 일방적으로 좋다고 하시기보다는 제가 잘못된 길을 가면 아니라고 비판해주실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괜찮은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재킷 김서룡. 티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사실 <불한당>은 개봉 당시 흥행에 실패한 영화였잖아요. 그래서 ‘불한당원’이라는 열혈 팬덤이 생겼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해요.

칸 영화제에 갈 때까지만 해도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칸에 다녀오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됐죠. 제작사 대표님이 사진을 보내줬는데 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불한당> 단체 관람 후 인증샷을 찍는다고요. 그러다 팬들이 모여서 일주일에 한 번씩 상영관을 대관해 <불한당>을 상영한다는 얘기까지 듣게 되니까 소름이 끼쳤죠. 변성현 감독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고. 그런데 자기도 몰라요, 무슨 짓을 했는지.(웃음)

개인적으로 설경구 씨가 출연한 작품 중 <열혈남아>를 좋아하는데요.

저도 좋아해요.

<열혈남아>에 특별한 애정을 갖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완성된 영화가 조금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시나리오가 좋았어요. 심재문이라는 남자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모성을 느끼면서 점점 안돼 보이는 게 마음 아프더라고요. 게다가 그것이 누군가를 죽이러 갔는데 죽이려는 놈의 엄마를 보고 느끼는 거니까. 결국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환경이 어땠을지 느껴지잖아요. 

<열혈남아>의 심재문이 살아남아 조직의 한자리를 차지했다면 <불한당>의 한재호처럼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왠지 심재문과 한재호가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열혈남아>를 <불한당>처럼 찍으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봤어요. 진한 색감으로 스타일리시하게 촬영하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될 거 같아서요. 물론 <열혈남아>가 촌스럽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요. <불한당>같이 만화처럼, <열혈남아>의 현실감을 덜어낸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재문이도 좀 다르게 연기했겠죠. 원래대로 껄렁껄렁하지만 ‘좀 멋있네’ 할 수 있게, 추리닝을 입어도 촌놈 같지 않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재킷 라르디니 by 신세계인터내셔날.

<불한당>의 한재호는 어머니를 향한 현수(임시완)의 마음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이해하게 되면서도 한편으론 그가 애정을 갖는 대상이 어머니가 아닌 자신이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머리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마음으로 느껴진다고 할까요? 

처음에 병갑(김희원)이 승필(김성오)에게 한재호에 대한 설명을 해주잖아요. 아주 잔인무도하고 죄의식이 없는 인간이라고. 그것처럼 무서운 게 어디 있어요. 완전히 사이코패스지. 그런 인물한테 온기를 넣어준 게 현수죠. 어떤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끌리는 거거든. 본인도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감정. 남자가 여자를 좋아할 때 이유가 없는 것처럼 현수가 재호한테 그런 인물이었던 거 같아요. 눈에 확 들어온 거죠. 

<불한당>을 로맨스물 혹은 퀴어물로 해석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설경구 씨도 <불한당>에 대해 ‘브로맨스를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말한 바 있고요.

사랑 이야기라고 봤어요. 짝사랑하고 질투하는 이야기라고. 퀴어까지는 아니라 해도 브로맨스는 너무 흔하니까 그것보다는 좀 더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행동이 아니라 눈빛으로 표현하려 했어요. 재호의 눈빛이 특히 그래야 했으니까요. 변상현 감독도 주로 저한테 주문을 많이 했어요. 호흡을 조금 더 세게 해달라고. 

심지어 엘리베이터 신은 에로틱한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고요.

묘하긴 했죠. 그래서 저희끼리 이야기할 때도 이건 사랑 이야기인가 보다 했어요.(웃음)

그런데 설경구 씨가 연기한 심재문이나 한재호는 악인에 가까운 인물이잖아요.

악인이죠. 생각 없이 칼 휘두르는.

그럼에도 두 인물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생기는 거 같아요. 악한 기질에 눌린 듯한 선한 본성이 보여서 그걸 끌어내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요? 배우 입장에서도 관객들이 그런 내면을 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거 같고요.

아무래도 결핍이 심한 인물들이라 둘 다 사람을 통해 그런 결핍이 채워질 때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 면에서 둘 다 장애가 있는 인물이라고 봤어요. 장애에 가까운 결핍이 있어서 평범한 일상을 살지 못하던 인물이 그런 일상을 살 수 있는 사람과 교류하면서 결핍이 충족되는 걸 느끼고 스스로 몰랐던 것들이 제 안에서 툭툭 튀어나온다고 느끼는 거죠. 그러면서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살아나고. 반대로 그렇게 회복된 탓에 오히려 최악의 비극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삶을 회복했기에 삶의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운명에 놓인 인물들이라고 할까요?

자기도 모르는 결핍이 오히려 이들에게는 삶의 동력이 됐던 거니까요. 재호도 끝내 현수를 죽이지 못했잖아요. 애초에 밖에 경찰들이 깔려 있는 거 다 보고 들어간 것도 그렇고. 사실상 밖에 나올 때는 죽으러 나온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자기는 아는 거죠. 재문이도 죽기 전에 굳이 대식이 엄마한테 찾아가서 “밥 먹어, 미친놈아” 이렇게 구박이나 받고 있잖아요. 사실 죽이러 갔으니 죽이면 되는데 결국 못 하는 거예요. 재문이도 재호도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러니까 비극이 되는 거죠.

셔츠 김서룡. 바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불한당>에 허준호 씨가 출연하게 된 게 설경구 씨 덕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불한당>에서 김성한 역할을 보니 딱일 거 같은데 분량이 너무 작아서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한재호가 전국구 두목 김성한을 제압하면서 한재호라는 캐릭터의 기가 초반부터 확 올라가잖아요. 김성한이 한재호라는 캐릭터를 살려주는 역할인 거죠. 그만큼 김성한은 겉으로 볼 때부터 세게 느껴지는 사람이어야 했어요. 그래서 준호 형이 떠오르기는 했는데 직접 부탁은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변성현 감독한테 “허준호 어떠냐?”고 하니까 “하실까요?” 하길래 연락처를 줬죠. 그렇게 ‘뺀찌 먹을’ 각오하고 연락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문자가 오더라고요. “너 때문에 한다고 했다”고.(웃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죠. 그러니까 제가 고마워해야 되는 거예요. 쿨하게 해줬으니까. 제가 워낙 낯을 가려서 모르는 배우를 만났다면 친해지려고 노력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준호 형이라 편했죠. 불편하면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알게 모르게 나거든요.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같이 작업하니까 되게 좋더라고요.

두 분은 설경구 씨의 영화 데뷔작인 <꽃잎>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는데요. 그때도 친분이 있었나요?

저는 첫 영화였지만 준호 형은 그때 이미 대스타였기 때문에 제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준호 형 성격이 살가운 편은 아니더라고요. 그냥 툭툭 던지는 타입? 저랑 비슷해요. 

<꽃잎>에 함께 출연한 박철민 씨랑 추상미 씨가 설경구 씨 차를 타고 촬영장을 다녔다고 들었어요.

그때가 다들 연극할 무렵이었는데 저만 차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 차에 싣고 갔죠. 대학로에서 출발해 천안의 몇 번 국도를 타고 순창의 무슨 호텔을 찾아오라는데 그때 내비게이션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 찾아가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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