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물음표

이정재는 변화를 인정해야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고 믿는다.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셔츠, 톱 모두 지방시.

어릴 때 누나 방에 이정재 씨가 출연한 <느낌> 포스터가 붙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이정재 씨를 보면 익숙하게 알고 지내던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요.

<느낌>이 1994년도 드라마인데 지금이 2019년이니까, 이제 옛날 얘기네요. 정말 오래됐네.(웃음)

사실 저에게 이정재라는 배우가 또렷하게 다가온 첫 작품은 <태양은 없다>였거든요. 당시 저는 중학생이었는데 <비트>나 <태양은 없다>의 대사를 따라 하는 친구가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 10대들에게 배우 이정재는 <신과 함께>의 염라대왕으로 익숙한 거 같더군요.

그렇죠. 이제 <태양은 없다> 얘기하는 분은 거의 없어요.(웃음) 그나마 요즘 작품으로는 <관상> <신세계> 정도죠. 게다가 예능 프로그램 같은 데서는 이정재 따라 하기가 단골 메뉴처럼 등장하는데 주로 <관상>의 수양대군이나 <암살>의 염석진을 따라 하기도 하고, 비교적 근래 작품이 회자되고 있죠. 그래도 제 캐릭터를 재미있게 여겨주시니 고맙죠. 아무리 많은 작품에 출연해도 인지되지 못한다고 느끼면 아쉽거든요.

그만큼 세상의 변화가 더욱 민감하게 느껴질 거 같기도 합니다.

영화 개봉 시점에 홍보사들과 회의를 하다 보면 6개월 전과는 또 다른 요구를 한다는 걸 알게 돼요. 작년여름에 <신과 함께> 속편이 개봉할 때만 해도 유튜브를 이용한 홍보 계획은 없었는데, 이제 유튜브를 활용한 홍보는 기본적인 게 됐어요. 물론 다양한 매체의 특성에 일일이 맞추는 게 어렵긴 하지만 시청자나 독자들의 성향이 명확히 구분되는 걸 보는 재미도 있어요. 요즘은 영화를 관람하는 연령대도 예전보다 훨씬 넓어졌다고 하고요. 예전에는 20~30대 관객층이 다른 세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지금은 1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고르게 영화를 보는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변화를 느끼는 게 혼란스럽진 않나요?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편이었어요. 그리고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이상 새롭게 요구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몰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만 도태돼서는 안 되니까요.

<사바하>라는 영화를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호기심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검은 사제들>을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차기작인데, 이정재 씨가 출연했던 기존 작품과는 성격이 조금 달라 보이기도 하고요.

장르에 끌렸던 거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영화에는 한 번도 출연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래서 미스터리 스릴러에서 배우가 얼마나 집중력 있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관객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긴장감을 얼마나 줄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게다가 요즘 장르 영화가 굉장히 많이 만들어지니까 한 번은 해봐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또 <검은 사제들>을 연출한 장재현 감독의 작품이라는 게 결정적이었죠.

<검은 사제들>이 <사바하>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든 담보가 된 셈이군요.

<사바하> 시나리오를 보면서 이 작품이 <검은 사제들>만큼 흥행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재미있는 요소가 많은 영화가 될 거라고 봤어요. 목사와 스님이 힘을 모아 사건을 해결하려 한다는 내용 자체가 재미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종교적인 이야기에 갇히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을 막겠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다는 점도 무척 흥미로웠고요.

<사바하>에서 연기한 박 목사는 사건에 연관돼 있지만 깊게 관여하는 인상은 아닙니다. 스크린 안에 있지만 객석에 앉아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제가 연기한 박 목사라는 캐릭터는 이야기의 화자 같은 인물이에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누가 이랬는지, 그걸 좇아가며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인물인 거죠. 그런 박 목사가 시종일관 진중하기만 하면 영화가 굉장히 무거워지고 관객도 영화를 보기가 쉽지 않을 거 같았어요. 그런데 장재현 감독도 <검은 사제들>에서 그랬듯이 <사바하>에서도 유머 코드를 조금씩 넣고 싶었던 거 같았어요. 그 덕분에 저도 박 목사에게 좀 더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었죠.

<사바하>는 기본적으로 초현실적인 존재의 정체에 접근하는 오컬트 장르의 서스펜스를 전달하는 영화지만 박 목사와 해안 스님(진선규), 요셉(이다윗) 같은 인물의 관계를 통해 버디 무비의 재미를 주고 싶어 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박 목사와 해안 스님은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잖아요. 불교 교리를 인용한 신흥 종교가 나타났는데 수상쩍어 보이니 고등학교 후배인 네가 좀 도와달라는 식으로 박 목사가 해안 스님에게 부탁하면서 함께 사건을 해결해가는 짝꿍이 되는 거죠.

학벌을 통해 종교 통합을 이루는 셈이네요.(웃음) “목사와 스님이 함께 사건을 해결한다”라는 문장만 놓고 시계를 20년 전쯤으로 돌리면 어느 코미디 영화를 설명하는 것처럼 읽혔을 거 같아요.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계에서 코미디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으니까요.

아무래도 극과 극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조합이라 코미디로도 그럴듯해 보일 거 같아요.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달라 티격태격하는, 그런 코미디물처럼.(웃음)

티셔츠 제임스 펄스 by 비이커. 바지 TBRM by 샌프란시스코 마켓.

티셔츠 제임스 펄스 by 비이커.

지난해 정우성 씨와 인터뷰하면서 비슷한 얘기를 했던 거 같은데, 두 분 다 1990년대에 활동을 시작해서 2000년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계를 견인하는 배우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영화가 예술적으로, 산업적으로 급변하고 변모하는 시기의 경험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리트머스지 같은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더러 계세요. 오랫동안 꾸준히 작품을 해온 배우들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작품이 나온 해의 사회적 분위기나 사건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고요. 아무래도 영화나 예술이라는 게 동시대 사람들과의 공감대를 자극하는 게 있다 보니 어느 배우의 작품을 시대별로 훑어보면 그 시대가 보인다고 말이죠.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영화에 많이 출연한 배우는 아니었어요. 그래서 <젊은 남자>부터 <사바하>까지 제 출연작을 살펴보면 어떤 키워드가 보일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실 이정재 씨의 작품을 살펴보면 시대에 따라 한국 영화계가 겪어온 변화가 읽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젊은 남자>나 <태양은 없다>같이 남루한 청춘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기획되던 1990년대 후반을 지나 <시월애>나 <선물> <오버 더 레인보우> 같은 멜로물이 쏟아졌던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는 분명 지금의 한국 영화와는 다른 시절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니까요. <오! 브라더스> 같은 코미디물의 주연을 맡은 시절도 있었고요. <태풍>과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기획되던 시절도 있었고요. 예나 지금이나 한국 영화계의 중심에서 그런 변화를 겪었고, 겪고 있는 셈이죠.

그런 의미라면 맞을 수도 있어요. 제 필모그래피를 통해 한국 영화의 지난 흐름을 짚을 수 있다는 의미라면 말이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작품을 만날 수 있다면 배우로서 즐거운 일일 거예요.

오히려 지금 신선하게 느껴지는 작품이 꽤 많아 보이는 게, 지금 영화를 만들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저보다 많이 어려졌으니까요. 그만큼 젊은 상상력을 만나게 된다고 할까요? 요즘 친구들이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이렇게 영화적으로 풀어냈구나,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게 재미있어요.

지난 몇 년간 <암살> <인천상륙작전> <대립군> 같은 시대극과 <신과 함께> 같은 판타지물에 출연했기 때문에 현대를 배경으로 한 <사바하>가 오랜만에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특별히 분장할 필요도 없고요.

몇 년간 줄곧 시대극에 출연하다 보니 <신과 함께> 이후로는 무조건 현대극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형사물이나 코미디물 시나리오도 좀 있었는데 당연히 <사바하>가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죠. 오랜만에 분장하지 않고 연기하는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에 배우로서 연기를 좀 더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라 느껴지기도 했고요.

나이가 들어서도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예전보다는 훨씬 다양해진 거 같아요. 옛날에는 40세만 넘어도 나이 든 사람 취급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40대가 돼도 젊다고 하니까 그만큼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도 많아졌고요.

일단 사회적으로 평균수명 자체가 길어졌고, 나이가 들어서도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열린 생각을 가진 분이 많아졌어요. 예전에 말하던 50대가 이제 그런 50대가 아닌 시대가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영화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훨씬 다양해졌어요. 이젠 20대도 그리 어린 나이가 아닌 거 같고요. 20대 CEO도 나오는 시대니까. 그만큼 세대 간에 공감할 수 있는 소재나 주제도 늘어난 게 아닌가 싶어요. 나이가 아니라 ‘내가 뭘 좋아하느냐’에 따른 카테고리로 나뉘는 시대가 됐다고 할까요?

데뷔작인 1994년 작 <젊은 남자>로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 대종상영화제 등 대부분의 영화 시상식에서 신인연기상을 수상했어요. 스스로도 <젊은 남자>에 대한 애착을 몇 차례 밝힌 바 있고요. <젊은 남자>에서 연기한 이한이라는 인물은 성공을 꿈꾸는 신인 모델이었는데 당시 신인 배우 입장에서 공감대가 적지 않은 인물이었을 거 같기도 합니다.

<젊은 남자>에서 연기한 이한의 나이가 당시 제 나이와 같았어요. 그때의 저도 신인 배우 입장이라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고요. 하지만 신인 배우라 연기가 능숙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배창호 감독님께 많이 배웠죠. 그런 기억이 <젊은 남자>를 잊을 수 없는 첫 작품으로 만든 거 같아요.

데뷔 초기부터 ‘성공’이라는 단어로 수렴하는 사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을 연기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아요. 데뷔작인 <젊은 남자>에서 연기한 이한이나 초기작인 <불새>의 영후는 성공을 열망하는 청년이었고, <태양은 없다>의 홍기나 <오! 브라더스>의 오상우 역시 성공이라는 단어 안에서 울고 웃는 캐릭터였죠. 근작 중에서도 <도둑들>의 뽀빠이나 <암살>의 엄석진은 성공을 위해 배신을 마다하지 않는 비열한 인물이고요. 그런 면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동아줄처럼 잡고 안간힘을 쓴 인물들의 운명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젊은 남자>의 이한은 성공을 위해 살인까지 불사하게 되는데, 끝내 자신의 영혼을 팔아서라도 성공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가져온 파국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인물이 되죠. <불새>에서는 죄를 뒤집어써서라도 성공을 하고 싶어 하고, <태양은 없다>에서는 친구 돈을 훔쳐서라도 출세하고 싶어 하고, <오! 브라더스>는 정신지체 장애인인 이복동생을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 하고. 그런데 이 캐릭터들은 관객에게 던져지는 질문일 뿐이지, 이정재가 갖고 있는 가치관은 아니니까. 제 입장에서도 이해해보는 거죠.

혹시 이정재 씨에게도 성공이라는 단어가 예민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나요?

사실 저는 그렇게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재미있게 잘 살면 성공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결국 소소하게 즐기는 재미가 많아질수록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커지는 거 같아요. 성공이나 행복이란 게 주관적이기도 하고요. 성공했다고 인정받아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리고 한 10년 전부터 성공이나 행복의 기준에 대한 새로운 공감대가 생긴 거 같아요. 출세하고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게 성공의 기준이라는 생각에서 다들 많이 벗어난 것 같다고 할까요.

공적으로 악행이라 여길 만한 행위를 하는 인물을 연기하지만 사적으로는 끝내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악역의 범주에 속하지만 악인이라 이해되지 않는 인물들이라고 할까요. 

<태양은 없다>로 처음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태양은 없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홍기라는 친구를 내가 잘못 연기하면 너무 얄미운 캐릭터로만 보일 거 같았거든요. 제 입장에서는 얄밉게 보이는 한편 관객의 동정심을 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길 바랐어요. ‘이놈의 자식, 너도 한번 살아보고 싶은 거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인물을 깊이 있게 연기하고 싶었죠. 그런데 그런 의도가 잘 전달됐다고 느꼈고, 제 입장에서는 나름 성공한 캐릭터였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도둑들>의 뽀빠이도, <관상>의 수양대군도 악역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인물 입장에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관객에게 이해시키고 싶었어요. 관객 입장에서 그런 이유가 납득된다면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가 될 거라 생각했거든요. ‘저 새끼, 나쁜 놈인데 밉지가 않네’ 이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게 제 욕심이었죠.(웃음) 하지만 <암살>의 염석진은 그렇게 할 수 없었죠.

염석진은 왜 그렇게 할 수 없었나요?

아무래도 나라와 동료를 팔아먹은 인간이니까 결이 다르다고 느꼈거든요. 사실 그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건 염석진의 마지막 대사 때문이었어요.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뿐만 아니라 해방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제 살길을 찾겠다고 매국을 했던 인물도 우리 민족이니 결국 보고 싶지 않은 치부 같은 인물도 마주하고 똑바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인물은 관객들이 미워하도록 연기하고 싶었어요.

티셔츠 보테가 베네타.

<태양은 없다>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을 당시 나이가 스물일곱 살이었어요. 지금까지도 최연소 수상 기록으로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당시 같이 후보에 오른 배우가 최민식, 한석규, 이런 쟁쟁한 선배들이었고요. 일찍이 배우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셈인데요.

김성수 감독님 덕을 많이 봤죠. 정말 능력이 뛰어난 감독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직접 시나리오도 쓰고, 촬영감독님과 카메라 앵글과 구도를 잡으면서 그 장면에 적합한 음악을 찾아내고, 배우들에게 연기 디렉션을 줄 때 미묘하게 감정을 건드려요. 그때 정말 많이 배웠죠. 결국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상황을 경험해볼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이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어요. 정우성 씨와의 호흡도 워낙 잘 맞았고요.

<태양은 없다>는 지금까지 정우성 씨와 함께 출연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한데, 이정재 씨가<모래시계>로 SBS 신인상을 수상할 때 정우성 씨도 <아스팔트 사나이>로 공동 수상을 한 바 있어요. 만인에게 절친으로 알려진 두 분은 아티스트 컴퍼니라는 매니지먼트사의 공동 설립자이기도 하고요.

이제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알 수 있는 관계가 된 거 같아요. 눈치만 봐도 안다고 할까요.

정우성 씨와 함께 <태양은 없다>에 출연할 때만 해도 20대였는데 이제 점점 젊음이라는 단어와 먼 나이가 돼가고 있습니다.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 거 같지만 언젠가는 깊게 고민할 날이 오겠죠. 그렇다면 그때의 나는 어떤 고민을 안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는 있어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열심히 뛸 수 있는 나이라 여전히 관객에게 새롭고 신선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한 고민이 앞서는 거 같아요. 20년 넘게 연기했지만 여전히 해보지 않은 게 더 많다고 느껴지니까요.

반대로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도 있을 거 같은데요.

생각에 여유가 생겼어요. 시간을 쓰는 게 달라진 거 같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들과의 다툼도 적어졌어요. 아무래도 남성 호르몬이 적어진 탓인가. 확실히 체력도 옛날 같지 않고.(웃음)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을 보면 주변의 배우들과 잘 어우러지며 극의 시너지를 높이는 데 능한 배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정재 씨가 출연한 영화에서는 대부분 주변의 캐릭터들이 함께 돋보인다는 인상이 드니까요. 그만큼 현장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편이 아닐까 싶고요.

특출한 매력과 뛰어난 재능이 있는 분들이 현장을 리드하고 앞장서 나가는 게 여러모로 결과물에 좋은 영향을 미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그 정도 역량이 있는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각자의 힘을 모을 수 있는 팀워크를 이루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가 적당한 거 같아요. 독보적으로 현장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결국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과 잘 어우러지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배우마다 각자의 개성과 능력이 다르잖아요. 영화라는 게 개인이 아니라 다 함께 하는 작업인 만큼 최대한 부딪힘이 없는 상황을 만들수록 좋은 거 같아요. 현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상당한 추억이 남는 일이기도 하고요. 작품이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해도 현장에서 만난 관계가 오래 남을 때도 많고, 그러니 그런 관계에도 신경을 쓰면서 일해야죠. 물론 일단 저 자신부터 제 역할에 잘 몰입할 수 있어야 하고요.

최근에 드라마 출연에 관한 기사가 나기도 했는데, 아직 출연과 관련해 전혀 결정된 바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정재 씨가 드라마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화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마지막으로 출연한 드라마가 10년 전 작품이기도 하고요. 혹시 드라마 출연에 대한 관심은 없나요?

아무래도 주로 영화에 출연해온 배우 입장에서 드라마 현장은 작품을 준비하는 데 너무 빠듯하게 느껴지는 거 같아요. 사실 현장에서 밤을 새우고, 잠을 덜 자고,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저 내 연기를 100% 이해할 수 없다는 게 관건이죠. 아무래도 영화와 달리 드라마 대본은 촬영 전에 결말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가게 되니까 좀 망설여지는 부분이 생기는 거 같아요. 자신의 캐릭터를 100% 이해하지 못한 채 연기를 하는 입장이 된다고 느껴지니까요.

요즘은 드라마 제작 환경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고 방송사도 많아졌어요. 넷플릭스처럼 새로운 선택지도 생겼고요. 그런 변화에서 매력을 느끼진 않나요?

말씀하신 대로 지상파 방송국 3사 정도만 있던 시절과는 정말 많이 달라졌죠. 요즘은 시스템이 많이 개선됐고 현장 분위기도 예전과 달라졌다던데, 이런 분위기에서 문제점들이 해결될 수 있다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거 같아요.

20년 넘게 활동한 배우 입장에서 여전히 더 이루고 싶은 바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면서 새롭게 요구되는 시각과 감정이 생기잖아요. 배우는 항상 그런 시각과 감정에 맞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거기 있고요. 배우 입장에서는 작년과 재작년이 또 다르다는 것이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그런 변화를 늘 감지하면서 배우로서 꾸준히 활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목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예년보다 출연하는 작품 수가 줄어들 수도 있고, 캐릭터 비중이 조금씩 작아질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죠. 그럼에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점점 중요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제가 얼마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결국 제 몫일 거예요. 그걸 기대하는 거죠.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배우 이정재는 어떤 공을 던질지 고민하는 투수라기보다는 끊임없이 날아오는 공을 잘 받아치기 위해 고민하는 타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배우로서가 아닌 개인으로서 바라는 바는 없을까요?

사실 이제는 배우로서의 삶이 개인으로서의 삶과 동일해진 거 같아요. 젊은 시절에는 호기심도 많고, 해보지 못한 것을 다 해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영화나 연기 자체에서 느껴지는 재미가 훨씬 커져서 그 외의 것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었어요. 결국 배우 입장에서 영화를 만드는 일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큰 거 같아요. 점점 더 궁금하고요. /글_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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