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아의 해피 엔딩

윤세아는 재미있기만 한 것이 꼭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스카프 니트 스웨터 푸시버튼. 선글라스 젠틀몬스터.

사실 처음에는 <SKY 캐슬>(이하 <스카이캐슬>)에 별 기대감을 갖진 않았어요.
왜요? 작품 볼 줄 모르시네!(웃음)

아무래도 주목받는 작품은 아니었으니까요.
그게 더 좋았던 것 같아요. 꾸미지 않고 작품으로 승부 본 거죠.

결국 <스카이캐슬> 덕분에 ‘별빛승혜’라는 애칭까지 얻게 됐는데요, 작품을 통해 애칭을 얻은 것 자체가 처음 아닌가요?

처음이죠. 인기라는 걸 처음으로 체감하게 된 거 같아요. SNS로 승혜와 닮은 캐리커처나 닮은 꼴 이미지가 많이 올라오는 걸 보면서 이 캐릭터를 얼마나 좋아하길래 이렇게까지 표현해주는 걸까, 하면서 매일매일 선물받는 기분이었어요. 지인들도 발견할 때마다 보내주는데, 정말 재미있었죠.

2018년 8월에 리딩을 시작했다고 하던데, 당시 받은 대본은 몇 화 정도 분량이었나요?

4회까지 받았을 거예요. 대본을 받아 읽어보는데 계속 쭉 보게 됐어요. 재미있었던 거죠. 그래서 앞뒤 생각할 거 없이 이건 꼭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노승혜는 극 중에 등장하는 여성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보여준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4회까지는 그런 기미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회가 거듭될수록 그런 변화에 따라 연기 톤을 적절히 변화시켜나가는 게 중요했을 거 같아요.

앞뒤를 다 읽고 연기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뒤로 갈수록 새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처음부터 뜨거운 뭔가를 갖고 있는 캐릭터라는 것 정도를 알고 출발했고, 변화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대본이라 잘 따라갈 수 있었던 거 같고요.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지만 편하게 생각하려 했죠. 되게 현실적인 캐릭터잖아요. 엄마로 살면서 남들이 시키는 걸 안 시킬 수는 없고, 그럼에도 아이들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과정을 겪게 되고. 그런 감정에 충실하다 보니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 거 같아요. 주변 친구들이 고민하는 주제이기도 했고.

사실 아이를 키워봐야만 엄마를 연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다만 <스카이캐슬>은 동시대의 현실과 밀착한 작품이라 작품을 통해 되레 그런 사실을 알게 되는 놀라움이 있었을 거 같아요.

학습 계획표를 짜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실제로 지인이 그런 일을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음지에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죠. 하지만 크게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어요. 친구들이 대부분 초등학생 엄마인데 맹모삼천지교라고, 다들 어디서 애를 키워야 할지 걱정하더라고요. 형편에 맞춰서 갈 수 없으면 무리해서라도 가야 할지 고민하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아이에게 좋은 걸 해주고 싶은 게 엄마니까. 그리고 저희 엄마가 굉장히 희생적이었기 때문에 엄마한테 느낀 감정이 노승혜에게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제가 애들 수준에 맞춰서 잘 놀아주는 편이기도 해요. 좀 순수하다고 할까요.(웃음)

재킷, 셔츠, 치마 모두 미우미우. 귀걸이, 언더웨어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엄마가 된다면 어떨 것 같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을 것 같아요.

아이가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엄마였으면 좋겠는데, 사실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결국 돼봐야 알겠죠. 다만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잖아요. 그리고 저는 감정이 얼굴에 바로 드러나는 편이라 애한테도 제 감정이 쉽게 전달될 테니 그런 감정을 바로바로 풀어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와 친구 같은 관계가 되면 좋겠어요. 그러면 기본적으로 서로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되면 재미있게 살 수 있겠죠. 제가 워낙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요. 애가 지겨워하지만 않는다면.(웃음)

극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정보이긴 하지만 드라마와 관련된 캐릭터 설명을 보면 노승혜라는 인물은 차민혁(김병철)과 결혼하기 전부터 순종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버지가 군인이라 강압적인 환경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한편으로 자유롭고 싶은 열망이 많은 사람이었죠. 게다가 언니는 외국에 나가 사니까 노승혜가 집안을 다 짊어지고 산 거예요.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어서 결혼을 선택한 거고. 물론 차민혁이라는 남자가 좋아서 결혼했겠지만.

드라마를 보면서 결혼하기 전 노승혜와 차민혁의 관계는 어땠을지 궁금해지긴 했습니다. 노승혜는 차민혁의 어떤 면을 좋아했던 걸까, 결혼하기 전의 차민혁은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그랬을 거 같아요. 그런 얘기를 병철 선배님과도 많이 나눴어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커플의 뿌리는 없을 거 같다고 생각했고요. 제 생각으로는 아마 차민혁의 자수성가가 멋있게 보였을 거 같아요. 그게 열등감으로 다가오기 전까지는. 노승혜 입장에서는 다 누리고 살아온 자신과 달리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멋있게 느껴졌겠죠. 게다가 침착하고, 말도 잘하고, 배움에도 게으르지 않고, 아이들 교육에도 앞장서고. 그러다가 점점 그 사람의 콤플렉스를 보게 되고, 남편의 욕망에 눌리기 시작하면서 안쓰러움도 느꼈을 거 같아요. 그걸 어느 순간까지는 모른 척했겠죠.

피라미드를 올라온 차민혁을 보고 반했지만 자식에게까지 피라미드 등반을 강요하는 차민혁한테 질린 셈이군요.

그래도 차민혁과 함께 살아온 노승혜 입장에서는 차민혁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차민혁의 나쁜 방법을 고치게 만들고 싶었던 거 같고요. 그런 면에서는 차민혁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마음도 얼마나 지옥이겠어요. 오로지 그거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그걸 이루지 못하는 셈이기도 하니까요. 두루 살피면서도 갈 수 있는데, 자기 길만 보고 가야 한다는 고집 때문이죠. 그래서 노승혜는 그 고집을 꺾으려고 많이 노력한 거고요.

결말에 다다라 노승혜가 차민혁과 이혼을 불사해서라도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남편만 두고 스카이캐슬을 나가기까지 하는데, 사실 이혼을 감행했다 해도 공감할 수 있었을 거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노승혜는 차민혁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는 걸 보고 이 여자가 이 남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노승혜 입장에서도 차민혁이 단서를 던져주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거예요. 술 먹고 문자도 보내고, 슬쩍슬쩍 입술도 떨리고, 차민혁이 반성의 기미를 계속 던져주잖아요. 그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딱 끊어버릴 수 있겠어요. 김병철 선배가 그만큼 연기를 잘해주신 것 같기도 하고요.

노승혜가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 끝내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연기하는 재미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신났어요. 특히 컵라면 신이나 반성문 신에서는 정말. 그리고 아이들과 피자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신도 좋았어요. “외롭지 않은 인생을 사는 게 성공이라고 생각해”라는 대사를 할 때. 제가 살아가고 싶은 모습이었던 거 같아요. 그런 신을 만나면 확실히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너무 좋았어요.

노승혜가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을 연기할 때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움직이는 거 좋아하고, 성격이 워낙 급해서.(웃음) 소리 지를 때도 노승혜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가 조금씩 비집고 나와서 묵혀둔 화를 한 번에 터트리는 쾌감이 있었죠. 그 신을 위해서 그 전까지 조곤조곤 스스로를 지르밟았던 셈이고요.

촬영장에서 아들딸 역할을 한 배우들의 이름 대신 극 중 이름을 부르곤 했던 거 같더군요. 이를테면 차세리 역을 맡은 김유나 배우를 ‘세리야’라고 부르는 식으로요.

사실 제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서. 미안하다, 애들아.(웃음) 그런데 이름을 계속 불러야 연기할 때도 어색하지 않아요. 만난 지 얼마 안 된 애들이니 편하게 지내야 하니까 평소에도 ‘딸’, ‘아들’ 이렇게 부르면서 편하게 지냈어요. 그러면서 많이 편해졌고요. 사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은 아니지만.(웃음)

점프슈트 드리스 반 노튼 by 분더샵.

12년 전에 처음 뵀을 때도 크게 낯을 가리시는 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그때는 좀 조심스러웠을 거예요. 지금은 뻔뻔해졌죠.(웃음)

외모도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거 같아요.

그건 아닐 텐데.(웃음)

실제로 윤세아 씨의 과거 모습과 현재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안 난다며 감탄하는 글을 포털 사이트나 SNS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어요. 과거 모습까지 궁금해질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다는 거죠.

사실 저는 노승혜 같은 사람은 아닌데, 다들 노승혜를 보내고 싶지 않나 봐요. 직설적이고, 거짓말도 잘 못해요. 호불호도 굉장히 강한 편이고요. 그런데 노승혜는 항상 거름종이를 대고 사는 사람 같잖아요. 말도 거르고, 숨도 고르고, 예쁘게 생각하고, 우아하고. 그런 면은 저도 배우고 싶긴 해요. 하지만 저는 장난치고 망가지는 걸 좋아하다 보니 요즘은 종종 혼나기도 해요. 노승혜를 보내고 싶지 않은 분들에게. 하지만 드라마는 끝났고, 저는 제 인생 살아야죠.

외모 때문에 차가운 사람 같다는 선입견이 생기기도 합니다.

메이크업을 그렇게 해서 그래요. 저 착한 얼굴인데.(웃음) 그런데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좀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긴 해요.

‘알고 보면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편 아닌가요?

되게 많아요. 다들 놀라죠. 물론 저는 ‘왜 이렇게 놀라지?’ 싶지만. 그런데 다들 금방 익숙해지더라고요. 사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않나요? 서로 코드가 맞으면 결국 편해지는 거죠.

셔츠, 치마, 부츠 모두 펜디.

염정아 씨와는 6년 전에 <내 사랑 나비부인>이라는 드라마에 같이 출연한 적 있었죠.

솔직히 그때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냥 언니 연기 보고 너무 놀랐던 건 기억나요. 그때도 언니는 연기를 정말 잘했으니까. 게다가 사랑과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저도 좀 보는 눈이 생긴 거 같아요. 언니 연기를 보면, 왜 저렇게 하는지 이해가 되고, 그걸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여전히 연기할 때는 배우로서 만나게 되고, 사석에서 만나면 언제나 편하고 친한 언니가 되고, 그런 거 같아요. 서로 안다고 해서 연기하는 게 더 편해진다든가 특별히 그런 건 아니고요.

보는 눈이 생겼다는 건 배우로서 그만큼 성장했다고 느낀다는 말인가요?

사실 제 자랑인 거죠.(웃음) 그런데 정아 언니도 훨씬 깊어진 거 같아요. 언니가 연기하는 거 보면 가슴이 저려서 움직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 게 감동적이었어요. 저 역시 저런 자세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죠.

“경쟁은 자기 자신하고 하는 거지. 남하고 하는 경쟁은 사람을 외롭게 만들거든”이라는 노승혜의 대사처럼 결국 자기 자신을 뛰어넘겠다는 자세가 필요한 걸까요?

남하고 비교하는 걸 멈춰야 돼요. 자격지심에 찌들고, 소심해지고, 그러면 뭐가 되겠어요. 그렇게 살면 결국 병 걸려요.

그래도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이기고 싶어질 때도 있었을 거예요. 배우로서 연기를 하다 보면 다른 배우와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르고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저 내가 잘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만 많이 했던 거 같아요. 물론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자극제가 되기는 하죠. 하지만 저는 그냥 제 자신에게 충실할 뿐이었어요.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이런 질문이 너무 싫었어요. “정말 어떤 배역이 하고 싶었어?”라는 질문.

굳이 그 배역을 연기하는 건 아니라 해도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배역의 입장에 있을 때 스스로는 어떤 입장일 수 있을지 생각해본 적은 있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생각했죠. 진진희(오나라)도 그렇고, 이수임(이태란)도 그렇고, 한서진(염정아)도 그렇고요. 모두가 다 각자의 선택을 하며 살잖아요.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저는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 정말 저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도 많았죠. 어쩌면 그 정도로 흡입력이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거 같기도 해요.

재킷, 셔츠, 바지 모두 YCH.

<스카이캐슬>은 보기 드물게 여성 캐릭터들이 주도하는 작품이었어요. 그만큼 배우 입장에서도 캐릭터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표현해내고 싶다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배우라면 어떤 작품을 만나도 그럴 거 같아요. 작품 안에서 자신의 배역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싶고, 돋보이게 연기하고 싶고, 그래야 꾸준히 연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스카이캐슬>에서는 ‘더 잘해야 돼’ 이런 분위기가 있었던 거 같아요. 정아 언니도 그랬고요. 40대 여배우들이 모여서 하는 작품이었잖아요. 제 입장에서는 <궁녀> 이후로 이렇게 여배우가 많은 촬영장이 처음이기도 했고요. <궁녀> 때도 앞으로 이런 작품을 또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스카이캐슬> 현장이 그런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여배우가 많이 나오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작품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최소한 남성 캐릭터와 동등한 입장에 놓인 것처럼 보이기라도 하면 좋을 거 같아요. 너무 치우쳐 있으니까요. 그래서 <스카이캐슬>이 그런 발판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면에서는 되게 뿌듯하죠.

<스카이캐슬> 1회 시청률이 1.7%였는데 마지막 회인 20회 시청률은 23.8%까지 올라갔어요. 한 회마다 시청률이 상승하는 과정이 현장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현장 분위기는 처음부터 되게 좋았어요. 그리고 사실 그런 얘기할 여유도 없었죠. 수다 떨 에너지를 아껴서 연기했던 터라 분위기가 달아오르거나 내려가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어쩌면 시청률이 꾸준히 올라가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현장에 있는 배우 대부분이 경험치가 있는 분들이라 그런 분위기에 영향받지 않고 꾸준히 자기 몫을 하는 거 같았고요.

<스카이캐슬> 결말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배우 입장에서도 결말이 궁금했을 거 같아요.

매회 궁금했죠. 결말은 모르고 대본만 따라가며 연기했으니까요. 다만 <스카이캐슬>을 대하는 작가님의 마음이 해피 엔딩이길 바랐고요. 그 속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무 힘들 거 같았거든요. 20화를 다시 찍어달라는 국민 청원까지 올라왔다는데, 저는 지금의 결말이 맞는 거 같아요. 다 떠나서 저는 노승혜가 바른길로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게 어떤 선택이든 개의치 않을 거라 생각했어요.

노승혜 입장에서는 무엇이든 해피 엔딩이었을 거란 의미인가요?

이혼이든 별거든 가출이든 재결합이든 그게 긍정적이고 바른길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래도 쉽게 풀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차민혁을 좀 눌러줄 수 있어서, 평생을 그렇게 살았는데 드디어 숨통이 트이고 끝나는 거니까.

갑자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노승혜가 오함마를 들고 아이들 방의 방음벽을 깨부술 때가 생각나네요. 그 신이 정말 시원하다고 느꼈거든요.

저는 그 신에서 망치 사이즈가 너무 궁금했어요. 대본상의 지문으로는 그냥 ‘망치로 벽을 친다’였거든요. 그런데 촬영장에서 오함마를 보고 ‘아, 이거구나’ 싶었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딱 그려지더라고요.

막상 오함마를 휘두르는 입장이 될 때는 힘들지 않았나요?

다음 날 좀 힘들긴 했어요.(웃음) 그런데 막상 할 때는 너무 신났죠.

드레스, 셔츠, 베레모 모두 YCH. 구두 마놀로 블라닉.

작품을 끝내고 나면 여운이 오래 남는 편인가요?

남죠. 왜 안 남겠어요.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도 있고요. 게다가 지금은 저를 ‘노승혜’라고 부르는 사람이 길에 천지예요. 성도 안 붙이고 “승혜다” 이러고. 그런데 어떻게 잊겠어요. 좀 시간이 지나야 할 거 같아요.

최근 다큐멘터리 <두 도시 이야기> ‘속초, 원산’ 편의 내레이션을 하셨더라고요. 내레이션에 잘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느꼈어요.

저는 그렇게까지 목소리가 업된 상태로 해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시종일관 해맑고 활기차게 웃으며 해야 하는 거더라고요. 재미는 있었지만 감정 소모가 상당했어요. 끝까지 그런 에너지를 유지해야 하니까. 내레이션도 연기하는 기분이더라고요.

연기할 때와 달리 리액션을 받을 대상도 없으니까.

맞아요. 한 톤을 계속 유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목소리만으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표현한다는 게 흥미롭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저는 처음 봤을 때 외모보다 목소리로 각인되는 사람 같아요. 목소리가 특이하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연기를 시작한 초반에는 목소리가 너무 가늘고 하이 톤인 게 콤플렉스였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나니 그게 그냥 제 것이 되더라고요.

어쩌면 지금까지 배우로서 자리를 지켜올 수 있었던 덕분에 그런 깨달음도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지치지 않고 사는 게 그래서 중요해요. 지치면 끝나요. 그게 배우만 그렇겠어요? 무슨 일이든 다 그럴 거예요. 인간관계도 그렇고, 일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재미있고 좋아한다고 느껴야 해요.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게 점점 없어지잖아요. 계속 궁금해지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거 같아요. 그래야 삶이 풍요로워지더라고요. 시간도 빨리 가고.

그렇다면 연기는 재미있게 느껴져서 할 만한 일인가요?

재미있기만 하면 정말 재미있게 느껴질까요? 고난도 있고 스트레스도 받지만 그걸 현명하게 넘기면서 성숙해진다고 느낄 때 정말 행복할 거예요. 모든 일이 그런 거 같아요.

결국 재미있기만 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맞아요. 어려운 일이 재미있어요. 안 되니까 더 해보고 싶어지고요. 그런데 왜 자꾸 노인네처럼 말하게 만들어요? 저 아직 젊다고요.(웃음) /글_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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