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 엄홍식 그리고 나 2편

유아인이라는 느낌.

스틸 케이스, 스틸 브레이슬릿, 옐로 골드 베젤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까르띠에. 티셔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데님 바지 헤리티지 플로스. 운동화 컨버스.

스틸 케이스, 스틸 브레이슬릿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까르띠에. 재킷, 셔츠, 바지 모두 캘빈클라인 진.

“연기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이다.” 이창동 감독이 <밀양> 촬영장에서 연기 연출을 하면서 전도연 씨에게 강조했던 말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밀양> 현장에서는 전도연 배우보다도 송강호 배우의 연출에 더 애를 썼다고 들었어요. 그래야 송강호를 마주한 전도연의 리액션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 <버닝>도 연기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이라는 이창동식 연출의 어떤 성취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버닝> 역시 그런 면이 컸던 것 같아요. 유독 대사가 없어요. 어떤 행위 자체를 많이 안 해요. 어떤 공간이나 사람이나 상황을 만나게 되는 인물의 리액션을 전적으로 드러내는 데 집중해요. 아니, 리액션도 아니죠. 리액션이라는, 반응이라는 말 자체가 표현에 대한 강박을 주거든요.

그렇죠.

이 사람이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강박. 리액션을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결국에는 표피적인 액션을 하게 되기 마련이에요. 이창동 감독님은 그것조차도 걷어내고 싶어 했어요. 완전히 배제시켰죠.

배우에게 액션을 하지 말라 하고, 의식적인 리액션도 하지 말라 하고.

저는 그게 되게 좋았어요. 수많은 현장이 약간의 과잉된 표현을 원해요. 특히 드라마 현장에서는 더 하죠. 저는 사극도 많이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선을 넘는 연기를 했던 거 같아요. 잔소리를 안 들으니까.

스스로 과잉이라는 걸 알면서도.

뻔뻔해진 거예요. 그 상태로 그냥 빨리빨리 오케이 받고 집에 가고 싶은 게 목적이니까요. 그러니까 막 가타부타 말 없이 표현하고 그랬죠.

촬영장에서 으레 해달라는 걸 한 거군요.

해달라고도 안 한다니까요. “좋습니다, 좋습니다.” 이러죠. 저는 좋지 않은데도 그냥 오케이가 나면 또 그런 거니까.

핑크 골드 케이스, 진회색 앨리게이터 가죽 스트랩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까르띠에. 스웨트셔츠 아티팩츠 by ETC 서울. 데님 바지 리바이스. 벨트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그러면 배우의 몸은 연기를 하는 기계로 전락하게 되잖아요. 특정 감정을 표현하는 기계.

저는 원래 감정을 절제하는 걸 좋아해요. <버닝>을 하면서 배우 생활 초창기의 작품들이 생각났어요. 그때 다들 저한테 조금 더 하라고 했거든요. 드라마 현장에서도 그랬어요. “조금 더 해.” “왜 이렇게 덜 해?” “좀 더 표현해.” 항상 이런 디렉션을 들으면서 살다가 어느 순간 저 스스로 그걸 넘어선 거예요. 넘어섰다는 게 긍정적인 넘어섬이 아니죠. 사실 과잉된 그 순간은 굉장히 이질감이 들고 부대끼고 부담스러워요. 스스로도. 그런데도 그렇게 끌고 갈 수밖에 없어진 거죠.

과잉이 돼버린 작품을 물어봐도 될까요?

<최강칠우>예요. 그게 아마 첫 사극이었을 거예요. 전 20대 초반의 나이였고. 굉장히 선 굵은 악당을 연기해야 했죠. 제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연기하기는 어려웠어요. 장르적으로도 그렇고 캐릭터적으로도 그렇고. 유아인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커다란 선을 넘어서는 힘을 요구하는 작품이었고요. 쉽게 말해 오버해주길 원했고요. 엔딩에서는 막 옆을 휙 돌아보면서 끝내야 했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연기나 사실적인 연기와는 거리가 먼 게 아닌가 싶었어요.

어느새 알아서 그걸 하고 있었던 거네요.

그냥 적절하게 현장에 적응해버린 거죠. 현장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에 집중하고 대응하는 법을 익혀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예 현장이라는 것 자체에, 연기라는 것 자체에 환멸을 느낀 적도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다 <밀회>에서 안판석 감독님을 만나고 그 후에 류승완의 <베테랑>과 이준익의 <사도> 등의 흐름을 거치면서 내 몸을 다르게 쓰고 내 자세를 달리하는 방식을 조금씩 트레이닝하게 됐죠.

스틸 케이스, 스틸 브레이슬릿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화이트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 화이트 골드 에크루 드 까르띠에 브레이슬릿 모두 까르띠에. 베스트, 셔츠 모두 메종 마르지엘라. 데님 바지 헤리티지 플로스. 운동화 닐바렛.

그러다 이창동의 세계와 만났어요. 이창동은 이런 시대에 왜 그렇게 느리게 영화를 찍는 걸까요?

저마다 취향 차이가 있겠지만 제 취향으로는 너무 좋았어요. 그게 옳다고는 말 못 하겠어요. 이창동이 옳고 이창동의 작품이 옳다는 식으로 뻔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단지 그건 이창동의 방식이고 저와 굉장히 잘 맞는 방식이라는 거죠.

저는 이창동이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영화는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다들 영화라는 미디어를 이용하려고만 들죠. 더 재미난 스토리텔링을 하려 들고 더 화려한 볼거리를 보여줄 궁리만 하죠. 이창동은 영화라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해요.

그건 결국 느낌이죠. 영화도 텍스트로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요. 텍스트조차 마찬가지라고 전 생각해요. 저는 글을 쓸 때도 그렇게 다가가거든요. 정보를 줘서 읽는 사람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어떤 느낌을 통해서 따라오게 만드는 그런 거. 누군가 반발할지언정 제가 주려는 느낌은 전해진다고 생각해요. 전 글도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이창동은 영화로 느낌을 전달하려고 애쓰죠. 더 진정한 소통을 하려고. 유아인의 글에서도 같은 게 느껴져요.

제가 유난히 좀 그렇게 쓰죠. 그렇게 쓰는 걸 좋아하고. 다들 안 그러니까.

저희는 기자니까 사실과 논리로 글을 써요. 하지만 유아인이 글로 표현하려는 건 사실과 논리가 아니라 감정과 느낌이잖아요. 추상화처럼.

느낌이라는 건 너무 뭉뚱그려져 있어요. 선명한 것도 아니고. 물론 아주 선명한 느낌도 있지만 인간이 가진 어떤 느낌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빨간색을 보고도 ‘이건 빨갛다’라는 단 하나의 느낌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이 시대는 저마다의 느낌이라는 부분에 대한 각성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 시대의 인간상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요. 이 시대의 인간상을 표본화하고 단순화해놓고 그들에게 먹혀드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만 너무 잘하죠. 하지만 이 시대의 인간들이 함께 호흡하면서 어떻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느끼고 그런 느낌들이 모여서 우리를 이루고 전체를 이루고 미래를 이루는지에 대한 인식은 적어요. 다들 그걸 그냥 놓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든 하고 싶나요?

옐로 골드 케이스, 옐로 골드 브레이슬릿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핑크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 핑크 골드 에크루 드 까르띠에 브레이슬릿 모두 까르띠에. 티셔츠 산드로 옴므. 베스트 식스 리.

저는 사람들의 느낌을 깨우고 싶어요. 나를 통해 어떤 느낌을 받고 각자 스스로 자신의 느낌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들이 제 영화를 보는 관객이든, 인터넷에서 저를 팔로하는 사람이든, 악플러든 말이에요. 저는 저에 대한 판단에 대해 많이 무감각해진 것 같아요. 그들이 어떤 느낌을 가졌는지에 더 몰두하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조금 편해진 부분도 있어요.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기획한 조안 코넬라의 전시가 아주 재미있겠던데요.

조안 코넬라는 우리 시대의 SNS 중독에 대해 가차 없이

비판하죠.

유 비판이 아니에요. 뭔가 부정적인 걸 작품에 담아내면 비판 의식을 가졌다고 쉽게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그걸 얘기한 것뿐이죠. 무언가 인간의 폭력성이나 이 시대의 흉포한 현상을 언급한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비판이라거나 이러지 말자는 식의 계몽적인 의미는 전혀 아니거든요.

그냥 표현하는 거죠.

그런 게 있다는 걸 보여줘서 사람들이 뜨끔하게 만드는 거죠. 이것도 그냥 느낌이에요. 뭔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다거나 선악을 나누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 균형의 양극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그냥 꺼내는 것 같아요.

맞네요. 조안 코넬라는 사람들의 사회적 가면을 슬쩍 벗겨요. 사람들의 가면이 가짜라고 비판하면 절대 안 벗겠죠. 그냥 사람들의 위선을 툭 건드리면 그 가면이 살짝 벗겨지죠.

맞아요. 스스로 벗게 만들죠. 벗기지 않아요. 조안 코넬라의 작품에 공감하는 순간 스스로 가면을 벗는 거예요. 그게 텍스트로 설명되거나 정확한 내러티브로 표현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틀림없이 반복되는 조안 코넬라식의 단순화된 내러티브는 있어요. 그런데 조안 코넬라의 작품에 공감하려면 보는 사람도 스스로 내밀한 세계를 가져야만 해요. 자기가 그런 폐부를 가져야 공감할 수 있죠. 그게 있다면 공감 자체가 예술이 되는 거고, 관객의 가면을 벗기는 게 아니라 스스로 벗게 할 수 있는 거죠.

나도 모르게 공감해버리는 것, 그것이 예술적 순간인 거죠.

공감하는 순간 자신을 인정하게 되겠죠. 그게 세상을 인정하게 되는 거고요. 우리는 맨날 TV를 보면서 꿈을 찾고 아름다운 세상을 찾겠다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죠. 하지만 사실 이 세상이 얼마나 엿 같은지, 인간이 얼마나 이중적인지, 위선적이라는 말조차도 못 하게끔 만드는 세상과 인간의 모습을 보죠.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무언가를 봐요. 오히려 그래서 전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해요. 너무 복잡하죠. 입체적이고 얽히고설켜 있고. 그런 세상의 모습을 풀어가는 조안 코넬라가 흥미롭더라고요.

스튜디오 콘크리트 멤버 중에서 조안 코넬라 전시를 가장 하고 싶어 한 사람이 유아인이 아니었을까 짐작했습니다.

저도 처음 얼핏 봤을 때는 그냥 재미있다거나 공격적이라거나 비판적이라는 식으로 접근했어요.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게 작가의 의도가 아닐 것 같았어요. 작품을 보면서 나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조안 코넬라는 그냥 느낌을 보여주는구나 싶었죠.

스틸 케이스, 스틸 브레이슬릿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워치 까르띠에. 가죽 재킷 WWWM. 슬리브리스 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데님 바지 리바이스.

유아인은 스스로 가면을 쓰는 배우이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가면을 벗기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스스로도 가면을 쓰고 살고 있다고 느끼고, 사람들 모두가 가면을 쓰고 있다고 느껴서일까요?

우리는 위선적이고 위악적이죠.

대중 앞에서 유아인은 차라리 위선적이기보단 위악적이길 선택한 게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 모두 나를 연기하면서 사는 거죠. 심지어 옛날에는 집 밖에 나서는 순간부터 지금 내가 연기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혼자 있을 때조차 연기해요. 나는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구와 괜히 우아하게 음악 틀어놓고 집에서 차 한잔 마시다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빵 터진 적이 있어요. 지금 우리 연기하는 거 맞지, 그런 느낌. 연기라기보다는 역할을 플레이하는 것 같아요, 우린.

그게 불편해요?

스스로 이질감이 들 때가 있죠. 내가 쓴 가면에 대해. 벗어도 벗어도 계속 가면이 나오는 느낌? 많은 사람들이 그 가면을 벗거나 덧씌워가는 작업을 통해서 나라는 개념에 접근하죠. 작가들은 그걸 통해서 창작을 해나가고요. 다만 그럴수록 진짜 나에게 더 다가가는 것도 같지만 더 멀어지는 것도 같아요. 추구할수록 멀어지는 기분. 전 그냥 어색한 것 같아요. 그냥 어색하게 이 도시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어색하게 있다는 느낌도 들어요.

언제 가장 안 어색한가요?

어떤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이 아닐까요. 영화나 TV를 보다가 빠질 수도 있는 거고, 어떤 일에 몰두하다가 빠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런 순간에는 정말 나를 잊는 거니까 나와 세상 사이의 어색함도 잊게 되는 거네요.

그렇죠. 반대로 선명하게 나와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요새는 더 힘든 게 뭐냐면요, 다른 사람들이 나라는 존재를 너무 강하게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내가 기침만 한 번 해도 나와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그걸 너무 크게 받아들여요. 어쩔 수 없겠죠. 배우란 그런 존재니까. 내 존재 자체가 타인에게 부담을 주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요새는 친구들도 잘 안 만나고 집 밖에도 잘 안 나가요. 뭔가 불편해졌어요. 한때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갖고 싶었어요. 손짓 한 번으로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 이제는 그런 게 편하지가 않아요. 어색해요.

남을 어색하게 만드는 너무 큰 내가 어색하다.

어색해요. 세상 진짜 어색해요. 다들 뭔가 어색한 것 같아. 어색한 연기를 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어색함을 느낄 줄도 몰라요. 내가 쓰고 있는 게 가면이 아니라 진짜 내 얼굴이라고 믿고 의심조차 하지 않으니까.

지금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워요. 예전에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전 지금 이렇다고 얘기했어요. “어차피 정답 같은 건 없어요. 혼란을 겪는 중이에요.” 이렇게 안전장치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마구 말했어요. 지금은 그런 것에 대해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요. 더 잘 전달하고 싶고, 더 잘 느끼게 하고 싶어요. “유아인은 연단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이런 게 아니라. “쟤 정말 시끄럽게 떠드는데 그래도 매력적으로 떠드네.” 이 정도도 아니고. 그냥 내가 표현하는 것의 느낌을 더 잘 살리는 일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지는 것 같아요.

진짜로 진짜가 되고 싶은 걸까요?

전 사실 죄의식이 있어요. 과거의 나를 보면 그 모든 것이 주입된 욕망 탓이었거든요. 그걸 보면 내가 보수적인가 싶기도 해요. 그냥 이 시대는 그런 건데. 사실 나도 왜 이렇게까지 살아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왜 잘나가야 되고, 왜 주인공을 해야 하고, 왜 계속 집을 넓혀나가야 되는 건지.

내가 그런 욕망을 추구하거나 그런 욕망을 남에게 주입할 때 죄의식이 들죠. 저도 그래요.

이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자꾸 날 쳐다보면, 사실 연예인병에 걸리게 돼요. 굳이 그걸 안 하겠다고 애쓰는 것도 어쩌면 부대끼는 일이죠. 예전에는 당신이 나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깨주겠다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막 헤집고 들어가서 제 진짜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어요. 요새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많이 안 하려고 해요. 절 부담스러워할 거면 하고 미워할 거라면 하고 아니면 말라고. 그러든 말든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기형도 시인의 <입속의 검은 입>이라는 시를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그 시를 느껴보려고 노트에 한번 써보았네요.

그냥 느껴야죠. 기형도 시인의 시를 읽으면 내가 그 사람이 된 느낌이 있죠. 그 이상 뭐가 있겠어요. 어떤 단락이 좋고 어떤 부분이 좋은지 설명하는 건,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느낌을 갖게 하고 판단을 보류하게 하는 언어예요. 요새 제가 SNS에서 ‘느낌을 느끼기’ 같은 말을 많이 했어요. 인터뷰를 통해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네요.

뭘요?

그냥 좀 느끼려고 했으면 좋겠어요.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뭔가 편들고, 이게 맞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이렇게 생각해야 하고 저렇게 봐야 하고, 다들 여기에 미쳐 있는 것 같아요.

느낌을 망각해버린 세상.

사람들은 이제 자기 스스로 느끼려고 하지 않아요. 평론가들을 그렇게 욕하면서도 또 다들 누군가 대신 판단해주고 대신 느껴주기를 원하죠. 타인의 시선을 수용하면서 자신이라는 퍼즐을 만드는 것 말고, 어린 시절처럼 좋은 건 좋고 싫은 건 싫은 그런 느낌이 중요한데.

유아인에 대한 사람들의 느낌도 마찬가지 같아요. 진짜 유아인을 느끼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마주한 파편화된 정보로 유아인을 판단하죠.

내가 본 수많은 것 중에서 그게 내 기분과 맞아서 시 하나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그게 유아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가 되는 식이죠. 사람들은 내가 제공한 단편들을 통해서 유아인을 바라보면서 퍼즐을 만드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기형도의 시가 유아인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걸 보고 제가 그랬네요. 사실 인스타그램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단편적인 느낌만을 유통시키는 미디어 같아요. 가짜 느낌들.

인터넷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많은 걸 사람들에게 제공해요. 요새 애들을 보면 종족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요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인터넷을 접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실제 세상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세계를 접해요. 직접적이지 않은 경험을 통해 너무 조숙해지고 너무 성장해버리고. 하지만 삶은 따라잡지 못하고. 머리에는 피가 너무 빨리 마르는데 내가 속해 있는 현실은 너무 이질적인 거죠. 저는 제 조카 같은 아이들이 좀 더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시대에 영화라는 미디어의 중요성과 책임감이 더 커지는 것 같아요. 좋은 연출가와 배우가 만든 영화를 극장에서 보면 적어도 사실적 체험의 근사치까지는 갈 수 있으니까요. 인터넷과 달리 영화는 실제 체험에 가장 가까운 느낌 그 자체를 경험하게 해주는 유일한 미디어 같아요, 이제는.

요즘 넷플릭스 영화가 영화인가라는 논쟁도 있잖아요. 또 한편 생각해보면 극장에서의 관람 경험이야말로 영화라는 매체의 고유한 특성 중 하나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게 최대치의 시청각 관람 시설에서 한 편의 영화를 시작부터 끝까지 관람하는 영화의 고유한 특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억지로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지켜질 거 같고.

결국 다시 이 대목에서 이창동 이야기로 돌아가겠네요. 그래서 지금이야말로 영화감독들이 영화라는 미디어의 속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한때는 종이 잡지 읽기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체험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을 내려놓았어요. 화보를 종이로 보든 스크롤링으로 보든 인스타그램으로 보든 좋은 건 여전히 좋은 거고. 감성은 여전히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봐봐요. 종이 매체도 어느 때는 최신의 매체였겠죠. 이게 대중화되면서 이전과 이후의 인간상을 완전히 바꿔놨을 거예요.

맞아요. 완전히 바꿨죠.

그 무렵에 사람들은 종이를 보면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인간이 좀 돌아도 다니고 자기 손으로 만져도 보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남의 느낌을 종이 속 텍스트로만 얻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요. 당연히 시대는 변할 거고 인간도 변할 거예요. 이 안에서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지켜질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것에 대해 좀 더 많이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꾸 뭉뚱그려서 느낌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어느 시대에 어떤 기술을 누리든 저는 그 느낌이야말로 언제나 통용되는 인간성의 핵심이 아닐까 싶어요.

유아인 씨처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자기주장을 계속하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주장 안에 있지 않고 주장이라는 행위에 있어요. 저는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기를 스스로 선택했어요. 그게 나한테 재미있다면 그것이 그냥 이 세계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인 거죠. 그냥 뭔가 다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행동할 때, 뭔가 그냥 다르게 춤추는 애라는 느낌을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세상과 마찰해야 나를 보여줄 수 있잖아요. 주장을 해야. 이제까지 유아인은 분명히 수사의 현란함과 주장의 정교함으로 그런 마찰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원하는 말을 해주고 살아가는데.

요즘은 왜 나는 그걸 못했을까 싶을 때도 있어요. 꼭 그런 말을 해야 내가 나인 건 아니거든요. 어차피 미디어에 비쳐지는 건 내 껍데기고 파편이고 JPG이고 TXT인데. 일상에서나 집에서나 친구들과 있을 때 진실한 나라고 생각하는 나를 굳이 미디어에서 표현하고 드러낼 필요가 있었을까, 왜 굳이 그랬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그걸 한다고 내가 지켜졌던 것도 아닌데.

요즘은 뭘 할 때 가장 편안한가요?

요새는 안 편해요.

세상이 어색하니까.

그냥 어떤 가면을 하나 쓰고 어떤 시기를 딱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임해야 하는 것 같아요.

예의 바른 유아인 연기 버전 1. 이런 건가요?

혹은 자유분방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아인. 이런 것도 다 내가 만든 것이거든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뭘 굳이 자랑해요? 어디에 자랑해요?

나 스스로에게. 내가 나를 격려하는 거죠.

‘이렇게 살면 돼, 홍식이.’ 이런 생각은 하죠. ‘옳아, 맞아, 잘 살았어.’ 이런 생각은 아니고. ‘어차피 이럴 거니까 그냥 이러고 살아. 그냥 좀 더 네 호흡을 느끼면서. 네가 숨 쉬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살아’ 이런 것에 가까워요. 명상을 조금 했거든요. 거기서 말하는 것도 그런 것이더라고요. 옛날에는 ‘내가 옳고 내가 맞으니까 난 이렇게 살면 된다’에 가까웠어요. 인터뷰도 그렇게 했고. 미디어에도 그렇게 비쳐지려고 나 스스로 그렇게 플레이했던 것 같아요. 이게 좀 더 멋있다 싶어서. 내 눈에 멋있어 보이려고 한 거죠. 정답만 이야기하고 원하는 것만 던지는 플레이가 그다지 멋있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멋있는 나를 내려놓고 벗어던진 지금, 유아인 혹은 엄홍식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나요?

나는 없는 것 같아요. 나라는 것이 없어도 나로 살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유아인은 내가 없어서 내가 오히려 많다.” 이창동 감독이 했던 말인 것 같은데.

이창동 감독님을 만나면서 내가 없는 나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같아요. 그래서 음이렇게 침묵 속에서 멍해지기도 하고. 원래 저는 내가 너무 있는 스타일이었는데. 어쩌면 진짜 내가 있을 곳이 없으니까 그렇게 주장했던 건지도 모르죠.

유아인은 왜 그렇게 정체성을 탐구하고 탐닉할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나를 굉장히 주장하고 표현하고 드러내고 찾아내는 사람이에요. 이전에는 여러 행동으로 나를 찾고 만들고 내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어요. 물론 앞으로도 그런 행위는 계속 이어지겠죠. 하지만 이제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요. 혹은 자기 자신은 없다고 느끼거나. 그게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이 시대에 존재하면서 해야 하는 일 같아요. 아니, 그래야 그나마 재미있을 것 같아요.

커버스토리이기는 하지만 이것도 엄연한 듀오 인터뷰니까, 늘 하는 마지막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네요. 행복하십니까?

(박장대소) 아, 왜 이래. “왜 이래.” 이걸 답변으로 하죠. “왜 이러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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