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 우희

천우희는 해내고 싶다. 해낸다.

터틀넥 모어 올 레스.

이번 영화 <우상>은 <한공주>에 이어 이수진 감독과의 두 번째 만남이죠. <한공주>는 천우희 배우의 첫 주연 데뷔작이자 동시에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이고요. 어땠나요?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구면이라 오히려 편했으려나요?

영화 촬영이 다 끝나고 감독님께 문자를 보냈어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어느 날 새벽에 갑자기 이렇게 보냈어요. “감독님, 저는 감독님이 진짜 제일 힘든데 제일 편해요.”

제일 힘든데 제일 편하다….

외적으로 대하는 게 편하다기보다 연출자로서 감독님을 많이 존경하거든요. 감독님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선이 저와 비슷한 것 같아서 그게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번에 천우희 배우가 나온 작품들을 다시 한 번씩 봤어요. 그런데 두 작품은 영 못 보겠더라고요.

하나는 <한공주> 맞죠?

맞아요. 그리고 <곡성>.

<곡성>은 무서워서.(웃음)

둘 다 다시 보기 어렵죠.(웃음)

<한공주>는… 2013년에 개봉하고 나서 1년 후쯤 혼자 봤는데, 그때 공주의 모습에 너무 오랫동안 먹먹했어요. 막 아픈 감정 있잖아요. 아직도 선명해요. 다시 볼 엄두를 못 냈어요.

저는 그때 GV를 계속해서 대여섯 번이 뭐야, 그 이상 봤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볼수록 괴롭더라고요. 하지만 불편하라고 만든 영화니까요. 불편하라고.

그런데 이야기하는 방식은 아주 담담하죠.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이런 영화 부류는 피해자를 앞세워서 자극적으로 만들거나 감정적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한공주>는 한없이 차갑잖아요.

이수진 감독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을 말씀하시니까 특유의 그 담담함이 떠오르네요.

맞아요. 그 시선이 저는 감독님의 장점인 것 같아요. 아주 굉장히 냉정하게, 저 멀리서 바라보는.

제일 힘든데 제일 편하다고 했더니 감독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웃음) 그러시더니 되게 힘이 되는 말이라고. 그때 감독님이 계속 후반 작업하느라 안 주무시고 계셨더라고요.

이수진 감독으로서는 첫 장편 데뷔작 <한공주> 이후 6년 만의 차기작이고 이번에도 천우희 배우가 주연이길래 당연히 감독의 콜이 있었겠지 싶었어요. 그런데 련화 역에는 천우희밖에 없다고 오히려 설경구 배우가 추천했다면서요.

저도 처음 이야기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알기로는 감독님이 처음에 저를 생각하시기는 했는데 그때가 <곡성>을 개봉한 때였어요. 감독님이 이 친구가 센 역할을 너무 자주 하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를 하셨대요. 그래서 다른 배우를 고려해야 하나 하고 있을 때 경구 선배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우희가… 우희… 우희가…” 그러셨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감독님이 다시 원래 생각대로 저를 주신 것 같아요.

 

니트 메종 마르지엘라. 슬립 원피스 제곱.

설경구 배우와는 영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 만난 거죠?

네, 거기서 뵀어요. 그 작품도 사실 경구 선배님이 저를 추천하셨어요.

원래 친분이 있었어요?

아뇨, 없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시사회에서 송윤아 선배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송윤아 선배님께 듣기로 경구 선배님이 저를 작품에서 꼭 만나고 싶다고 자주 이야기를 하셨대요. 저야 너무 영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래 제가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를 한번 거절했어요. 원작(일본의 동명 희곡)에 대한 느낌을 깨고 싶지 않아서요. 연극도 보고, 낭독회도 보고, 제가 원작을 다 봤거든요. 그 느낌을 간직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거절했는데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받았더니 경구 선배님이 “할 거지?”(웃음)

정말요?

네.(웃음) 오며 가며 인사는 드렸지만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런 적은 없었거든요. “할 거지?” 하시길래 “선배님, 생각 좀 해볼게요” 그랬어요.

거기다 대고 또 생각 좀 해본다고 그랬어요?(웃음)

아니, 연락 주셨다고 ‘무조건 해야지’ 그건 아니니까. 저도 제 고집이 있으니까.(웃음) 그래서 생각 좀 해보겠다고 했더니 “아니야, 아니야. 할 거지?” 계속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거절을 하겠어요. 그래서 하게 됐죠. 돌이켜보면 이 작품 안 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선배님께 너무 감사해요.

왜요? 아직 개봉 시기도 미정인 작품인데 궁금해지네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 나오는 주연 선배님들 평균 연령이 55세 정도 돼요.(웃음) 저만 되게 막내이고. 같이 한 감독님과 선배님들이 정말 좋았어요. 지금까지 한 작품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너무 훈훈하고 감사했던 현장이라서 내가 이걸 단순하게만 생각해서 거절했으면 어떡할 뻔했지? 이 좋은 시간들과 좋은 사람들을 몰랐으면 어쩔 뻔했을까 싶더라고요. 경구 선배님도 그렇게 만났는데 <우상> 때도 “우희, 우희” 하셨다는 게 감사하죠.

왜 “우희, 우희” 하셨을까? <우상> 기자 간담회 때도 한석규 배우가 천우희 씨가 무슨 말만 하면 기특하다는 듯이 아주 흐뭇하게 바라보시더라고요. 어떤 후배길래 저렇게 아낄까 싶을 정도로.

저는 모르죠.(웃음) 모르겠지만 <우상>에서 선배님 두 분과 제가 마주치는 신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게다가 각자 다 힘든 역할이잖아요. 그런데도 현장에서 뵐 때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해주시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하기도 했고, 두 분이 저를 정말 편하게 대해주셔서 저도 편하게 했어요. 물론 깍듯하게 예의 지키고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려워하지도 않았고요. 그냥 뭐랄까, 나이 조금 차이 나는 오빠처럼 제가 잘 따랐죠. 워낙 잘 대해주셨고요.

어렵게 대하면 어려워지기도 하잖아요.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것도 능력이에요.

불편하게 만드시지도 않았어요. 두 분 다. 석규 선배님 같은 경우는 항상 저희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 배우로서의 자세나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실 이야기해주는 일이 뭐랄까, 귀찮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석규 선배님은 본인을 드러내는 것에 어려움이 없어요. 본인이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셔서 저 또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랬어요. 석규 선배님이 마음을 많이 열어주시는구나, 좋았죠. 감사하고.

마음이라는 것은 상대방이 받아준다고 느꼈을 때 더 열게 된다고 생각해요.

맞아요. 스스럼없이.

연기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던가요?

조언이라기보다 본인이 고민했던 것들을 이야기해주셨어요. “우희야~ 몰입 그만해라” 그러시고.(웃음)

몰입 그만해라? 오히려 몰입하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웃음)

너무 힘든 작품을 많이 한 걸 보는 게 안쓰러우셨나 봐요.(웃음) 물론 대견하게도 생각해주시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맞는 말랑말랑한 것을 좀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러시는 거죠.

아니, 그런데 실제로 한석규 배우가 천우희 배우의 모든 작품을 다 챙겨 보셨다면서요.

그러니까요. 아니 그걸 어떻게 다 보셨지? <한공주> <우아한 거짓말> <카트>…. “아니, 선배님 <손님>은 어떻게 보셨어요?” 이럴 정도로, 제가 막 신기할 정도로 다 보셨어요.

원래 작품을 자주 챙겨 보는데 거기 천우희 배우가 출연한 게 많았던 걸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저 친구가 나오니까 이걸 꼭 봐야지’ 한다기보다 원체 작품을 많이 보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제가 나온 작품을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러니까요. 무언가 언급한 작품도 있었어요?

<해어화>를 되게 좋아하세요. “우희야~ <해어화> 얼마나 좋니” 그러시면서.(웃음) 작품을 떠나서 그냥 저의 그런 모습, 제 나이대에 맞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좋았다고 그 이야기를 자주 하세요.

정말 당사자한테 물어야 정확하겠지만, 적어도 같은 배우로서 ‘함께 연기해보고 싶다’, ‘그 작품 잘 봤다’ 하는 말보다 더한 이유가 있을까 싶네요.

인복이 있었어요. 정말. 그냥 좋은 분들을 만났어요.

아까 차마 <한공주>를 또 못 보겠더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결국 다시 보기는 했어요. <우상>을 보고 났더니 ‘아, <한공주> 다시 봐야겠다’ 싶더라고요.

<우상>은 더 갈기갈기 찢어서요?(웃음)

<우상>도 봤는데!(웃음) 무엇보다 6년 전의 천우희 배우를 보고 싶었어요. 그사이 많은 작품을 했죠. 배우로서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의 감독님을 다시 만났는데 그사이 어떻게 변했을까, 변한 게 있을까, 배우 스스로 무엇을 느꼈을까, 그 시작점을 다시 봐야겠다 싶었어요.

저도 감독님한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었나 봐요. 마치 부모에게 자식이 ‘나 이만큼 컸어. 나 잘 컸지? 나 잘할 수 있겠지?’ 하는 것처럼. 그런데 잘 자랐는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우상>을 찍을 때 너무 의욕이 넘쳤어요. 초반에. 왜냐하면 <한공주>와 결이 다른 작품인데 감독님은 나에게 또 기회를 주셨고 나는 그에 마땅히 훌륭한 연기를 해야 된다, 그리고 잘해내고 싶다, 그랬어요. 또 얼마나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나를 또 얼마나 잘 이끌어주실까. 의욕이 넘쳤는데 련화라는 역할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강렬하죠. 련화는 강렬해요. 관객으로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상>은 각자의 우상을 좇는, 맹목적으로 무언가 믿다 보니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는 채 쫓고 쫓기게 되는 인물들을 그리잖아요. 실제로 한석규 배우가 연기한 구명회나 설경구 배우가 연기한 유중식은 그런 모습이 보여요. 우상으로 삼는 것에 대한 명분이 있죠. 그런데 련화는 달라요. 련화는 우상이 없는 인물 같달까요. 오히려 스스로 우상이 된 인물 같았어요.

맞아요. 게다가 어떠한 사건에 의해서 이 사람 성격이 만들어지고 캐릭터가 구축이 됐다, 이런 전사가 보이지 않잖아요. 련화의 인생 전반을 느끼면서 오직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보여줄 수 있는 신은 몇 장면 안 되다 보니까 고민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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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게 고민의 지점이었을 것도 같아요.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명분이 명확하게 노출되지 않은 것이기도 하니까요.

맞아요. 저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서 시나리오가 무조건 1번이거든요. 거기서 단서를 찾는 건데, 이번에 찾은 단서는 사실 관객 입장과 똑같았어요. 시나리오 속에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련화는 어떤 인물이더라’ 이런 말들로 상상할 수밖에 없었죠.

어떻게 상상했나요? 물론 영화를 보면 련화가 지나온 시간이 읽히지만 실제로 련화를 연기한 배우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해요.

영화에서 련화 언니인 수련이 그런 말을 하죠. 련화는 첩의 딸이라고. 련화는 이름도 없었어요. 이름이 없으니 학교도 못 갔을 테고 아파도 병원도 못 갔을 테고 인간적인 활동 자체를 못 하면서 큰 거죠. 그러니 항상 피해의식이 있었을 것이고 이름을 얻기 위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을 엄청 많이 했겠죠. 그러다 보니 한국까지 흘러왔고. 련화는 수많은 거짓말과 멸시와 하대와 무시를 받으면서 살아왔어요. 그러면서 본인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내가 이렇게 멸시받고 있지만 적어도 너네와는 달라. 거짓말만 일삼는 너희와는 같지 않아.’ 그러니까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고 솔직할 수 있는 거겠죠. 그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어요. 저 스스로가요. 그냥 무지막지하게 무섭고 무자비한 인물이 아니라 정말 처절하고 불쌍한 사람인데, 얘도 이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있는 건데, 관객이 이걸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양면적인 모습에 련화가 더 궁금해지죠. 도대체 어떤 속내일까 하고.

그런데 그게 정답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감독님한테 여쭤봤는데 감독님은 항상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이런 식이라서.(웃음) 그래, 내 해석대로 한번 만들어보자 하면서 만든 거죠.

천우희의 해석대로 만든 련화인 거네요.

네. 하지만 감독님이 보시고 아니다 싶었으면 길을 잡아주셨을 테니까.

듣기로는 넘친 의욕을 잘 다스린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많이 괴로웠어요. 제가 현장에서 막 처져 있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현장에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기운받고 막 즐겁게 해요.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분명 부족한 점들이 생각나잖아요. 이번에는 스스로 기대하고 의욕이 넘쳐서 그런지 나 자신에게 실망하는 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욕심부리다 보니까 남들은 “나쁘지 않은데?” 하는 부분도 저는 조금도 용납이 안 됐고, 그러다 보니까 ‘진짜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생각보다 ‘나’ 별거 아니네?

네. 내가. 나 별거 아니구나. 모르겠어요. 그냥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열등감 같은 것에 저도 약간은 동화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촬영 초반에 막 의욕이 넘치다가 주혁 선배님 일 겪고 나서 전반적으로 나는 영혼을 다 바쳐서 몸이 부서져라 연기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게 배우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까지 해서 남는 게 뭘까.

그때가 그때였군요…. 상실감이 컸겠어요.

네.(인터뷰 중 처음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여기서 이렇게 열심히, 작품 하나를 남기기 위해 진짜 영혼을 다쳐가면서까지 하고 있는데 이게 과연 옳은 걸까. 그런 생각이 련화라는 인물과 겹쳐지면서 련화로서도, 그냥 천우희로서도, 나는 단순하게 행복하고 싶고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내가 원하는 건 별게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지  이런 생각이 모든 걸 지배하면서 갑자기 바닥으로 막 떨어졌어요. 물론 주변에 티는 못 냈죠. 걱정할 수도 있으니까. 혼자 집에 있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어떻게, 좀, 이젠 괜찮은지 묻기가 미안하네요.

그때 농담처럼 제가 그랬어요. 나 이거 7개월 찍었으니까 7개월 쉬어야겠다고. 그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정말 어떠한 차기작도 안 했어요. 못 하겠더라고요. 그 마음이 물론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우상>에도 영향이 있었겠죠.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역할을 입체적으로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어요. 지금 지나와서 말이지만요.

그런 적은 처음이죠?

처음이죠.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의욕 자체를 잃어버린 건 처음이었어요. 연기에 대한 흥미가 딱 떨어지면서, 내가 이걸 왜 해야 할까 싶고, 거의 작년 한 해 동안 좋은 캐릭터들, 좋은 작품들, 좋은 감독님들의 제안이 있었는데 말은 못 하겠고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거절하는 입장이었고, 물론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정말 못 하겠더라고요. 힘이 안 나서. 내가 만약 억지로 연기를 했으면 그걸 보는 저는 또 그만큼 아쉬울 것이고, 내가 왜 저런 실수를 했을까, 왜 연기를 아쉽게 했을까, 또 저를 자책했겠죠?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쩌면 그 암흑을 결국에는 련화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같네요.

그럴 수도 있고요. 조금 지나고 나서 보니까 제가 연기나 캐릭터를 대하는 자세가 변한 게 없지 않아 있더라고요. 저는 작품을 할 때 아주아주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연기할 때도 감상적으로 빠지지 않으려고 되게 경계하는 편이거든요. 연기는 연기할 때만 하고, 평소에는 그냥 나 개인적인 천우희로 살려고 분명한 선을 그었어요. 감정도 딱 현장에서만 갖고 있고 현장을 벗어나면 그냥 일상으로 돌아오는 걸 완벽하게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그런 일을 겪으면서 뭐랄까, 배우에 대한 마음이랄까 자세가 좀 달라졌어요. 이해심이 더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요.

배우에 대한 마음. 이해심.

저는 연기자로서 자기 감성적이고 자기에 막 심취해 있는 모습을 정말 보기 싫어했어요. 그런 연기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을 한번 겪고 나니까 그것도 나쁜 게 아니더라고요. 그래야 본인이 보호가 되는 것도 없지 않아 있더라고요.

오히려 연기의 감성에 빠져 지내는 게 말이죠?

네. 그동안의 방식이 저를 보호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휩쓸리듯이 휩쓸려가서 아파할 땐 아파하고 나올 땐 나와주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우상> 다음에 촬영한 <버티고>(2019년 개봉 예정)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이건 제가 생각했을 때 완전히 자기 감성적인 연기를 제대로 했어요. 억지로 현장에서의 천우희와 일상에서의 천우희를 구분 짓지 않았어요. 결과물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다른 방식으로 도전해본 게 나쁘지는 않더라고요.

<우상>을 지나오면서 배우 천우희의 변화 지점이 생긴 거네요.

많이 생겼죠. 많이.

그런데 어떤 캐릭터를 맡은 시기 동안 그 감성에 빠져 지내는 것을 그토록 싫어한 이유는 뭐예요? 막 집중해서 연기하다가 끝나면 칼같이 일상의 천우희로 돌아오는 게 오히려 더 불가능한 일 같은데요.

힘들죠. 쉽지 않죠.

애초에 왜 그렇게 견제한 건가요?

그런 연기는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연기는 액션과 리액션이 충분해야 하고 교감해야 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말이죠. 저는 융화도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같이 하는 배우, 스태프, 감독, 그날의 현장, 모든 것이 연기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데 본인의 감성에만 빠져서 연기하는 건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래야만 하는 상황도 있겠더라고요. 왜냐하면 미치고 팔짝 뛸 정도로 상황이 안 되는데도 해야 하고 만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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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로서 연기를 커버해야 하는 순간.

네. 제가 이번에 <우상>에서 눈썹을 밀었잖아요.

잠깐, 그러니까요. 눈썹 민 건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련화의 정면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 보고 깜짝 놀랐어요. 눈을 가렸던 테이프를 한쪽만 뜯은 채로, 그래서 한 눈으로 화면을 쳐다보는데 포스가….

저도 소름 돋더라고요.(웃음)

눈이 좀 달라 보였는데 혹시 분장했던 거예요?

아니에요. 아마 촬영이 고돼서 부은 걸 거예요.(웃음)

그러고 보니 (영화에서 한쪽만 보였던) 오른쪽 눈 쌍꺼풀이 더 얇네요.

제가 짝눈이에요. 저는 제 짝눈을 좋아하는데 순수하거나 착한 역할 할 때는 쌍꺼풀이 좀 더 큰 왼쪽 눈을 쓰고, 강렬한 역할 할 때는 오른쪽 얼굴을 많이 쓰거든요. 약간 양면적인 느낌이 있어서 저는 좋아요.

그렇네요. 오른쪽 눈만 보니까 련화가 보여요.

눈썹 이야기는 시나리오에 있었어요. 눈을 가렸던 테이프를 뜯으면서 눈썹도 뽑힌 설정이라서 다 민 거거든요. 외형적인 변화는 사실 되게 1차원적인 거라 처음엔 조금 겁나도 막상 하니까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어요. 현장에서 눈썹 밀고 막 깔깔 웃고. 어쨌든 그렇게 눈썹을 밀었는데 촬영 7개월 동안 계속 숨기고 다녔어요. 그냥 저 스스로. 제 만족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에게 영화적인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내가 잘 감추고 있어야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저 스스로 되게 힘들게 산 거죠.(웃음)

현장의 천우희와 일상의 천우희의 경계가 흐려진다고 스스로 느끼는 것 같아요.

맞아요.

괜찮은 건가요?

모르겠어요. 이제 받아들여야 되는 걸 수도 있는 거죠.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배우라는 직업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편해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연기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고. 아직은 모르겠어요. 어떤 게 옳다 그르다보다 제게 잘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니까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게 됐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그러게요. 떼려야 뗄 수 없다…. 떼려야 뗄 수 없게 된 거 같아요. 저도 미쳤구나 싶은 게 <우상> 첫 촬영이 달리는 장면이었어요. 뛰어가는 게 CCTV에 보이는 컷인데, 사실 그냥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거든요.

알아요. 막 뛰어가는 장면이 하나 있죠.

저 그거 40, 50번 뛰었어요.

네?

겨울이었는데 그때 또 제가 장염이었거든요. 40, 50번을 뛰는데 오히려 힘이 나는 거예요. 뭔가 기운을 받는 느낌이고, 연기를 한다, 이제 련화를 연기한다, 이런 생각이 드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거예요. 그때 느꼈죠. 아, 나도 제정신이 아니구나.(웃음)

안 지쳐요?

지친다기보다 오히려 발동이 걸린다고 해야 하나? ‘어우, 이제 그만해’ 이게 아니라 ‘한 번 더 가자고요? 알았어. 내가 한 번 더 해볼게. 좋았어’ 이렇게 더 기운을 내는 것 같아요.

이수진 감독이 테이크를 많이 가는 편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보네요. 천우희 배우는 거기에 또 잘 맞는 편인가 보고요.

특화된 걸 수도 있고요, 단련이 된 걸 수도 있고요.(웃음) 이수진 감독님이 현장에서 말이 정말 없어요. 다시 하는 이유도 잘 말씀 안 해요. “한번 다시 해볼까?” 이걸로 끝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감독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일단 제가 “다시 해볼게요” 하고 해요. 그러면 귀신같이 캐치해요. 제가 어떤 의도를 갖고 연기를 하진 않지만 그 상황에 순간적으로 호흡이라든지 감정이라든지 뭔가 디테일이 탁 나올 때가 있잖아요. 그걸 알아채요. 제 마음을 알아주는 거죠. 그러니까 저도 해볼 때까지 해보는 거고.

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그리고 오늘이 지나면 어쨌든 이건 끝나는 거잖아요. 혹시라도 그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까 봐 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거죠. 물론 감독님도 스무 테이크 가도 앞에 거 쓰실 때 많아요.(웃음) 사실 그런 건 본인이, 배우가 먼저 알아요. 저는 OK 컷을 진짜 잘 알아요. 제가 연기하고 나서 ‘OK다’ 그러면 분명 OK가 나요.

모든 촬영장에서 다 맞는 편이에요?

맞는 편이에요.

신기하다. 그만큼 나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네요.

민감하긴 한 것 같아요. 그 순간순간을 많이 느끼려고 해요. 기술적으로 연기하는 거, 기교나 스킬 이런 건 잘 못하는 편이라서 그냥 순간적으로 많이 느끼려고 하거든요. 연기지만 어쨌든 결국에는 진심이잖아요. 그 순간에는 진실로 해야 하니까. 제가 느끼는 것들이 진짜라고 느껴질 때 이건 OK다 싶은 거죠.

40번이고 50번이고 뛰는 건 누가 이기나 보자 이 악무는 악바리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근성이라고 해야 하나. 내 일이니까. 내가 맡은 일이니까. 누구한테 폐 끼치지 않고 그냥 해내고 싶은 마음.

맞아요. 저는 악으로 깡으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는 악도 없고 깡도 사실 그렇게 많지 않은 거예요. 그냥 일반적인 표현으로 악과 깡으로 버텼다고 여겼는데 그런 사람은 아니거든요. 생각보다 겁도 많고. 그런데 그러면 내가 현장에서 그렇게 버틸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돌이켜보니까 평정심하고 이타심인 것 같아요. 저는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충분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 근성의 기저에는 자기 신뢰가 있겠죠. ‘나는 무슨 일을 맡든 적어도 망치지는 않을 애야’ 그런 자신감. 자부심. 신뢰.

그거 없으면 이 일 못 하죠. ‘나는 그냥 이 정도만 하는 배우야’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그 정도밖에 못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특히 예술 분야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제가 천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재능은 있지만, 재능도 단련하고 훈련하지 않으면 퇴보한다고 여겨요. 저는 노력하는 사람인 거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연기를 잘하고 이런 게 아니라, 한 차원 다른 그 이상의 것이에요. 항상. 그런데 그걸 못하니까 괴로운 거고.

단순히 잘하고 못하고 그런 수준이 아닌 그를 뛰어넘는 한 차원 다른 것 말이죠?

네. 그런데 그걸 모르겠어요. 알고 싶어서 맨날 머리 터지게 고민하는데 모르겠어요. 이건 본인 아니면 모르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니야, 좋았어. 괜찮아.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만족을 못 하니?”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죠. 그런데 그 좋은 게 좋은 것만이 아니고 좋은 걸로 끝나면 안 되는 것인 거죠. 저한테는. 좋은 거 이상의 것을 하고 싶고, 해내고 싶고, 찾고 싶고, 그래야 또 더 나은 것이 나올 거고.

그 과정을 피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죠.

답은 없잖아요. 답이 없어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제일 어렵죠.

 

 

니트 메종 마르지엘라. 슬립 원피스 제곱.

드라마 <멜로가 체질> 촬영을 앞두고 있다고요. 한석규 배우 원대로 그 나이에 맞는 작품을 하게 됐어요.

안 그래도 말씀드렸더니 잘했다고, 너무 좋아하시더라고요.(웃음) 3월 말부터 촬영 들어갈 예정인데 드라마는 오랜만이라 떨려요.

심지어 영화 <극한직업>으로 천만 감독이 된 이병헌 감독의 드라마 데뷔작이잖아요. 7월 방영 예정인데도 벌써 관심이 상당하죠.

잘됐죠. 저는 수혜를 받았죠.(웃음)

오랜만에 드라마는 어떻게 하게 됐어요?

제안이 왔어요. 그런데 이것도 거절한 적이 있어요.

거절했어요? 왜요?

그 시기, 모든 작품을 거절했던 그 시기였거든요. 그랬는데 너무 감사하게 다시 제안을 주셨고 지금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되찾아서 하게 됐죠.

두 번이나 제안을 주신 이유는 들었나요?

제가 “저 왜 하셨어요?” 그랬어요. 저한테 왜 주셨지?(웃음) 그랬더니 안 본 얼굴을 보고 싶다고. 사람들은 다 강렬한 이미지라고 생각할 텐데 자기는 이런 자연스러운 모습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저는 그 말이 되게 좋았어요. 안 본 모습. 어쩔 땐 정말 그렇거든요. 내가 했던 것을 또 하길 원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작품이 들어올 때도 많고요. 자기 복제하듯이 연기하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굉장히 여러 가지 것을 할 수 있는데. 다른 가능성을 좀 열어두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걸 봐주시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병헌 감독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셔서 너무 좋았죠.

자기 복제. 동어반복. 자기를 계속 돌아보는 일은 참 중요하면서도 그러기 어려운데 말이죠.

웃긴 표현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배우가 항상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나는 정말 좋은 칼이었으면 좋겠다. 쓰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걸 한 번에 베어낼 수 있는 좋은 칼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무뎌져서 녹슨 칼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런데 저는 그것보다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누에고치이고 내게서 명주실을 쫙쫙 뽑아낼 수 있는 그런 연출자를 많이 만나보고 싶다.(웃음)

연출자가 물레를 열심히 돌려야 하는구나.(웃음) 동시에 이끌어내는 대로 이끌어져 나오는 인물이라고 여기는군요. 자기 신뢰의 연장선이네요.

배우는 좋은 비단과 좋은 양분을 품은, 재능이 있는 사람일 수 있는데 그게 누군가에 의해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좋은 연출자를 만나고 그런 사람들과 호흡하는 걸 항상 갈망하고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수진 감독님은 저와 잘 맞고, 이번에 이병헌 감독님이 해주신 안 본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도 그래서 기대가 돼요.

멜로가 체질이긴 해요?

아뇨.(웃음) 사람을 만날 때 저는 잘 맞춰주기는 해요. 잘 맞춰요. 그러면서도 제 고집이 있는 것 같고. 제가 그렇게 막 모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또 쉬운 사람도 아니고. 모르겠어요.

체질이네요.

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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