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화라는 쟁취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다는 의미 이상의 성취이자 역사. 지금의 엄정화란 그렇다.

엄정화가 새 앨범을 발표했다. 횟수로 열 번째, 즉 10집이다. 엄정화의 새 앨범을 마주하며 먼저 드는 생각은, 실로 오랜만이라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말하자면 약간 뜬금없다는 생각도 든다. 2008년에 발표한 이후로 무려 8년이 지났으니까. 하지만 더 큰 맥락에서 보면 판단은 달라진다. 엄정화는 1993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이후 24년 동안 10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2년에 1장씩 내는 일을 10번 반복했다니 참 오래, 꾸준히 했다. 연예인을 통틀어 엄정화와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은 이경규밖에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엄정화는 지난 연말, 자신의 데뷔 앨범을 내기 1년 전에 태어난 선미와 합동 무대를 가졌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지속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공치사가 아니다. 나는 지금 모든 진심을 쏟아부으며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성실함이나 꾸준함 같은 덕목을 늘 재능의 별책 부록 정도로 생각한다. 오류다. 아무리 양보해도 50 대 50이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가지를 쌓아왔다면 그것 자체가 재능이다. 엄정화는 이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엄정화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플레이어’로서, 그러니까 ‘댄스 가수’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누군가는 지난달에 공개된 엄정화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느낀 감정을 박진영의 무대를 보면서 비슷하게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저 나이에 아직도 춤을 추네.’ 하지만 2018년을 사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 자체가 나태하고 섣부르며 오만하고 폭력적임을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박진영과 엄정화를 동일선상에 놓을 수도 없다. 여성인 엄정화는 박진영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더 다양하고 거대한 악조건하에 놓여 있으니 말이다. 48세의 여성이 춤을 추는 것과 48세의 남성이 춤을 추는 것에 대한 사람들의 (당연하다는 듯한) 차별적인 반응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 면에서 ‘가수를 내려놓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놓을 필요가 없으니까요”라는 엄정화의 대답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그는 여성 댄스 가수를 향한 세간의 한계 긋기와 낙인찍기에 지지도 않을뿐더러,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도 딱히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에게도 ‘증명’의 욕구는 일정 부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정화는 세간의 시선과 평가에 매몰되기보다는 온전히 스스로의 기준으로 결정하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느 한 여성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엄정화에 관한 글에서 그녀의 선택이 존중받을 만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자로서 나이 들어가며 피할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외로이 쳐다보고 있을 때, 같이 가자고 말이라도 걸 듯 무대로, 노래로, 인생으로 두근거림을 주는 엄정화. 날 위로해.”

누군가의 지지를 얻으려면 일단 세월로 증명하는 것이 필요한데, 엄정화는 그 조건을 충족했다. 또 디스코라는 틀 안에서 음악적이든 시각적이든 매번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엄정화는 그 넓은 팔레트를 기반에 두고 앞으로도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엄정화의 음악적 기반이 오래전부터 디스코였다는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디스코의 장르적 특성에 대해서는 박은석 평론가의 말을 인용해보자. “디스코는 1970년대 후반 인기의 절정기에조차 주류 바깥에서 주류와 충돌했다. 흑인, 노동자 계급,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의 도피적 하위문화에서 출발한 디스코는 태생부터가 중산층 백인 중심 사회의 엘리트주의로 웃자란 록 이데올로기에 대한 인종적, 계급적, 음악적 대립 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디스코 장르에서 ‘디바’란 단어는 ‘진보’의 뜻을 일정 부분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표적으로 도나 서머가 그랬다. 디스코 디바들에게 여성과 성소수자의 지지는 활동 기반의 핵심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엄정화가 그동안 한국 게이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게이 퀸’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모든 결과가 이것 때문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엄정화의 그간 행보와 그를 둘러싼 광경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디스코라는 장르의 특성을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엄정화의 ‘디스코 사랑’에 관해 (디스코를 주로 트는) DJ 제씨 유(Jesse You)는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해주기도 했다. “엄정화는 어느 순간부터 일렉트로닉/디스코로 밀어붙이고 있다. 그 세월이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누군가의 지지를 얻으려면 일단 세월로 증명하는 것이 필요한데, 엄정화는 그 조건을 충족했다. 또 디스코라는 틀 안에서 음악적이든 시각적이든 매번 조금씩 다른 시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디스코는 음악의 특성상 변용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러 음악의 팔레트가 되어왔다. 엄정화는 그 넓은 팔레트를 기반에 두고 앞으로도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 엄정화의 새 앨범 테마는 ‘구운몽’이다. 앨범의 총괄 프로듀싱을 맡은 조영철 프로듀서의 말을 빌리자면 ‘고고하면서도 신비감을 지닌 엄정화의 캐릭터’를 소설 <구운몽>과 연결시켰다. 앨범에 참여한 작곡가, 작사가들은 엄정화를 꿈과 환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음악을 완성했다. 구운몽인 만큼 수록곡도 9곡이다. 단, 2016년 말에 4곡을 먼저 공개하고 이번에 나머지 5곡을 공개했다.

무엇보다도 이번 앨범은 큰 맥락에서는 ‘엄정화다움’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어 이번 앨범의 수록곡 ‘Oh Yeah’는 대중에게 생소한 ‘어번 알앤비’라는 장르를 표방하지만 엄정화 특유의 보컬이 이를 단번에 익숙하게 만든다. 이어지는 ‘Dreamer’는 도입부를 듣는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떠나는 기분도 들었지만 결국은 과거와 현재를 세련되게 조합한 노래로 이해됐다. 앨범의 어느 곳에도 우리가 알던 엄정화를 배반하는 시도는 딱히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이 앨범은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새로움을 선사한다. 자기 것을 고수했지만 잠그지 않았고, 트렌드를 흡수했지만 휩쓸리지 않았다. 확실히 은 절묘한 균형 감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에는 조영철 프로듀서의 힘과 별개로 아마 엄정화 본인의 의지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추구하고 싶어서 직접 모든 참여진을 섭외해 완성한 처럼, 또 양현석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연락해 만들어낸 수작 처럼.

흔히 엄정화를 ‘한국의 마돈나’라고 부른다. 감히 어디다 비교하느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나는 엄정화보다 더 적절한 비교 대상이 현재 한국에 있는지 묻고 싶다. “34년 동안 노골적인 성차별과 여성 혐오와 끝없는 괴롭힘과 끈질긴 학대에 맞서며 커리어를 계속해온 내 능력을 인정해줘서 고맙다. 마지막으로, 여성 아티스트는 나이가 들면 안 된다. 나이가 드는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 마돈나의 빌보드 어워드 ‘올해의 여성’ 부문 수상 소감이다. 불현듯 머릿속에 그려지는 미래의 엄정화. 결국 한국의 마돈나가 아닌, 그냥 엄정화.

  • Kakao Talk
  • Kakao Story

Credit

에디터
김 봉현(음악 칼럼니스트)
사진유 영규
출처
29960
본 기사를 블로그, 커뮤니티 홈페이지 등에 기사를 재편집하거나 출처를 밝히지 않을 경우, 그 책임을 묻게 되며 이에 따른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웹사이트 내 모든 컨텐츠의 소유는 허스트중앙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