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 믿음과 인내의 시간

모든 역할을 오디션으로 쟁취했다. 박지현은 자신을 믿는다.

가죽 코트, 바지, 구두 모두 셀린느.

<은주의 방>을 보면서 한참을 기다렸어요. 언제쯤 나오려나.

(시무룩) 저도 기다렸어요.

4회 만에 등장했고,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 분란을 일으킨 깍쟁이 캐릭터.

좀 얄미웠죠? 원작을 보고 너무 악역으로 비쳐질까 봐 걱정했는데, 연기를 하다 보니 착한 아이더라고요. 동정이 가고 연민이 생기면 시청자분들도 너무 미워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좀 미워해도 캐릭터가 매력적이면 좋죠,  뭐.

그래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자 주인공을 질투하는 역할인데, 누구나 한 번쯤은 살면서 남을 시기하고 질투해본 적 있잖아요.

시기나 질투를 당할 것 같지, 시기하고 질투할 것 같지 않은 느낌인걸요?

친구 사이에서는 경쟁의식이 없어요. 둔한 편이라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질투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배우는 어떻게 하게 된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하고는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용기가 생겼어요. 대한민국 학생으로서는 막연히 ‘공부를 잘해야지’가 목표였고, 그 결과가 대학 입시잖아요. 입시가 끝나고 나니 삶의 목표가 사라진 것 같았어요. 무엇이 되고 싶은지 고민하다가 배우를 해볼까 해서 연기 학원을 다녔는데 재미있는 거예요. 학원에서 내부적으로 오디션을 보는데 참관하러 온 회사 관계자가 회사 오디션에도 지원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지원했어요. 재미있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게 쉽지 않은데, 연기는 그럴 수 있는 일 같았어요.

어렸을 때 가족끼리 역할극을 하다가 연기의 재미를 느꼈다고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연기를 제일 잘했던 거 같아요. 병원놀이를 하면서 언니가 죽는다고 죽지 말라고 울고불고, 옷 가게 놀이하면서는 흥정한다고 동생하고 싸워서 며칠을 말도 안 하고. 그때 했던 놀이가 이제 직업이 됐는데,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해도 어려울 것 같아요.

연기를 한 지 이제 1년 됐죠?

아뇨. 훨씬 전, 스무 살에 시작했어요. 그동안의 작품들이 모두 사전 제작이라 작품이 2017년에 나온 거예요. 영화 <곤지암>도 2년 전에 찍었는데 개봉을 2017년에 한 거고,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도 사전 제작이었어요.

답답했겠어요. <은주의 방>에서 지현 씨가 언제 나오나 텔레비전 앞에서 기다린 것처럼.

작품을 촬영하고 난 뒤로는 조바심 내거나 답답한 적은 전혀 없었어요. 드라마는 매회 보면서 모니터링한 다음 깨닫고 다음 회에 반영할 수 있는데, 사전 제작은 특성상 그럴 수 없잖아요. 그거 말고는 딱히.

빨리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가 연기하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별로 그러지 않았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연기한다는 생각은 안 했으니까. 연기는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엄청 많이 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저만 힘들더라고요. ‘왜 난 안 되지’, ‘내가 부족한가’ 이런 생각을 하면 더 힘들어지니까 ‘언젠가는 되겠지 뭐’, ‘나보다 저 사람이 더 잘 어울리네’ 그런 생각으로 지내다 보니 더 편하게 잘되는 것 같아요.

‘난 왜 안 되는 걸까’ 언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디션을 정말 많이 봤어요. 세보지 않았지만 못해도 100번은 가뿐히 넘을 거예요.

셔츠 김서룡. 티파니 티 투 링, 티파니 티 내로우 링, 티파니 티 와이어 링 모두 티파니.

첫 작품 후 1년 사이에 작품 활동이 많아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중이라 생각했어요.

모두 오디션으로 따낸 작품이에요. “네가 이 역할에 안 되더라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네가 연기를 못하는 게 아니고, 네가 못생긴 게 아니고 이미지가 맞지 않는 거야”라고 이야기해주신 오디션 관계자들이 많았어요. 보통은 오디션 후에 그런 피드백도 없대요. 자책을 많이 했는데, 그런 이야기들 덕분에 마인드 컨트롤을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전형적인 미인상이라 ‘차도녀’ 전문 배우일 줄 알았는데, 막 귀신이고

제 얼굴이 정말 꾸미기 나름이잖아요. 완전히 못생기게 꾸밀 수도 있는 얼굴. 예쁘게 꾸며주시면 혜진이처럼 예쁜 역할도 할 수 있지만 <곤지암>의 귀신 같은 경우는 전혀 예쁘지 않잖아요.

외모 때문에 역할이 한정적으로 들어올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역할이 들어온 적이 없어서.(웃음)

모든 역할을 다 오디션으로 따낸 거예요?

네.

영화 <사자> 오디션은 어땠어요?

오디션 대본이 되게 부담스러웠어요. 몸을 막 써야 하고, 소리도 짐승 소리를 냈다가 울다가 웃다가 해야 하는데사실 저는 몸을 쓰는 게 편해요. 자의식 없는 상태로, 별생각 없이 몸을 사용했고 그래서 편하게 할 수 있었어요.

연기를 하면 자신이 단단해져요?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부서져요. 가루가 되는 게 아니라 말랑말랑하게. 그래서 예전보다 지금 작은 일에 더 슬프고 행복해요. 예전엔 연기하는 사람들의 예민함과 감정 기복이 싫었는데, 이제 쉽게 슬프고, 우울하고, 행복할 수 있는 게 좋더라고요. 배우로서는 좋은 재료잖아요. 그래서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그렇게 돼가는 것 같아요.

배우 활동하면서 성장하는 걸 느껴요?

그럼요. 그런데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예전이 더 행복했던 것 같아요.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울함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둔하고, 누구도 나한테 상처 입힐 수 없어, 이런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상처도 많이 받아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래서 행복한 것 같아요. 많이 말랑해져서.

연기를 하면서 내려놓은 게 있어요?

감정을 참지 않게 됐어요. 울음을 참지 않고, 웃음도 참지 않고. 힘들어서 꺼이꺼이 우는데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대단한 거예요. 이렇게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그러면서 희열을 느꼈던 거 같아요.

감정의 폭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걸 알아서 배우로서 자신의 가능성을 본 거예요?

느낀다기보다 믿는 거죠.

도대체 그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직업에 어떻게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있을 수 있죠?

다른 일을 했다면 이런 믿음이 있었을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연기는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일로 느껴지지 않았고, 너무 재미있었고, 곧잘 했던 것 같아요. 무슨 일이든 나 스스로가 잘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직업으로 삼을 수 없잖아요. 직업이라는 건, 어찌 됐건 대가를 받고 하는 거니까. 다들 각자의 분야에서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하다 보니 믿음이 더 생긴다?

개인적으로 힘든 적이 많았는데 한 번도 연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래서 직업을 잘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목표가 이거예요. 늙어 죽을 때까지 연기하는 거. 너무 재밌으니까.

재킷 셀린느. 티셔츠 에디터 소장품. 바지 르메르. 오른쪽 귀걸이 포트레잇 리포트. 왼쪽 귀걸이 에디터 소장품.

어떤 배우는 되고 싶지 않아요?

최근에 든 생각은 어느 정도 인기 있는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거예요. 영화, 드라마 모두 상업적인 일이다 보니 손해를 보면 안 되잖아요. 제가 작품에 참여했는데 그 영화가 손해를 보면 죄책감에 시달릴 거 같아서, 그래서 인기 있는 배우가 되면 적어도 손해를 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체중 조절로 20kg을 감량했다고 들었어요. 보통 독한 게 아니에요.

예쁜 여자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살을 한번 빼볼까 해서 뺐는데 괜찮은 거예요. 살을 빼면 내 캐릭터를 잃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빼도 좋겠더라고요. 다이어트를 하면서 우울이라는 게 뭔지 처음 알았던 거 같아요.

어떻게 보면 아이돌 같고, 어떻게 보면 아나운서 같기도 해요. 또 어떤 모습이 더 있을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누굴 만나느냐,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서 저도 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전 다이어트 이전 시기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때는 예쁘다는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어요. 그래서 예쁘지 않다는 게 뭔지 알고, 그 삶이 되게 익숙해요. 오히려 이렇게 예쁨받는 삶이 더 익숙하지 않고요.

지현 씨가 스물다섯이라고 해서 ‘우리는 그때 뭘 했지’ 이야기하다가 누군가 ‘패기 넘칠 때’라고 했어요. 지현 씨의 스물다섯은 어땠어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들에 익숙해지는 나이?(웃음) 그래도 전 용감한 편인 것 같아요. 하고 싶으면 해요.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배우는 ‘똘끼’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아, 저 똘끼 있어요.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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