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아닌 김고은

김고은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티셔츠 에디터 소장품. 리넨 바지 에르메스. 벨트 셀린느.

 

메이크업도 하지 않고 화보 촬영을 했다고 들었어요. 여배우가 메이크업을 안 하고 촬영하는 경우는 드물어서 좀 신기했습니다.

제 외모를 조롱하는 악플을 볼 때마다 답답했어요. 미적 기준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데 그걸 어떻게 일일이 맞추면서 살아요. 그러니 본연의 모습을 잘 아는 게 오히려 매력적이라 생각해요. 남들이 추구하는 걸 따라가다 보면 정작 본인 스스로가 훼손되고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이 될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배우이기 전에 나라는 사람의 포지션은 어디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목소리를 높여서 주장하는 캐릭터는 아닌 거 같지만, 솔직한 모습을 표현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 같더라고요. 누구에게나 본연의 매력이 있고 그 어떤 것도 그 매력을 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마음을 화보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화보는 말하는 게 아니니까, 그냥 보여주면 되니까요.

외모를 지적하는 악플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나요?

크게 신경 쓰는 건 아닌데 여배우들에게 외모의 잣대를 너무 자주 들이미는 거 같아요. 살이 빠지면 빠졌다, 찌면 쪘다. 관리하면 했다, 안 하면 안 했다. 이런 잣대가 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물론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셔츠 유니클로. 청바지 리바이스.

개개인마다 기준이 다를 테니 그런 기준에 일일이 맞출 수도 없을 거예요.

그래서 예쁘지 않다는 말을 의식해서 예뻐지려고 하면 비극적일 수밖에 없을 거 같아요. 어차피 아무리 애써도 그들 기준대로 예뻐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예쁜 외모는 일시적이지만 내면에서 나오는 매력은 장기적인 거잖아요. 결국 이 사람이 나이가 들건 뭘 했건 이 사람으로 남아 있는 거니까.

사실 김고은 씨가 <변산>을 선택한 건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변산>을 선택한 게 이준익 감독님의 현장이 궁금해서라고 했더군요. 

이준익 감독님 작품에 출연한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너무 행복했다는 거예요. 스태프들도 그렇고, 공통적으로 그랬어요. 저도 지금까지 나름 재미있고 즐겁게 일했는데 저렇게까지 행복했다는 게 신기하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일인데 늘 그럴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있었는데 겪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정말 행복했어요.(웃음) 

이준익 감독님은 김고은 씨가 <변산>을 선택한 게 박정민 씨 영향이라고도 했는데요. 두 분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다고 들었어요. 

같이 학교를 다니기도 했고, 정민 오빠가 <파수꾼>으로 데뷔할 때 관객과의 대화에 가서 볼 정도로 친했어요.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파수꾼>을 보면서 역시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의 행보도 존경스러웠거든요. 그래서 이 조합으로 같이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언제 오겠나 싶어서 덥석 잡았죠.(웃음)

어쩌면 누구와 함께 작업하느냐가 지금 김고은 씨가 작품을 고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걸까요?

점점 더 중요해지는 거 같아요. 물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섭다는 말은 아니고요.

이준익 감독님도 ‘주연을 많이 맡았기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더군요.

배우마다 각자의 시기에 맞는 작품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는 <변산>이 지금 시기에 필요한 작품이었고요. 물론 주연을 맡는 것이 의미 있게 다가오는 작품도 분명 있겠지만 <변산>을 선택한 당시에는 그런 걸 감당하기 어려운 시기라고 스스로 판단했어요.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조금은 부담을 덜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냥 즐겁고 재미있게 현장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아무래도 전작인 두 드라마 <치즈인더트랩>과 <도깨비>가 연이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된 영향이 있었던 걸까요?

그런 건 아니에요. 저도 일을 시작한 뒤로 처음 겪는 것이긴 했는데 그냥 개인적인 감정의 변화였던 거 같아요. 어쩌면 한 번쯤 올 법도 한 것이 드디어 왔다고 할까요? 스스로 제 감정이 단순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어요. ‘난 단순한 사람이다, 상처받아도 금방 까먹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어요. 그러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그 시기에 찾아온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뭉쳤던 게 한 번에 터지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그럴 이유가 없었거든요. 드라마도 너무 잘됐으니까. 그 시기에 욕심이 나는 좋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섣불리 한다고 했다가 많은 사람들한테 피해만 줄 거 같았어요. 욕심이 난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때는 진짜 절실하게 욕심을 낼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슬리브리스 톱 버버리. 브라톱 본인 소장품. 벨벳 바지 에디터 소장품.

어쩌면 그동안 계속 액셀을 밟고 달리다 이젠 브레이크를 한 번 밟아야 한다는 느낌을 받은 건가 싶기도 하네요. 물론 <변산>이 브레이크 같은 작품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뭔가 속도를 조절하고 싶었다는 의미처럼 들려요.

롤이 주는 압박도 분명히 있었던 거 같아요. 선배님들과 같이 롤을 분배할 수 있는 작품과 저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하는 작품을 할 때 심리적인 압박에 차이가 난다는 걸 당시에는 잘 몰랐거든요. 그때는 해내야 된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부담을 느끼거나 힘들다는 생각 자체가 너무 사치스러웠어요. 그런데 지금껏 해온 작품들과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그랬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더라고요. 그래서 부담 없이 롤을 분배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해요.

어쩌면 적절한 순간에 좋은 제안을 받은 셈이네요. 사실 김고은 씨는 어렵고 험난한 과정도 묵묵히 잘 이겨낼 것 같아 보이는데 실제로도 그럴 거 같아요. 그만큼 그런 과정을 견뎌내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혼자 쌓아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랬던 거 같아요. 본인이 겪는 감정을 하나씩 그때마다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최면에 걸리듯이 여력이 안 된다 싶으면 그냥 무시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지금 당장 중요한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냥 넘겨버린 거 같아요. 내가 이겨낼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했죠. 평온한 상태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되니까 제 자신이 저한테 경고를 주는 거 같았어요. 스스로를 돌볼 필요가 있다는 경고를 주는 느낌이랄까요. 다행히도 그걸 바로 인정해서 그 시기를 아주 잘 넘긴 거 같아요.

처음에는 너무 갑작스럽게 데뷔를 해서 주연이 됐고, 그만큼 해보지 않은 것도 많았고, 너무 어렸어요. 그래서 단기간에 많은 걸 경험하면서 저를 몰아넣고 싶었죠. 그래야 신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쯤 제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져 있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남들보다 빨리 첫 주연을 맡았으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걸 빨리 해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변산>에서 연기한 선미는 유년 시절부터 좋아했던 학수(박정민)에 대한 감정을 오롯이 갖고 있는 인물이에요. 극 중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갖게 된 적은 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을 연모하는 일관된 감정으로 연기한 건 처음인 거 같은데요.

그래서 오히려 더 간단했던 것 같아요. 계속 좋아하는 거니까. 대신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좋아했던 모습이 아닌 거 같아서 실망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그 아이의 본질이 달라진 게 아니라 세월과 사연들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되고 그 친구에게 그걸 좀 깨우쳐주고 싶은 감정선을 유지하는 거니까, 기본적은 애정을 계속 깔고 있는 거죠.

변질되거나 부패한 게 아니라 잘못된 옷이나 포장지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걸 바꿔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셈이죠.

맞아요. 마주하기 싫은 부분이 있을 때 마주하는 건 어렵고 고통스럽지만 외면하는 건 쉽죠. 하지만 어떤 일에서는 꼭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걸 자꾸 외면하는 학수를 어르고 달래고 화도 내보면서 마주하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티셔츠 온리뉴욕. 바지 카브엠트. 운동화 나이키SB. BMX 게이트웨이 주니어 자전거 CULT by 신스.

사실 배우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느낄 때가 적지 않을 거예요.

저는 늘 그래요. 그래서 늘 많이 물어보고요. 제가 잘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 비밀은 별로 없는 거 같아요.(웃음)

선미는 변산에서 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있지만 글을 쓰겠다는 꿈을 이어나가며 소설까지 발표한 작가가 됐어요. 자신의 꿈을 천천히, 하지만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자꾸 학수에게 집착하는 건지도 몰라요. 학수는 선미한테 글을 쓰는 꿈을 갖게 해준 사람이니까요. 이 아이가 표현한 감성을 부러워하다가 나도 그렇게 표현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된 거죠. 그래서 고등학생 시절에 바라본 노을을 잊을 수 없는 거예요. 처음으로 뭔가를 해야겠다는 감정을 느꼈으니까. 

김고은 씨에게도 처음 배우라는 꿈을 품은 순간이 있었겠죠.

있었죠. 선미가 노을을 바라보는 순간처럼 저에게도 배우가 되기 전에 ‘이거다’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어요. 제가 데뷔 때부터 주목받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하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제가 지금까지 배우로 데뷔하지 못했다면 될 때까지 연기했을 거 같아요. 처음으로 이거 아니면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으니까요.

선미는 변산이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여자처럼 보여요. 그래서 오히려 도드라지는 특징이 있는 인물을 연기할 때보다 더 많은 고민이 있을 거 같아요.

그렇죠. 강한 캐릭터는 어떻게 하면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면, 선미 같은 일상적인 캐릭터는 어떻게 하면 연기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죠. 저는 선미가 고등학생 때부터 내면이 단단한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히 주목을 끌지도 않고, 조용한 성격이고요. 그런데 체중을 약간 늘리면 시각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후드 티셔츠 비앙카 샹동. 바지 르메르. 귀걸이 셀린느.

촬영 당시 체중을 8kg이나 늘렸다고 하더군요.

감독님께 물어봤어요. 살을 찌워도 되느냐고. 감독님은 “어, 찌워” 그러시고.(웃음) 선미는 아빠 병간호를 하면서 주로 앉아서 글을 쓰는 친구이기 때문에 딱히 몸매 관리할 시간도 없을 거 같고, 고등학교 때부터 쭉 외형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다들 영화 보면 깜짝 놀랄 거예요. 저도 깜짝깜짝 놀라요.(웃음)

스스로 너무 망가져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한 적은 없었나요?

오히려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 작품에서 제일 잘한 건 체중 증량이었어요.(웃음) 물론 예뻐 보이진 않겠지만 선미랑 착 달라붙는다고 할까요? 그리고 제가 과하게 찌운 것도 아니니까. 결과적으로는 진짜 선미같이 보여서 되게 기분 좋았어요.

늘리는 건 편해도 줄이는 건 힘들었을 거 같아요. 

힘들죠. 심지어 아직도 줄이고 있어요. 늘릴 때는 너무 행복했죠. 맛있는 거 좋아하니까. 불안할 정도로 행복했어요.(웃음) 모든 배우와 스태프 그리고 감독님이 저만 보면 먹을 거 주고, 그렇게 저를 먹였어요. 다음 날 붓는 것도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촬영 직전까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그러다 잠 오면 자고. 그렇게 행복할 줄 몰랐어요.(웃음)

시나리오를 보고 캐릭터의 외형부터 그려보는 편인가요?

시나리오를 읽을 때 캐릭터의 외형이 그려지는 경우가 많아요. <은교>도 처음에 정지우 감독님은 긴 머리를 생각하셨지만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저는 은교 머리가 단발일 거 같은 거예요. 막연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변산>의 선미도 막연하지만 마른 몸매는 아닐 거 같았어요. 그런 느낌이 딱 떠오르면 이 인물을 연기하는 데 자신감이 생기는 거 같아요.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써서 연기할수록 관객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서 그게 신경 쓴 부분인지 알아채지 못할 때도 있을 거예요. 어쩌면 그게 진짜 성공한 연기라 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런 부분까지 알아봐주는 관객이 있다면 고마운 마음도 들 거 같아요.

캐릭터를 맡을 때는 이유도 많고, 정말 이런 것까지 생각하나 싶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서 연기하기도 하죠. 어쨌든 내가 이 사람은 아니니까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 내면을 축적하기 위해 이것저것 넣어보고 풀어보는 단계가 있기 때문에 이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그런 노력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면 속상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모르냐고 질문하는 것도 웃기는 일일 거예요. 결국 내가 스스로 제대로 못했다고 말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죠. 내가 입체적으로 고민하고 열심히 했다고 해도 입체적이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면 답은 하나죠. 내가 소화하지 못한 거죠. 결국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걸 다 해보는 게 맞고, 그걸 관객들이 잘 모른다 해도 이 인물을 불편해하지 않고 공감했다면 된 거라고 생각해요. 

<은교>부터 <몬스터> <차이나타운>까지 초기 작이 죄다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였어요. 신인 배우에게는 조금 가혹한 경력이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당시에는 딱 하나만 생각했어요. 신인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 할 수 있는 걸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 누구나 이건 내가 잘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저도 분명 있고요. 그런데 잘할 수 있는 것만 할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는 너무 갑작스럽게 데뷔를 해서 주연이 됐고, 그만큼 해보지 않은 것도 많았고, 너무 어렸어요. 그래서 단기간에 많은 걸 경험하면서 저를 몰아넣고 싶었죠. 그래야 신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쯤 제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져 있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남들보다 빨리 첫 주연을 맡았으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걸 빨리 해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좋은 선배님들과 같이 촬영하면서 관찰하고 배우고. 그러다 보니 외면하고 싶은 순간들도 정말 많았어요.(웃음) 하지만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몰아넣었죠. <은교>부터 <계춘할망>까지 그런 과정이었던 거 같아요.

그만큼 만만치 않은 작품과 캐릭터를 소화해온 거 같은데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처음부터 많은 피로감을 감당해왔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시나리오를 받으면 이 장면 찍을 때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되는 신이 꼭 하나씩은 있었어요. 극단적인 감정선이 요구되는 신인데 그런 신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조여지는 것 같고, 그 신 찍는 날이 되면 도망가고 싶어지고 그렇죠.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이 주인공에게 요구하는 감정이 있는 거 같아요. 물론 작품마다 다른 감정이겠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신이 분명히 있는 거 같거든요. 어쩌겠어요. 그냥 즐겁게 해야죠.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를 가감 없이 내던지듯 연기해왔다는 느낌도 들어요. 한 작품에서 지금 가진 걸 다 태워낸다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제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작품에 임할 때는 제 역량을 다 끌어내야 하는 게 맞죠. 작품을 하면서 책임감도 무거워지는 거 같고요. 언제까지 신인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주요한 롤을 맡았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해요. 그 정도 부담도 감당 못 할 거라면 오히려 하지 말아야죠. 반대로 역량이 부족한 부분은 인정해야 되는 거고요.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배우가 그렇듯이 지나고 보면 늘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는 걸까요?

다 아쉽죠. 지금 했으면 좀 더 잘했을 텐데 싶을 때도 있고. 그런데 이미 지나간 건 지나간 거고 돌이킬 수 없는 거니까요. 그냥 저 때는 최선을 다했겠지, 이런 마음이죠.

한편으로는 ‘즐겁게’라는 단어를 일과 연관 지어서 자주 쓰는 거 같아요. 어쩌면 그게 고은 씨가 일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일까 싶기도 하고요.

제 기억으로는 <은교> 때 현장이 정말 즐거웠어요. 그래서인지 현장은 즐거워야 한다는 압박도 생긴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현장이 되길 바라고요. 대부분 웃으면서 즐겁게 촬영하려 했고, <차이나타운> 때도 이렇게 심각한 영화를 이렇게 재미있게 찍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즐겁게 연기했어요. 그런데 반대로 박정민 오빠는 이번 현장이 저만큼 즐겁진 않았을 거예요. 모든 신을 다 짊어지고 있었으니까. 랩도 해야 되고 가사도 써야 되고, 그런 의미인 거죠.

결국 김고은 씨에게 <변산>은 오랜만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죠. 저도 그런 롤을 경험해봤으니까 정민 선배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고민할 시간이 얼마나 필요할지 알아요. 그리고 이젠 그런 부분을 서포트해줄 수 있는 요량도 생겼고요. 전작들의 경험을 살려서 좀 더 유연하게, 이 사람이 덜어낼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제가 감당하려 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는 잘 맞았던 거 같아요.

<변산>에서 전라도 사투리로 대사를 하는데 어릴 때 광주에서 살았던 게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또 다르더라고요. 전라북도 사투리가 전라남도와 다르기도 하고, 거긴 약간 충청도 사투리가 가미된 느낌이기도 하고요. 사실 제가 계속 사투리를 써온 게 아니라서 친구들한테 미리 물어봤는데 그것도 말짱 도루묵이 됐어요. 오히려 그렇게 했으면 큰일날 일이었더라고요. 

선미는 변산에서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덕분에 한 동네에서 알고 지낸 친구가 많습니다. 반대로 한동안 변산을 떠나 있던 학수에게 변산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곳이고, 낯선 얼굴이 되죠. 혹시 유년 시절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달라졌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저는 항상 너무 똑같다는 얘기만 들어요 그래서 오히려 애들이 좀 변하라고, 이젠 품위 좀 지키라 그러고.(웃음)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다시 잘 지내고 있는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인데 원래 성격이 센 편이었어요. 에너지를 발산하는 타입이랄까요? 그런데 오랜만에 만나니까 얘가 너무 차분해진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제가 눈물이 나더라고요. 친구가 변한 모습 때문에. 물론 이상하게 변한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짠했어요. 그렇게 변하기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이 있었을 거 같아서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왠지 저한테는 깊게 각인되는 느낌이었어요. 그 뒤로 다시 친해지면서 그냥 편하게 하라고 하니까 지금은 너무 저를 구박해요. 그때 그냥 착하게 대해달라고 할걸.(웃음) 

친구를 통해 스스로를 깎고 깎는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느꼈나 봐요.

그런데 사실 저도 다듬어졌죠. 그래도 나름 잘 변한 거 같다고 생각해요.

사실 수많은 대중의 시선을 받는 입장이니 고은 씨도 그리 자유로운 상황은 아닐 거 같고요.

맞아요. 제가 훨씬 자유롭지 않죠.(웃음)

배우가 되고 싶었고 결국 배우가 됐는데 실제로 배우로 살아보면서 느끼는 시행착오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게 제일 컸어요. 연기를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되고 싶었고, 배우가 됐는데 연기만 하는 게 배우가 아니더라고요. 연기 외에도 부수적으로 감당해내야 하는 것이 많았어요. 아무래도 어린 나이에 시작해서 시행착오를 더 많이 겪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겪을 거 같아요. 요즘에는 프로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결국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 만들어나가야 되는 일 같아요.

배우로서 잘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잃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거 같아요. 사실 잘하는 연기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잖아요. 물론 기본적인 기준은 있겠죠. 대사를 못하면 안 되는 거니까. 그 외에는 연기를 잘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반대로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다는 정답도 없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지켜내면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고요. 그런데 그게 제일 어렵잖아요. 나를 지킨다는 게.

혼자 노래방에 가서 노래할 정도로 노래하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고도 들었어요. <치즈인더트랩> OST에 참여하기도 했고 신승훈 씨 11집 앨범에서 ‘해, 달, 별 그리고 우리’라는 듀엣 곡을 부르기도 했더군요.

진짜 신기했어요. 당시에 어디서 노래를 부른 적도 없었는데. 그때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었는데, 급하게 메일을 보냈다며 노래 한번 들어봐달라는 거예요. 갑자기 웬일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주변에서 배우 김고은이 노래를 좀 한다는 소문을 들었대요. 사실 제 솔로 파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계속 같이 부르면 되는 거라 그냥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아니다 싶었으면 그러다 말 수도 있었을 텐데 실제로 음반에 수록된 걸 보면 만족스러웠던 게 아닐까요?

사실 녹음 시간이 좀 길게 걸릴 거라 생각해서 스튜디오 녹음 스케줄을 서너 시간 잡았는데 30분 만에 끝났어요. 나름 자랑거리라고 생각해요.(웃음) 

<변산>에서 직접 랩을 하는 신도 있더군요. 최근 방송에서 윤미래 씨 랩을 하는 걸 봤는데 생각보다 잘해서 놀랐어요.

원래 그것보다 훨씬 잘해요! 이준익 감독님이 주인공 바꿔야 된다고도 하셨어요.(웃음) 

이준익 감독님 말씀처럼, 물론 농담처럼 얘기했다고 하셨지만 혹시 고은 씨가 <변산>의 주인공을 맡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어휴, 아니에요. 옆에서 정민 선배 고생하는 거 보니까 저는 정말 못 하겠더라고요. 랩하느라 애쓰고, 직접 가사 쓰고, 지금도 녹음하고 있을걸요?(웃음) 아마 가사를 여덟 곡 정도 썼을 거예요. 

그런 거 보면 이준익 감독님도 참 만만치 않은 분 같아요. 배우를 진짜 래퍼로 만들다니.

사실 처음에는 진짜 래퍼한테 맡길 생각이었나 봐요. 그런데 정민 선배가 글을 잘 쓰잖아요. 그래서 배우 본인도 욕심을 냈고, 감독님도 누구보다 학수를 잘 아는 게 너일 테니 그러자고 했는데 아마 그때는 가사를 여덟 곡이나 써야 될지 몰랐을 거예요.(웃음)

럭비 셔츠 바바리안. 진주 목걸이 타사키.

연기를 하고 싶어서 배우가 되고 싶었고, 배우가 됐는데 연기만 하는 게 배우가 아니더라고요. 요즘에는 프로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결국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계속 만들어나가야 되는 일 같아요.

선미는 ‘노트북도 있고 컴퓨터도 있지만 이렇게 해야 글을 잘 쓰는 것 같다’면서 연필로 글을 써요. 문득 3년 전 인터뷰 당시에 고은 씨가 꾸준히 일기를 쓴다고 했던 게 기억나더라고요. 지금도 여전히 일기를 쓰나요?

네. 어제도 썼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 2008년도 다이어리를 꺼내 봤는데, 세상 어른이야.(웃음) ‘내가 이런 글을 썼다고?’ 싶기도 하고. 신기했어요. 어쩌면 지금보다 더 생각이 깊은 느낌? 그런 재미가 있더라고요. 

지난 일기를 종종 보나요?

원래는 안 보는데 진짜 오랜만에 갑자기 보고 싶더라고요. 그때 <서툰 사람들>이라는 연극을 보고 왔다는데, 류승룡 선배랑 장영남 선배가 공연했던 거더라고요. 그거 보고 ‘아, 김고은 성공했네. 이제 다 인사하는 사이잖아’ 이러면서 뿌듯해하고.(웃음) 

일기를 쓰는 건 어쩌면 그 순간의 나를 제대로 보관하고 싶은 마음을 반영한 행동일지도 모르겠군요.

지금도 일기를 쓰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심한 기계치라는 거예요. 컴퓨터도 잘 다룰 줄 모르고, 스마트폰을 연동해서 사진 보관하고 이런 것도 잘 못해요. 그래서 핸드폰 박살 나면 사진 다 날리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사진은 항상 좋았던 순간처럼 찍히는 거니 그 당시의 기억을 왜곡시킬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게 아니니까 그 당시의 심정을 가장 솔직하고 꾸밈없이 쓸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맞춤법이 틀려도 상관없고,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처절한 소리를 써볼 수도 있고, 이런 재미가 있어요. 

정작 자기 자신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예전과 다른 사람일 것이라 짐작하고 조심스러워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거 같아요. 이를테면 이준익 감독님이 김고은 씨는 선미 같은 역할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처럼요. 

그냥 그러려니 해요. 다음에 만나면 아니라고 얘기해야지, 이 정도 생각만 하고. 아니라고 매일 말하면 언젠가는 알겠죠. 요즘 한국 영화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지만 아직 저예산 영화는 다양한 소재와 주제로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그런 제안이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그런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는 한예리 선배가 멋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데뷔작인 <은교>를 연출한 정지우 감독님의 신작 <음악앨범> 출연을 검토 중이라고 들었어요. IMF 시절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물이라고 하더군요.

만약 하게 된다면 영화에서 로맨스 연기를 하는 건 처음이에요. 사실 각색하기 전에 많은 의문이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이 인물에 자신이 있다고 하셔서 좀 더 믿음이 생겼어요. 그런데 각색된 시나리오를 보니까 정말 재미있을 거 같더라고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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