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우아한 짐승 세르게이 폴루닌

MASCULINE ELEGANCE

즐겨 보는 패션 잡지의 2017 F/W 이슈 표지에 세르게이 폴루닌이 나온 적이 있다. 그때는 폴루닌을 몰랐는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을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뭐든 다 정확하지 않았어도 표지 속 남자의 눈빛만은 명확했다. 기대듯 앉아 찍힌 남자는 퇴락한 가문의 마지막 남은 귀족 같았다. 화보에서는 날것 같은 예민한 얼굴에서 기품이 엿보였다. 몸은 타투와 일부러 만들어낸 게 분명한 상처들로 뒤덮여 있었고. 자유로워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뭐 하는 남자지? 요즘 핫한 힙합 뮤지션 버전 대신 폴루닌 표지를 샀다.

세르게이 폴루닌

세르게이 폴루닌 Sergei Polunin
발레리노, 배우, 출생 1989년 11월 20일, 우크라이나, 키 180cm, 출연작 ‘오리엔트 특급 살인'(2017), ‘댄서’ (2016)

작년 겨울에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을 봤다. 벅찬 출연진에 비해 갈 곳 잃은 내용 때문에 내내 몸을 비비 꼬다가 어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신경질적인 백작을 연기한 남자였다. 태어날 때부터 백작이었을 것 같은 인상의 그 남자는 언젠가처럼 어디서 본 것 같았다. 크레디트에 세르게이 폴루닌이라는 이름이 올라왔다. 또 익숙한 이름. 집에 돌아와 그 잡지를 찾았다. 세르게이 폴루닌. 내가 세르게이 폴루닌을 의심 없이 좋아하게 된 건 그때부터다.

유튜브에 세르게이 폴루닌과 데이비드 라샤펠을 검색하면 2015년에 만든 <Take Me to Church>라는 영상이 나온다. 세르게이 폴루닌의 자유로운 춤을 사진가 데이비드 라샤펠이 촬영했다. 나는 누군가 폴루닌을 궁금해한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 전에 그 영상을 보여줄 것 같다. 폴루닌은 4분짜리 영상에 그의 전부를 담았다. 아름답고 숭고하고 가혹하고 벅차게 행복했던 발레리노로서의 지난날들을.

폴루닌은 우크라이나 출신 무용수다. 이름 대신 천재라고 불리기도 한다. 영국 로열 발레단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수석 무용수가 됐고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2년 전부터 예매하는 사람도 많았다. 탁월한 재능 뒤에는 우울증과 마약과 탈선이 있었다. 가족의 불화까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폴루닌을 찾았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짐승이니까.

나는 폴루닌의 얼굴을 좋아한다. 신화적 면모가 곳곳에 묻어 있다. 200년 전 얼굴 같기도 하고 2020년의 얼굴 같기도 하다. 모든 선이 가다듬어진 출중한 미남이었다가, 어떤 것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야수의 눈빛이 번뜩인다. 귀족적이고 매섭고 슬프고 사랑스러운 얼굴. 나는 ‘매스큘린 엘레강스’가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수식이라고 생각한다. 톰 포드의 투스칸 레더 향수를 뿌리고, 몸에 꼭 맞는 검은색 가죽 바지를 즐겨 입는 것만 봐도 그렇다. 테스토스테론이 넘치고, 우아하며, 퇴폐적이다. 직설적이기도 하고. 이를테면 알렉산더 맥퀸의 옷처럼.

폴루닌에 대한 다큐 영화 <댄서>는 종종 세르게이 폴루닌의 얼굴을 화면 가득 정면으로 비춘다. 그럴 때 놓치지 않고 영화를 멈춘다. 우아하게 정제된 쾌락주의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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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일러스트강 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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