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대로 45길 7

11년.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는 이미 플래그십 매장을 뛰어넘었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 에스콰이어

해군 함대의 기함, 즉 사령부가 설치된 군함. 그러니까 선단에 지휘관의 계급을 나타내는 깃발을 달고 함대를 이끄는 배. 플래그십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이 단어는 일상에서도 종종 쓰인다. 보통 시장에선 새로 나온 가장 좋은 카메라나 자동차에 ‘플래그십’이라는 단어를 붙인다. 브랜드가 가장 자랑하고 싶은 물건, 가장 잘 만든 물건, 브랜드를 가장 잘 포장하고 고객을 유혹할 수 있는 물건을 수식한다. 매장에도 플래그십을 붙인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매장에 깃발을 꽂는 것이다. 플래그십 매장은 선두에 선 기함처럼 브랜드를 진두지휘한다. 넬슨 제독은 기함 빅토리호를 타고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넬슨 제독이 브랜드라면 빅토리호는 플래그십 매장이다. 플래그십 매장엔 전술과 전략이 담겨야 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 초입, 에르메스의 플래그십 매장 꼭대기엔 실제로 깃발이 나부낀다. 양손에 오렌지색 깃발을 든 기수 동상이다. 앞발을 맹렬하게 들어 올린 말이 당장이라도 도산공원 사거리로 뛰어내릴 기세로 10년 넘게 부동이다. 2006년 11월 에르메스는 도산공원 앞에 전 세계 네 번째 플래그십 매장을 열었다. 에르메스는 플래그십 매장을 집, 메종이라 부른다. 이곳에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다.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삼성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청담동 명품 거리란 이름을 굳히건 말건 에르메스는 도산공원으로 향했다. 고급 단독주택과 고즈넉한 공원이 있던 그곳 일대는 금방 북적거렸다. ‘XXX 부티크’ 매장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노천카페도 생겼다. 서울에 없던 채식 레스토랑도 생겼다. 당시 이런 제목의 신문 기사가 종종 났다. “도산공원 앞, 제2의 청담동으로 뜬다.” 이후 많은 가게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메종은 언젠가부터 그 동네를 상징하게 됐다. 아오야마의 프라다나 샹젤리제의 루이비통처럼 누구나 아는 가게 혹은 건물.

황금빛의 거대한 큐브형 건물은 2006년의 서울에선 진보적이었다. 유리 벽에 실크스크린으로 황금빛 줄무늬를 넣은 건물은 무덤덤한 회색 건물 사이에서 온 종일 그 동네를 장식했으니까. 낮과 밤이 사뭇 달랐다. 낮엔 청초했고 밤엔 관능적이었다. 이 건물은 생전에 에르메스의 메종을 전담한 건축가 르나 뒤마가 이끌었던 RDAI사가 맡았다. 그들은 이 메종을 유리와 빛의 건물로 만들었다. 줄무늬 유리를 일정 간격으로 세운 일종의 필터 형식의 건물은 빛이 또 하나의 재료였다. 또 여백과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앙 여백 공간을 중심으로 기능적인 공간을 배치한 건 불현듯 마당을 중심에 둔 한옥을 연상시킨다. 빈 공간과 찬 공간은 음과 양의 조화처럼 맞물렸다. 이 건물에서 매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 절반도 되지 않는다. 매장 말고 전시실, 카페, 사무실도 있다. 흡사 에르메스의 세계관을 일정 비율로 축소해놓은 모양새다. 비슷한 규모와 테마의 플래그십 매장이 근래에 겨우 생겨나는 것을 보면 이곳은 확실히 선도적이었다. 한국 패션 산업 측면에서도 상징성을 지녔다. 서울은 에르메스의 메종이 있는 전 세계의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그 사실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브랜드의 입장과 비전을 대변하는 것이 플래그십 매장의 기능이라면 서울의 메종은 좋은 플래그십 매장이다. 르나 뒤마가 설계한 동선을 따라 매장을 둘러보고 작품을 감상하고 차를 마시는 이런 과정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에르메스와 교감하도록 한다. 이곳은 우아하고 기품 있는 전략을 세워놓은 기함이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 에스콰이어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 에스콰이어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 에스콰이어

신화에서 문은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통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문은 항상 수문장이 지키고 서 있다. 가끔 메종의 출입문 앞에 설 때 마치 성 베드로의 출입 승인을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메종을 편의점 문 열 듯 벌컥 열고 들어가기란 웬만해선 쉽지 않으니까. 에르메스의 세계에 당도하기 위해선 굳은 결심이 필요했다. 이런 고충을 에르메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폐쇄적인 브랜드가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문턱을 낮췄다. 메종은 다시 말하지만, 매장만이 아니다. 에르메스를 살 수 없어도 메종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술이 매개체가 되었다. 그들은 예술로써 대중과 대화하고 싶어 한다.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갤러리인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그런 의지가 반영된 공간이다. 에르메스 실크 스카프 한 장 없는 사람도 이곳에선 공짜로 에르메스의 예술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다니엘 뷔랑의 초대 전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현대미술 현장의 흐름을 이끌고 미래의 가능성을 제안하는 국내외 작가들을 초청해 전시해왔다. 비디아 가스탈돈, 마틴 보이스, 구동희, 박찬경, 로랑스 데르보, 아이작 줄리언, 크리스 마커, 사단 아피프…. 이 리스트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비전을 명료하게 나타낸다. 아뜰리에 에르메스는 무엇보다도 국내 현대미술 시장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국제 시장과의 밀도 높은 교류, 수준 높은 제작 환경 지원 등 물리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미학적 전망, 시대적 문제의식에 대한 비평의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장르의 다양성과 복합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시장의 판도를 서서히 바꿔나갔다. 단일 브랜드 플래그십 매장에 속한 갤러리로 단정 짓기엔 그 영향력이 대형 갤러리 못지않은 수준이다.

다니엘 뷔랑 전(2006).

아이작 줄리언 전(2011).

게리 웹 전(2008).

에르메스의 예술 후원은 도산공원에 메종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2000년 외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한국의 창의적인 작가 발굴을 위한 프로그램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을 제정했다. 이후 2008년 에르메스 재단의 발족으로 더욱 원활한 지원이 시작됐다.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은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으로 거듭나고, 메종 설립 이후에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최종 후보자 3명의 전시를 지원하는 방식에서 1명의 수상자를 선정한 후 이듬해 개인전을 개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는데 이로써 더욱 집중적으로 작가를 지원하게 되었다.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의 역대 수상자로는 2000년 장영혜를 시작으로 서도호, 박찬경, 양아치, 올해는 오민 작가가 선정됐다. 지금 보면 모두 놀랄 만한 인물들이다.

메종은 에르메스의 패션 또한 예술적 콘텐츠로 다룬다. 스카프를 테마로 한 <젬 몽 까레> <파리 몬 아미> <레 쥬 데르메스> 전시나 <사운드 오브 실버> <아주 작은 시간> <놈브르 도흐> <시간을 만들다> 같은 주얼리 또는 시계 전시는 에르메스의 예술관과 패션을 유쾌하고 우아하게 융합한다. 전시에서 각각의 물건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메종은 친절한 이야기꾼이 된다.

전(2014).

짐 람비 전(2009).

홍승혜 <광장사각> 전(2012).

이수경 <믿음의 번식> 전(2015).

메종 건물은 외부가 하나의 갤러리이기도 하다. 늘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와 협업으로 윈도 디스플레이를 한다. 에르메스가 일찌감치 시작한 아트 마케팅의 일환이다. 엄격한 글로벌 가이드에 따라 획일적인 윈도를 구성하는 다른 브랜드와 달리 에르메스는 각 도시의 아티스트를 발굴해 협업으로 디스플레이한다. 따라서 전 세계 윈도 디스플레이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플라잉시티, 배영환, 잭슨홍, 길종상가… 젊고 총명한 한국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에르메스를 오해하는 부분과 정반대 지점에 있다. 그 어떤 럭셔리 하우스보다 동시대적이면서 급진적이고 유머러스하다는 것. 이것은 에르메스 하우스의 구석구석에서 공통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서브 텍스트이기도 하다. 동시에 예술을 다루는 에르메스의 입장과 태도가 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제한된 윈도는 소비를 독려하는 가장 첨예한 공간인 동시에 일종의 팝업 갤러리가 되는 것. 넓게 보면 스트리트 아트라든지 공공 미술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발걸음을 멈추고 건물 둘레를 따라가며 윈도를 차례로 들여다보게 되는 절차. 에르메스의 윈도 디스플레이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참여를 유도한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 에스콰이어

사운드 오브 실버 행사장 전경(2014)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 에스콰이어

공사 중인 메종 외부에 그려진 위고 가토니의 드로잉(2017).

 

2014년 10월, 오픈 8년째가 되던 해에 에르메스는 메종을 레노베이션한다. 공간 구성을 새롭게 하고, 당시 가장 현재적인 에르메스 콘셉트를 적용했다. 2017년 5월 20일은 두 번째 레노베이션을 마치고 잠시 닫았던 문을 다시 여는 날이다. 1층은 놀랍게도 남성 컬렉션을 비롯한 실크, 시계, 주얼리, 향수, 2층은 여성 컬렉션, 가죽 제품, 액세서리를 다룬다. 요즘의 소비 경향을 반영한 구성이다. 3층엔 양혜규 작가의 작품이 기념 전시된다. 윈도 디스플레이는 지난 11년간의 윈도 디스플레이 중에서 상징적인 작품을 엄선해 선보인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여정의 함축이다. 지하 1층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선 지난 전시들에 경의를 표하는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 전시가 열린다. 5월 25일, 2012년 이후 중단됐던 스트리트 콘서트도 부활한다. 초여름 저녁,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다. 메종은 예전보다 더 친근해지려 한다. 문턱은 더욱 낮추고 문은 더 활짝 열었다. 전략적 기함의 단계는 일찌감치 뛰어넘었다. 이젠 동시대적 서울을 상징하는 어떤 표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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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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