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의 리액션

하정우는 언제나 반응한다. 연기도 인생도 끊임없는 리액션이다.

with CARTIER

 

하정우 - 에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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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에 드러누워 무의식의 흐름에 따르듯 별생각 없이 리모컨을 누르며 TV 채널을 돌리던 어느 날이었다. 리모컨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의 관성을 막은 건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이었다. 프로야구 원년 꼴찌 팀이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 처리 투수 감사용의 1승 도전기를 그린 이 작품은 2004년에 개봉했다. 무려 13년 전의 영화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새롭기도 해 별생각 없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바로 세웠다.

하정우 - 에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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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 에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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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다. 이범수가 주연을 맡고 공유가 박철순을 연기한 것은 알았지만 하정우가 나오는 줄은 몰랐다. 당시만 해도 그는 무명 배우였고,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단 한 신에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하정우가 등장한 그 한 신은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9회 말 투아웃 상황에서 1점 차로 지고 있지만 역전 주자가 나가 있는 팀을 구원하러 온, 끝내 감사용의 1승을 담장 너머로 날려버린 OB베어스의 4번 타자 김우열. 타석에 서서 방망이를 천천히 돌리며 투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는 눈빛은 영락없이 하정우였다. “촬영 며칠 전에 급하게 연락이 와서 갑자기 출연하게 됐어요. 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원래 출연하기로 한 배우가 개인 사정으로 못 하게 돼서 두 번이나 바뀐 상황이었거든요. 제가 플랜 C였던 거죠.” 배우에게 무명 시절이란 일종의 무용담과 같다. 무용담은 승자의 것이다. 패자에게 무용담은 허락되지 않는다. 하정우의 무명 시절이 괴롭게 들리지 않는 건 그가 이미 성공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은 배우가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정우에게 그 시절은 연민으로 점철되는 가시밭길이 아니라 도전적인 통과의례였을지도 모른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하정우는 졸업을 앞둔 겨울,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다면 선배님과 같이 꼭 영화를 찍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출연한 연극도 세 편쯤 봤다더군요. 그런데 졸업 작품으로 준비 중인 시나리오가 하나 있다고 해서 만나자고 했어요. 그렇게 윤종빈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됐죠.” 배우 하정우가 첫 번째 주연작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생애 첫 드라마 출연작인 <무인시대>에 캐스팅된 하정우는 촬영장을 오가는 와중에 틈틈이 대학교 빈 강의실에서 윤종빈 감독을 만나 시나리오에 관해 논의했고, 촬영을 준비해가던 두 사람은 감독과 배우로서의 관계를 넘어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경험 그 자체에 집중했다. 중간에 돈이 떨어져 제작이 중단되기도 하고, 촬영이 가능한 군부대를 찾아 몇 개월을 기다리며 일진일퇴하듯 촬영을 이어나갔다. 그 중간중간에 하정우는 <슈퍼스타 감사용>에 출연하고 <잠복근무>에도 캐스팅됐다. 그렇게 사계절을 보내고 13개월 만에야 촬영이 완료됐다. 하정우는 완성된 영화를 들고 배급사에 찾아갈 때도 윤 감독과 함께였다. 그는 단순히 배우로서 참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졸업 작품이었고 독립 영화였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좋은 수업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에요. 프리프로덕션, 프로덕션, 포스트프로덕션 그리고 개봉까지, 영화를 만든 모든 시간을 온전히 보낸 거죠.”

<용서받지 못한 자>는 생생한 캐릭터들을 내세워 대한민국 군대라는 부조리한 사회를 날것처럼 파고드는, 현실적인 무게감을 지닌 작품이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다룬 이 작품에서 하정우는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뻔뻔함으로 영화에 숨통을 틔운다. 동시에 첫 주연작으로 칸 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는 영예도 누렸다. 하정우는 정확히 기억한다. “2005년 11월 18일에 20개관에서 개봉했죠. 그야말로 긴 여정이었어요.” 그 여정 끝에서 하정우라는 배우의 가능성이 발아하기 시작했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접점이 열린 가운데 김기덕 감독의 <시간>을 통해 <용서받지 못한 자>와는 다른 예민한 감수성을 표현하며 배우로서 깊은 심지를 다져나갔다. 고현정이 출연한 드라마 <히트>에선 주연 자리를 꿰차는 동시에 대중적으로 보다 넓은 인지도를 확보하면서 배우로서도 좋은 인상을 각인시켜나갔고 김기덕 감독의 <숨>에 출연하며 다시 한번 배우로서의 탐구를 거듭해나갔다. 배우 하정우의 경력에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하지만 하정우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길을 따라 달리는 게 아니었다. 가야 할 길을 찾아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선택이 결실을 맺기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정우 - 에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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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감독은 분명 윤종빈과 나홍진이다. 그리고 나홍진은 <추격자>를 통해 하정우라는 배우의 위력을 관객에게 실감시킨 첫 번째 장본인이다. <추격자>의 하정우는 애초에 연민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온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 대한 공격성과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 대한 경계심만으로 내리칠 것인지 내달릴 것인지를 판단할 뿐이다. <추격자>에선 하정우의 본능적인 판단이 빛나는 장면도 있었다. 엄중호(김윤석)을 따돌리기 위해 골목을 부리나케 뛰어가던 지영민(하정우)이 길을 돌다 쭉 미끄러진 뒤 벌떡 일어나 내달리는 장면은 당연히 계획에 없었던 사고였지만 배우의 기민한 판단 덕분에 되레 영화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명장면으로 거듭났다.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 죽이겠다.’ 그래서 그 순간 벌떡 일어나서 뛰었던 거 같아요. 그리 큰 사고가 아니기도 했고. 아무래도 감독이 격렬하게 원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우로서 그런 바람이 있었기에 리액션한 셈이죠.” 그러니까 이는 배우의 본능적 직감으로 완성된 신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감독의 갈망을 이해함으로써 발현된 본능적인 리액션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황해>는 하정우라는 배우를 통해 감정적인 파고를 체감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추격자>의 지영민이 감정의 여백이 없는 살인 본능으로 점철된 육식동물 같은 존재라면 <황해>의 구남은 순수한 마음을 버리지 못해 되레 생채기를 입고 살아남기 위해 혼비백산 달아나는 초식동물 같은 존재다. 행적이 끊긴 아내를 찾지 못하고 살인 누명만 쓴 채 도주하던 구남이 경찰의 불심검문을 따돌리고 산속으로 달아난 뒤 숲속에서 총상 입은 배를 움켜잡고 서럽게 우는 신은 역동적으로 휘몰아치던 서사에 매복된 심연의 통증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인상을 남긴다. “그 장면을 마주한 관객의 동정심을 유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서러운 감정을 느낀 관객들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구남을 응원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황해>의 결말이 주고자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죠.”

나홍진과 함께 한 두 편의 영화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을 분주하게 가로지르는 하정우라는 배우의 육체적인 역동성과 정서적인 내밀함을 담보로 현실에서 생경한 에너지를 체험하는 기회를 열어갔다면, 윤종빈은 하정우라는 배우가 지닌 생생한 얼굴을 통해 영화가 묘사하는 사실적인 세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군대 행정실이나 <비스티 보이즈>의 청담동 호스트 바 그리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의 1980년대 부산 등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과 시대를 재현하고 묘사한 무대 위에 올라 그 자리에 있음직한 누군가를 대변하는 얼굴로 자리매김한다. 나홍진의 영화에 등장하는 하정우가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면 윤종빈의 영화에 등장하는 하정우는 거주자 같은 존재다. 윤리적으로는 옳지 않더라도 현실적인 욕망을 쟁취하거나 소유하기 위해 주도해나가는 존재로 극을 이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관객의 정서와 관점을 좌우하는 핵심 인물의 옆에 자리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승영(서장원)이나 <비스티 보이즈>의 승우(윤계상), <범죄와의 전쟁>의 최익현(최민식)의 주변부에 자리하며 그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끝내 가장 중요한 갈등을 빚어내는 극적인 인물로 존재한다.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끝내 주변부의 인물로 남는다.

대부분의 좋은 배우는 뛰어난 리액션으로 상대 배우를 보좌한다. 최민식과 송강호, 김윤석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은 상대 배우와의 합을 통해 캐릭터의 매력을 더욱 굳게 다진다. 하정우 역시 뛰어난 리액션으로 무장한 배우다. <멋진 하루>에서 전도연이 연기하는 희수의 ‘멋진’ 하루의 수식어 역할에 충실한 남자 조병운을 연기한 하정우는 보조적인 존재로 자리함에도 그 누구보다 인상적으로 남는 방식을 터득한 배우의 은근한 내공을 보여준다. 이는 하정우가 영화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배우 하정우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이 높아질수록 그런 사실을 더욱 인지하려 한다. “제작 초기 단계부터 감독과 얘기를 많이 하려고 해요. 관여한다기보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는 거죠. 캐스팅부터 시작해서 어느 작은 신과 시나리오의 지문 하나까지도, 그런 것을 확인하는 데 시간을 많이 투자해요. 리허설도 좀 더 적극적으로 해보자, 신 바이 신으로 시나리오를 같이 읽어보자, 제가 그런 것들을 제시하고 좀 더 주도하는 편이 됐죠. 물론 감독님이 원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만.”

주연배우들은 축구의 포지션에 비유하면 스트라이커라 할 수 있다. 최전방에서 조연배우들이 공급해주는 기회를 잡아 슛을 날려 골을 넣는 것이 바로 주연배우의 역할이다. 하지만 하정우는 스트라이커라기보다는 리베로 같다. 언제나 최후방에서 골문을 지키는 수비수로 자리하다가도 한순간 골문 앞까지 뛰어와 슈팅을 날려 골을 넣어버리는 킬러 본능을 발휘하는 배우. 묵묵히 자기 위치를 수성하며 팀의 안정적인 운영을 도모하다 자신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고 골문까지 내달려 슛을 날리는 대담함. 전체적인 영화의 방향성을 조망하고 자신의 캐릭터가 자리할 위치와 나아갈 길을 탐색하는 관리자의 시선을 지닌 배우. 그래서 <국가대표>나 <베를린>이나 <암살>의 하정우는 다양한 캐릭터의 앙상블을 통해 얻어내야 할 팀워크에 최대한 협조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자신 앞으로 카메라가 왔을 땐 빈 공간에 공을 찔러 넣어 슈팅 기회를 열어주듯 리액션의 합을 발휘하거나 스스로 빈 공간을 찾아 내달려 슛을 날려버리듯 자신의 역할에 걸맞은 액션을 선보인다.

하정우 - 에스콰이어

핑크 골드 케이스와 실버 다이얼, 갈색 앨리게이터 가죽 스트랩의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 문페이즈 워치, 핑크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 모두 가격 미정 까르띠에. 블루종 130만원대, 스웨터 가격 미정, 청바지 16만원대 모두 폴로 랄프 로렌.

하정우 - 에스콰이어

핑크 골드 케이스와 그레이 다이얼, 그레이 앨리게이터 가죽 스트랩의 드라이드 드 까르띠에 워치, 산토스 드 까르띠에 선글라스 모두 가격 미정 까르띠에. 코트, 바지 모두 가격 미정 라르디니 by 신세계인터내셔날. 터틀넥 스웨터 17만7000원 맨온더분.

하정우가 작품에 따라 자신의 연기 보폭을 정한다는 건 <더 테러 라이브>나 <터널>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더 테러 라이브>는 뉴스를 진행하는 스튜디오 안에 고립된 뉴스 앵커 윤영화(하정우)의 원맨쇼에 가까운 영화다. 사실상 90분이 넘는 러닝타임을 홀로 이끌어가는 하정우의 현란한 단독 드리블을 보는 재미가 상당한 작품이다. 테러리스트와의 통화를 통해 극적인 미스터리를 추적해나가는 흥미가 존재하긴 하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관객 입장에서 집중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하정우의 표정과 감정뿐이다. 결국 <더 테러 라이브>는 침착하게 뉴스를 진행하던 윤영화라는 인물이 홀로 고립된 뉴스 스튜디오 안에서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 과정에서 하정우가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리액션하고 있다는 인상이 느껴진다. <터널>의 하정우 역시 마찬가지다. 무너진 터널에 고립된 남자가 기댈 곳이란 종종 걸려오는 전화 통화와 라디오 방송 그리고 개 한 마리다. 심지어 그는 개 한 마리와 놀라운 리액션(!)을 주고받는데, 이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가 연기한 척 놀랜드와 윌슨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더 테러 라이브>는 <폰부스>에 비견할 만한 원맨쇼다. 두 영화를 통해 하정우가 스트라이커 본능을 지닌 주연배우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반면 <아가씨>는 그동안 보여준 리베로 타입의 연기와는 다른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하정우는 카메라에 앞에 설 때마다 다른 배우에게 공을 돌리기보다는 직접 슈팅을 날린다. 하정우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배우가 그렇다. <아가씨>는 액션과 리액션의 합보다도 불꽃 튀는 액션의 전장 같은 작품이다. 심지어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미장센조차도 연기를 하는 듯한 작품이다. 그런데 평소 감독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나누며 캐릭터의 방향성을 모색하던 하정우가 <아가씨>에서는 특별히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님이 많은 준비를 하셨기 때문에 제가 특별히 뭔가를 더 상의할 필요가 없었던 거 같아요. 감독님이 백작을 <멋진 하루>의 조병운이나 <비스티 보이즈>의 최재훈처럼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특별히 다른 톤을 구상할 필요가 없었죠. 하지만 두 캐릭터보다 업그레이드된 인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리액션하는 대사 톤이나 유머러스한 제스처는 비슷하지만 두 인물에 비해 백작이란 남자는 창피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쩌면 자존심 자체가 없는 셈이죠. 그래서 조병운이나 최재훈과는 또 다른 캐릭터라고 저 혼자 느꼈어요.”

하정우 - 에스콰이어

화이트 골드 케이스와 실버 다이얼, 그레이 앨리게이터 가죽 스트랩의 드라이브 드 까르띠에 엑스트라 플랫 워치, 화이트 골드 저스트 앵 끌루 브레이슬릿 모두 가격 미정 까르띠에.스웨터 가격 미정 브루노바피. 바지 가격 미정 맨온더분.

관객은 매번 새로운 연기를 기대하지만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란 생각보다 매번 새롭진 않다. 오히려 익숙한 몇 가지 패턴이 대부분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거나 고스란히 이어진다. 하정우에게도 그런 몇 가지 패턴이 있다. 이를테면 수다스러운 캐릭터를 연기하며 긴 대사 처리를 할 때 몇몇 음절이나 어절에 스타카토를 찍듯이 경쾌한 리듬감을 얹는다거나, 과묵한 인물을 표현할 때 유독 입을 잠그듯 오므려 모은다거나, 혹은 살짝 들어 올린 턱과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로 과격한 언어를 섞어 분노를 표출한다거나. “제가 표현해온 연기 패턴을 굳이 지우려고 하진 않아요. 전에 했던 방식을 지우고 새로운 표현을 보여준다는 게 과연 적절할까, 그것이 이 캐릭터에 정말 도움이 될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재미있을까. 이 모든 물음에 대해 지금까지 아니라고 답해온 거 같아요. 어차피 살아가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육체의 움직임도 달라지는 거니까. 제 자신을 잘 관찰하면서 그런 변화를 어떻게 캐릭터에 접목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는 거죠. 시나리오에서 인물이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이냐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얻은 해석을 통해 캐릭터의 감정 표현 또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거 같고요.”

하정우는 이미 두 편의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기도 하다. 그가 연출한 <롤러코스터>와 <허삼관>은 형식적인 면에서 서로 판이한 영화지만 모두 대사량이 방대하다는 점에서 그가 말맛을 중시하는 배우 혹은 감독이 아닐까 추측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우디 앨런이라 그럴까요?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게 들리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을 통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아직은 감독 하정우의 역량보다는 배우 하정우의 역량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영화의 전반적인 조율을 신경 쓰는 배우가 만들어낸 두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형식성에 어울리는 연출적 성취도 엿보인다. 감독 하정우로서의 야심이 궁금해졌다. “야심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해서 인생이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자연스럽게 경험이 쌓이면 차기작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땐 관객들과 좀 더 큰 공감대가 형성되는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겠죠.”

2010년 3월 하정우는 처음으로 미술 개인전을 열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시간이나 때우자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우연히 한 큐레이터의 눈에 띄어 개인전으로 이어진 뒤 작가로 인정받게 됐다. 흥미로운 건 그가 미술을 접하는 방식 또한 배우로서 영화를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화풍이 궁금해서 영화 <바스키아>를 보고 그의 인생을 알게 됐고,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과 잭슨 폴록의 인생을 하나씩 수집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하정우에게 미술이란 묘사가 아닌 서사의 예술로 적용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필경 배우의 팔자를 타고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미술가로서의 야심을 물어보는 건 애초에 부질없는 일일 거다. “좋은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예요. 제가 좋은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해도 남들이 좋아하리란 보장이 없으니까. 심지어 느낌이 없다고 방치했던 그림을 큐레이터가 보더니 개인전의 메인 작품을 쓰겠다는 경우도 있었고요.”

하정우가 쓴 에세이 <하정우 느낌 있다>에서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초록색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요즘은 초록색 좋아해요. 당시엔 색을 쓰는 게 어려웠나 봐요. 초록색은 유독 손이 가지 않았죠. 그런데 지금은 녹색 계열 물감을 제일 많이 써요.”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그 변화 속에 인생의 힌트가 있다. 하지만 하정우에게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면 새로운 인물을 만나고 새로운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니까 매번 낯설고 생소해요. 항상 그 인물을 알기까지의 과정이 어려워요. 어디서 어디까지 연기의 범주로 잡아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연기하는 건 언제나 어렵다는 생각이 들죠.” 어쩌면 하정우의 연기란 언제나 그런 어려움을 관객에게 들키지 않는 게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정우의 게임은 끝없이 이어진다. 동명 인기 웹툰을 스크린에 옮긴 김용화 감독의 신작 <신과 함께>가 올해 개봉을 준비하는 가운데 얼마 전엔 장준환 감독의 신작 <1987>의 촬영을 마쳤고, <더 테러 라이브>를 연출한 김병우 감독의 신작 에 캐스팅되며 쉼표 없는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크게 자라난 대중적 신뢰감은 배우로서의 훈장이기도 하지만 부담스러운 짐이기도 할 것이다. “더 부지런해지고 더 치열하게 고민하는 수밖에 없어요. 어차피 모든 배우가 그런 부담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저도 긍정적으로 감당해야죠.” 사람은 누구나 변한다. 하지만 때론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파해나가려는 노력. 하정우는 끊임없이 리액션한다.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리액션한다. 그것이 지금의 하정우를 있게 만든 재능이다. 앞으로도 하정우를 있게 만들 재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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